< 32화-조금은 이상한 인맥 >
긴머리에 야구모자가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매. 하얀 피부와 함께 옷 위로도 티가 나는 라인.
전에도 생각한 적 있는 것 같지만, 닉네임 '크보쨩핥짝'은 냉막한 미인상의 여성이었다.
"헤헤. 헤헤헤...."
물론, 이렇게 표정이 풀어지지만 않는다면에 한해서였지만.
"...계약서. 제대로 확인하신거 맞죠?"
"네, 네?"
"네. 계약서. 핥짝님 눈 앞에 있는 계약서요."
"아. 계약서..."
이 여자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좋은 밤 되세요!'같은 채팅을 치던 사람과 눈 앞의 중증변태는 과연 동일인물이 맞는건가?
크로스보우는 다시 한 번 강한 의문을 느끼며 머리를 짚었다.
"괜찮으신거 맞죠?"
"그, 그럼요...."
근데 왜 그렇게 다리를 배배 꼬는데.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해주실 일은 별로 없습니다. 트리키 뷰 많이 보시죠?"
"저,저 크보님 방송밖에 안봐요...!"
"제 방송시간이 하루에 12시간은 되니까 많이 보시는거 맞네요."
크로스보우는 계약서 조항을 다시 설명했다.
"많이 과격하다 싶은 채팅 벤, 그리고 채팅창이 터질 거 같을 때 적당한 조치 정도만 취해주시면 됩니다. 가끔 클립도 따주시면 좋겠구요."
"그럼 뭐 해주시나요?"
...이 여자. 하나도 확인하질 않았군.
"......월급을 드립니다. 매달 10일에 입금될거고, 10일이 공휴일이거나 토요일이면 9일에, 일요일이면 8일에 입금될 겁니다."
"아...."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대답해드릴게요."
그는 커피를 쭉쭉 들이키며 말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근처의 카페. 크로스보우의 생각대로 그녀의 집은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집도 가깝고, 밈이나 크로스보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다가 커뮤니티에도 자주 출몰하며 시간도 많은지 본 방송에까지 매일 들어와있는 시청자.
조금 변태같다는 걸 빼면...어디가서 이런 훌륭한 매니저감을 찾기는 힘들지. 그는 예전에 고용했던 매니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사실...돈보다는...욕이라도 해주시는게...."
"...쿨럭."
그런데 마치 왜 변태라는 요소를 뺀 채 생각하냐고 항의하는듯한 답변. 크로스보우는 사레가 들린 목을 조용히 탁탁 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안된다는 표현.
"아...음. 그러엄...전화할 때마다 욕 한 마디씩...."
"오히려 조건이, 쿨럭. 늘어났는데요. 욕은 안됩니다."
"아. 그럼 번호는 주신다는거네요!"
"...."
그야 고용관계니까 당연하지.
그러나 그 말을 크로스보우가 입에 담는 일은 없었다. 말을 할수록 말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
"아무튼 하신다는거죠?"
"음. 돈은 별로 필요없는데...절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상하게 들리는군. 제발 생긴대로 놀았으면 좋겠다. 욕도 듣는 것보단 하는 걸 좋아할 거 같이 생겼는데.
"그럼 오늘 공지 올리고 다음 방송부터 진은검(매니저를 나타내는 마크)드릴게요. 성함이?"
"채은아에요"
생각보다 멀쩡한 이룸이다.
"네. 은아 씨. 여기 싸인 부탁드릴게요."
"앗. 네."
"확인은 하셔야죠. 제가 노예계약서라도 들고 왔으면 어쩌려고."
"노예...?"
"...."
크로스보우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지 않으려 애썼다. 여성이랑 잘못 엮였다가 한 방에 가버린 스트리머들이 몇몇 머릿속을 스친다.
그는 계약서 한 부를 그녀에게 넘기며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음 방송부터 잘 부탁드릴게요. 은아 씨."
"네. 저, 저, 혹시 이번에도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번에도 어디 올리지만 않으신다면야...."
"네, 넵!"
몸을 벌떡 일으켜 상반신을 이 쪽으로 쭈욱 빼는 채은아.
이게 그 아이트래킹 챌린지인가 그건가. 크로스보우는 최대한 그녀의 상반신에서 눈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찰칵!
"감사합니다. 크보님!"
"네. 그럼 이제 일어나죠."
그렇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마주 고개를 숙이고 집에 들여보내는 것까지 완수.
"...찬 개꿀."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채은아에게서 조금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았지만,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
[예지]
[그래서 계약했다는거지?]
[나]
[ㅇㅇ]
[예지]
[ㅇㅎ응응]
[그 친구 번호는?]
[나]
[010-XXXX-XXXX]
[예지]
[오키!]
[아 그리고 편집 오늘 안에 끝날듯ㅎ]
[나]
[올ㅋㅋ]
[예지]
[죽어가는 오리 이모티콘]
[아맞다 세린 언니한테서 전화왔었어 오늘 마지막 방송인데 끝나고 술먹자던데]
뿅맛사탕 얘기였다.
크로스보우는 피식 웃었다. 마지막 방송?
[나]
[마지막 방송은 무슨ㅋㅋ나중에 또 합방이나 하자고 전달ㄱㄱ]
[예지]
[ㅔ?? 오빠가 그렇다면야 뭐 ㅇㅋㅇㅋ]
[이따 갈겡]
[나]
[말해두는데 중국집은 안먹을거다]
[예지]
[어케알앗ㄴ;]
***
"지금껏 속여서 죄송합니다....저는 오늘 부로 방송을 접고...."
-퍄퍄퍄퍄;
-새로운 취향에 눈떠버렷....
-오이오이 믿고 있었다구
-지금이 더 좋아요
-주책누님 퍄퍄;
엥?
이세린은 고개를 숙이려다가 눈을 비볐다. 채팅창 반응이 뭔가 이상했던 탓이다.
[현재 시청자 수 : 1,365명]
평소의 2배를 넘는 시청자 수. 그렇다는 건 분명 진성 팬들뿐 아니라, 논란 때문에 찾아온 사람도 존재한단 뜻이다.
['누나나죽어'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너무조와요 퍄퍄;
"어...."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오히려 일관되게 좋은 반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탕이를 지키기위한 뿅맛누님의 설계였던거시야요
-아ㅋㅋㅋ뿅맛이랑 사탕이랑 다른 사람이었냐고ㅋㅋ
-라는 내용의 애니 추천좀
-계속 방송하는 테챠앗!
채팅 내용은 남들에게 보이기 조금 부끄럽지만...아무튼 그랬다.
"왜...왜 좋아하세요? 2년 전부터 여러분들을 속여왔던건데...?"
-이상하긴했음ㅋㅋ갑자기 올오버 계정 삭제하고 재생성했다고 하질 않나ㅋㅋ
-눈치 챌 사람들은 눈치챘을껄
-알고도 남은 정공쉑들임ㅋㅋ
-남아서 다행이었던 것입니다 퍄퍄; 넘모좋다
-존버는 승리한다
"그렇다는데? 언니?"
이하린이 말했다. 올오버 속의 뿅맛사탕과 똑같은 외모. 거기서 아주 약간 수척해진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
-자매 방송가즈아!
-뿅누나랑 사탕이네
-난 그거보다 나이 속인거 더 괘씸한데수웅
-ㄹㅇㅋㅋ더 늙게 설정하는 사람이 어딧엉~
-원래는 몇살임?
-27 25ㅋㅋ
-아ㅋㅋ크보랑 동갑인데 누나인 척 했네
-가만히 있던 크보 어리둥절잼ㅋㅋ
"너, 너희 진짜...."
"내 말 맞지? 이 자식들 변태새끼들 뿐이라 별 생각 없을거라고."
-포상 ㅗㅜㅑ;
-준비됐지 탕?
-물론이지 뿅!
-으 *발 오늘 채팅창 찐 농도 왜이래
-여긴 원래 이랬어
"이건 못 참겠다. 너 벤."
이하린은 능숙하게 메뉴를 조작하며 말했다. 이미 세린이 생각했던 분위기와는 이미 한참 멀어져버린 상황이었다.
-다들 ㄹㅇㅋㅋ만 쳐!!
-ㄹㅇㅋㅋ
-뿅누님이 좀 많이 풀어줬지 그동안ㅋㅋ
"나, 나는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언니. 킹콩이 왜 뒈졌는지 알아? 얘들처럼 기어오르다 뒈진거야."
-도망쳐~
-도망가~ㅋㅋ
-아ㅋㅋ2년만에 입담무냐고!
-입담이 입에문담배라는게 정설
-아ㅋㅋ도망가~
"뭐? 입에 문 담배? 담배빵 딱 대. 넌 이제부터 유료채팅만 쳐라."
['아ㅋㅋ'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이거 풀어주세~여
이하린은 웃었다.
"...!"
"딱 열 번만 더 후원하면 풀어줄게."
언니로서 그간 무력함만을 느끼게 했던 동생의 얼굴.
거기에 피어난 웃음.
['아ㅋㅋ'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이제 풀어줘!!!흐어아!!
"응. 만원 너무 달아~. 9번 남았어~."
그 모습을 확인한 세린은 무너져내렸다.
-뿅누님 운다
-울어?
-사탕아 저새끼가 했어!
-똥닝겐데수!!
['아ㅋㅋ;'님이 2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나 아냐!! 아니라고!!
"아니. 아니에요...그냥."
그녀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어떻게든 말을 이었다.
"그냥 고마워서...다들, 다들...."
이하린은 그런 언니의 모습에 애처롭게 웃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많았어. 언니."
"......흐끅. 히윽."
"진짜, 고생 많았어."
-아ㅋㅋ포옹하는데 키 차이보소ㅋㅋ
-ㄹㅇㅋㅋ언니한테 키 다 뺏겻네ㅋㅋ
-얼굴도 좀 뺏김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자식들이?"
"...푸흡."
"어, 언니?!"
"큭큭큭큭...미, 미안. 웃겨서....푸흡!"
"...."
-ㅋㅋㅋㅋㄹㅇㅋㅋㅋ
-ㅋㅋㅋ아ㅋㅋㅋㅋ
그렇게 그들은 마침내 함께 웃었다.
각각, 끔찍했던 2년간의 역경을 넘어 얻은 달콤한 보상이었다.
***
그렇게 수많은 사건이 있고 며칠.
크로스보우 강점기, 크로스보우 증후군이라고 까지 불리던 현상도 차츰 가라 앉아가고 있었다.
한 때 온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점령했던 크로스보우였지만, 범국가적인 올오버판에는 항상 새로운 이슈가 벌어졌던 탓.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네이션스 컵]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 이번엔 우승 노려볼만하냐?]
-라인업 괜찮던데
└킹능성있다고 본다
└ㅋㅋㅋ일본이랑 중국한테만 이기면 됨
└아무리 생각해도 동북아시아 3국 예선전 에바아님?
어느덧 한달 뒤로 다가온 올오버의 국가대항전.
이미 올오버가 세계적인 게임이 된만큼, 그 열기는 뜨거울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번 국가대항전, 그러니까 [네이션스 컵]은 특이하게도 예선에서 중국, 일본과 겨뤄야하기에 더욱 그런 상황.
[ㅋㅋㅋ짱*, 쪽*리쉐키들 딱 대ㅋㅋ]
-우리는 블보 보유국이다!
└블보가 뭐임?
└블래드+크보요
└??블래드가 왜 앞에있음ㅋㅋ보블이겠지
└????한국 최고의 프로게이머 VS 인터넷 방송인ㅋㅋ루삥뽕
└윗 댓글 반대수 뭐냐
└크보는 솔직히 월드클래스인거 ㅇㅈ 카운터선수랑 이응좌가 공인함
└아ㅋㅋ작년에도 설레발치다가 4강딱 했잖아ㅡㅡ
언제나 그렇듯 없던 논란도 만들어내는 커뮤니티.
'누가 더 강한가?'에 대한 이야기는 질리지 않는 떡밥이었기 때문일까.
크로스보우는 이름은 아직까지도 여기저기서 끝없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했다. 그만큼 그가 달려온 길이 레전드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
최단기간 최고 계급 달성, 난공불략이라는 소리가 나오던 두 균열방어전의 최고랭크 클리어, 거기에 트리키 뷰를 좀먹던 허이크를 처단한 사건까지.
이 모든 게 한달도 안되는 시간에 이뤄진 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니 상상 속에서?' 따위의 소리나 들을 법한 이야기.
그야말로 유래없는 '초신성'에 어울리는 행보였다.
[지금까지 크보처럼 참가권받은 사람 몇 명임?]
-ㅈㄱㄴ
└5명인가그럼ㅋㅋ크보랑 미국에 R1팀 프로선수랑 '그 나라'에 하나
└남은 두 명은 니가 묵어부럿어?
└니가 찾아봐ㅡㅡ
└ㅇㅋ;ㅈㅅ;
그러나 넓디 넓은 올오버판.
떠오르는 초신성은 크로스보우 혼자가 아니었다는걸까. 커뮤니티에선 크보라는 이름말고도 꽤 많이 언급되는 이름이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R1라는 프로팀의 그레이드 선수였다.
무려 5개의 서버에서 [배틀로얄] 1등을 달성한 신예.
[한국의 블래드 VS 미국의 그레이드]
-누가 이김? 모드는 배틀로얄이라 치면
└올오버의 왕과 초거대신성 매치업;
└블래드는 주종목 AOS아님? 배틀로얄이면 그레이드가 이길듯;
└그레이드 서버 5개 배틀로얄 평정했던데ㅋㅋ이번에 한국으로 훈련 옴
└응 다이아 계급 선에 정리
"오호."
서버 5개에서 1등라니. 대단하군.
크로스보우는 하품을 하곤 커뮤니티를 종료했다.
[나]
[예지야 너 혹시 그레이드라고 아냐?]
....
답장이 없군. 그러고보면 신예지도 며칠 밤을 꼬박 샜으니 아직 잘 시간이다.
[크로스보우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보다는 방송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 32화-조금은 이상한 인맥 > 끝
ⓒ Rea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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