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그 패 봐봐 >
크로스보우는 결국 본래의 방송 일정보다 훨씬 이르게 캡슐로 기어들어갔다.
알 수 없는 열쇠니 캐릭터 강화권이니 하는 걸 확인한 그는, 먹던 밥도 내팽겨친 채 올오버로 풀다이브 했던 것.
덕분에 신예지는 방 안에 홀로 남아 캡슐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크로스보우가 풀다이브한 게 맞는지 힐끔 확인했다.
[캡슐이 가동 중 입니다]
[가상 현실 '올오버' 모듈 활성화 중...]
풀 다이브를 나타내는 문구.
"...진짜."
신예지는 그제서야 긴장했던 몸이, 추욱 처지는 걸 느끼며 주저앉았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쥐며 숨을 내쉬었다.
"나는 신경도 안쓰고...씻겠다고 옷이나 벗고...."
표정이 어색하진 않았겠지? 예지는 아까 전의 상황을 떠올리다가 뜨거워지는 얼굴을 감췄다. 자꾸 힐끔대게 되는 자신의 눈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나빴어."
왜 자꾸 씻으러 갈 때마다 위에 옷만 벗어놓고 들어가는거야? 보는 사람은 눈을 어디다 두라고. 벗을거면 아래도 벗던지....
찰싹!
예지는 양볼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갑자기 엄한 상상이 들었던 탓이다.
태연한 척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크로스보우가 들어가있는 캡슐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분명 예전엔, 이렇게까지 긴장하거나 그러진 않았을텐데. 그냥 가끔 사심 섞인 장난이나 치곤 하는 사이였을 뿐일텐데
깨달으니 어느새 더 이상 형이라는 호칭도 쓰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신예지는 크로스보우가 따라준 물잔을 만지작대며 생각했다. 앞에서 긴장하는 티만 안났으면 좋겠는데.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크로스보우가 별난 선배에 불과했던 시절을.
외모는 어딜 봐도 인기 많을거처럼 생겨서는 여자 후배들의 메세지를 '게임하느라 못 봤다' 같은 말로 무시하던 크로스보우를.
어차피 자긴 게임만 있으면 된다며 그녀를 도와주었던 그 때 그 모습을.
"...."
한참동안 옛 기억들을 떠올리던 신예지는 결국 미소 짓고 말았다.
그 시절의 그 남자와, 지금 강화권이 뭔지 궁금하다며 그녀를 버려두고 냅다 캡슐 속으로 들어간 크로스보우가 똑같은 사람이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던 탓이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아이튜브에 접속했다.
아까 찍은 영상이 편집도 없이 예약 업로드 되어있는 모습.
[올오버 캐릭터 강화권]
-24시간 후 공개
날림으로 만든 썸네일.
그에 반하는 듯한 충격적인 단어의 조합.
이미 수많은 구독자를 확보한만큼 이 정도면 어그로로는 제격이다.
"잘되면 좋겠다. 우리 선배님."
신예지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내심 이 영상이 올오버판에 새로운 물결을 불러 일으킬거란 걸 직감했다.
이건 단순히 엄청난 기록을 달성하거나, 악성 스트리머를 처단하거나 해외에서 초신성으로 평가받던 선수를 박살내거나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사건들은 모두 비범하긴 했으나, 결국 '새로운 고수가 등장했다'로 귀결되는 사건들에 불과할 뿐.
"...."
예지는 화제의 중심에 설 크로스보우를 잠깐 걱정했다가, 이내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더 원 그라운드에서 크로스보우가 핵쟁이들을 때려잡던 모습이 떠올랐던 탓이다.
***
"...."
올오버 속.
크로스보우는 오랜만에, 시청자 없이 연습 모드에 들어와있었다.
오늘은 본의 아닌 휴방이다.
그도 그럴게, [강화권]쯤 되는 사안을 예고도 없이 생방송에서 냅다 공개하기엔 아까운 면이 있었던 것.
커뮤니티에선 아직까지도 어제 있었던 그레이드와 크로스보우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뿐.
이런 주제를 들이밀기엔 조금 이르지 않냐는 게 신예지와 크로스보우 둘 모두의 의견이었다.
[캐릭터 강화권].
보상 상자 속에서 돌연 등장한 티켓.
"그래도 방송에서 잘 설명하려면...뭐가 뭔지 대충이라도 알아놔야겠지?"
크로스보우는 올오버 내에서도 구현된 티켓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실제로는 생생한 반응을 위해 생방에서 최초로 확인하는게 좋겠지만...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한 명의 게이머로서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근데 이거 뭔가 이상한데."
구현된 티켓은 현실과 다르게 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종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마나 같은 느낌은 아니고...."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는 티켓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넘어갔다. 당장 어떤 식으로 강화가 이뤄질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캐릭터 강화권. 코드 입력."
[SYSTEM]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SYSTEM]강화권 인식 중...
[SYSTEM]인식 완료. 소유자 '크로스보우'님. 안녕하십니까.
"어...안녕?"
크로스보우는 멍하니 대답했다.
설마하니 시스템 메세지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던 것.
[SYSTEM]본 강화권은 실버 등급입니다.
[SYSTEM]크로스보우님에게 1,000P의 구현력이 부여됩니다.
구현력? 그게 뭐지.
공격력 강화나 이동속도 강화같은 느낌은 아닐거라 예상은 했지만...이건 또 생소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단순한 강화랑은 다른 모양.
"어떻게 하는거지."
[SYSTEM]강화할 캐릭터를 고르십시오.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르륵 떠오르는 캐릭터 선택창.
크로스보우는 강화과정을 중간에 취소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는, '더 원 그라운드'를 골랐다.
[SYSTEM]선택된 캐릭터 : 더 원 그라운드.
[SYSTEM]강화할 능력을 말해주십시오.
"응?"
아무런 보기도 주지 않고 그냥 말하라니.
크로스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노려보면 즉사시키는 능력?"
[SYSTEM]해당 능력에 필요한 구현력 계산 중...알 수 없음.
[SYSTEM]판정 : 불가
"오."
이런 식이구나. 신기하군.
원하는 능력을 말하면 올오버 자체 AI가 알아서 판단하는 듯 하다.
크로스보우는 싱글벙글 웃었다.
이건 방송하기에 딱 좋은데. 시청자들의 의견도 들어보면 괜찮을 듯 싶었다.
"총탄이 유도가 되는 능력?"
[SYSTEM]해당 능력에 필요한 구현력 계산 중...알 수 없음.
[SYSTEM]판정 : 불가
알 수 없음이라.
크로스보우는 턱을 쓰다듬다가 재차 말했다.
"발동 시 10초간 발사하는 모든 총탄이 유도가 되는 능력. 쿨타임 10분."
[SYSTEM]해당 능력에 필요한 구현력 계산 중...800P.
[SYSTEM]판정 : 문제 없음
[SYSTEM]스킬을 생성해 캐릭터를 강화하시겠습니까?
뭐가 이렇게 비싸. 그냥 시계워치 출신의 캐릭터랑 같은 능력인데.
아무튼, 자세할수록 필요한 포인트가 줄어드는 듯 보였다.
정말 딱이군.
싱글벙글 미소가 지어지다 못해 나지막한 웃음까지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
게이머가 원하는게 뭔지 잘 알고 있는 내용의 티켓이다.
그런데 이런거라면 올오버 오리지널 캐릭터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크로스보우는 문득 드는 생각에 고심하다가 고개를 털었다.
아무렴 어떠랴. 그저 어서 내일이 오길 고대할 따름이었다.
"강화 취소. 다음에 할게요."
[SYSTEM]캐릭터 강화를 취소합니다.
[SYSTEM]호출 시 코드를 재입력해주십시오.
그는 시스템 메세지를 뒤로 하고 연습모드를 나왔다.
설렘은 조금 뒤로 미루자.
오랜만에 맞이하는 쉬는 날.
혼자 조용히 게임이나 해야겠군.
그러고보면, 1대1대전의 [똥의호흡]을 너무 오래 방치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아니. 여러분. 제가 합방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게 아니라니까?"
스트리머 네임 '짬먹을타임'.
"그리고 크보님은 이미...너무 대기업이 됐어. 이제 저같은 하꼬랑은 좀. 어. "
약칭 짬탐은 그렇게 말했다. 방송을 하던 중 벌써 몇 번째 '크로스보우님이랑 합방은 언제해요?' 같은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안읽씹아니냐고 아ㅋㅋ
-누님...또 차이신겁니까?
-ㅋㅋㅋ합방하면 강제 우결당한다 크보 도망가~
-ㄹㅇㅋㅋ
"강제 우결이라니. 여러분. 제가 그렇게 급한 사람으로 보여요?"
-ㅖ
-ㅔ?
-시집을 등진 자
-크보 오늘 휴방이라는데 혹시 모르니까 1대1 돌려보자ㅋㅋ루큰코
"혹시 모르니까 1대1 돌려보자고요?"
짬탐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주로 하는 모드인 레이드를 돌리고 싶어도, 고정으로 같이 하던 스트리머들이 아직 로그인을 하지 않은 상태.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럼 그래볼까요?"
-ㅇㅇㅋㅋ1대1은 계급 달라도 매칭되자너
-ㅋㅋㅋㅋ같이 걸릴 리가 있겠냐고ㅋㅋ
-ㄴㄴ지금 똥의호흡 출몰시간임
-차라리 균방전 돌리죠 크보 균방전 하나 더 해야된다고 그러던데
"그래요? 으음. 균방전이냐 1대1이냐. 솔직히 만날 거 같진 않은데."
-답은 균방전이다
-1대1이 국룰ㅡㅡ
-사람들 죽어나가서 찜찜해지는 극혐 균방전 VS 잘생긴 올오버 유저와 1대1로 미팅
-ㅋㅋㅋㅋㅋ아 스포on
시청자들의 채팅. 짬탐은 뭔가에 홀리듯 [1대1 모드]를 눌러버리곤 화들짝 놀랐다.
"어머! 이게 왜 여기 있지?"
-ㅋㅋ아ㅋㅋ
-뭔 냉장고에 리모컨 넣어둔거 같이 말하네
-ㅋㅋㅋㅋㅋㅋㅋ
-망치여자가 나가신다ㅋㅋㅋ
-이 누나는 한결같네ㄹㅇㅋㅋ
"팀전이 낫죠? 똥의 호흡님 팀전밖에 안한다던데."
-ㅇㅇ선봉으로 나와서 다 때려잡을려고
-???: 동료? 제게 필요한 건 그런 불편한 게 아닙니다
-ㄴㄷ^^
-??선생님은 그게 네다씹인줄 어떻게 아셧죠?
-ㅋㅋㅋ아ㅋㅋ
그녀는 웃으며 시청자들과의 잡담을 이어나갔다. 말로는 크로스보우를 만나기 위해서 1대1 모드를 돌리는 거라고 했으나 실제로 그럴 확률은 크지 않다.
그 사실을 시청자들도 모를 리 없으니, 그냥 농담따먹기나 하는 모습.
그러나 그 생각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뀌게 되었다.
정확히는, 상대팀의 선봉이 아군 팀의 3번째 선수까지 박살내버렸을 때였다.
[SYSTEM]백 팀 선봉 승리!
[SYSTEM]백 팀 선봉 승리!
[SYSTEM]백 팀 선봉 승리!
"어?"
그녀는 말을 멈췄다.
선봉이 2번째 선수, 차봉까지 잡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평균 계급이 높이 잡혀도, 개개인의 컨디션이나 팀운에 따라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선봉이 중견을 잡는 건 말이 조금 다르다. 통상적으로 선봉과 실력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기 시작하는게 바로 중견 선수부터였기 때문.
"경기시간이 이렇게 짧아?"
-???
-설마?
-뭔 매치업이 1분을 안가누?
-무냐??
뭔가 이상함을 느껴 팀 보이스를 켠 짬탐, 이수아.
-"개잘해. 시이벌!! 걍 끔살당했네."
-"이 시대 최악의 중견."
-"짬탐님. 짬탐님. 아. 아직도 팀보이스 끄셨나보다."
-"짬먹을 타임 곧 똥먹을 타임 되겠네. 크크."
이수아는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끼며 황급히 점수판을 켰다.
그러자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닉네임.
[백 팀 선봉]
[똥의호흡](3연승)
-뭐여
-????
-ㅋㅋㅋㅋ미친ㅋㅋㅋ
-와! 유명인!
-이게 만나네ㅋㅋㅋ
-미팅 성사ㅋㅋㅋ
"진짜 크보님이라구?"
-짭은 아닌듯? 계급도 맞고 뭣보다 실력이ㅋㅋㅋ
-아ㅋㅋㅋ운도 좋지
-크보는 운 지지리도 없는거네ㅋㅋㅋ
-누나나죽어!
-누나가 죽어!
-ㄹㅇㅋㅋ
이수아의 시선이 멍하니 대전 장소로 향했다.
평소 방송과는 다르게, 거대한 해머를 들고 있는 크로스보우의 모습.
이수아의 주 캐릭터와 동일한 캐릭터, [괴물 헌터들]의 해머 베이스 캐릭터다.
-ㅋㅋㅋ아ㅋㅋ
-이게 그 소개팅에서 물건 고르긴가 하는 그거냐?
-???아재 서요?
-ㅋㅋㅋ크보 폭탄처리반행ㅋㅋ
-[삭제된 채팅입니다]
< 40화-그 패 봐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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