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막간의 합방 >
"흐음."
그 시각.
크로스보우는 본인이 짬탐 이수아와 매칭된 것도 모른 채 무언갈 시험해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거지.
그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고심했다. 아까부터 시도하고 있지만, 도저히 의식하고는 그 회색빛 세상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강한 상대와 맞서 싸우거나, 다대일 상황에 몰리거나, 아무튼 극한의 집중력이 필요할 때마다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이던 착각.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걸로만 느껴지던 감각.
크로스보우는 지난 배틀로얄에서 드디어 그 현상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같은 현상을 한 번이 아닌 세 번이나 겪었으니, 당연한 결론이었다.
아무튼, 그렇기에 아직 해보지 못한 수많은 다른 모드들을 제쳐놓고 굳이 1대1 모드에 들어왔던 것.
뭔가 상대할 사람이 있어야만 좀 더 쉽게 연습이 가능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테크닉처럼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떠오르는 키워드라고 한다면, '의식의 가속화' 정도가 유사한 느낌.
그러고보면 그 현상을 겪었던 날엔 평소보다 약간이지만 더 피곤했었다. 그는 오늘도 예지가 집 문을 따고 들어올 때까지 엎어져있던 걸 떠올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좀 강한 상대가 나오면 좋겠군."
그리곤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백 팀] : [청 팀] = 3 : 0
당연하다는 듯이 3연승.
상대팀의 중견까진 별 볼 일 없던 수준. 부디 대장까지 가면 조금 다르길 빌 뿐이었다.
[SYSTEM]백 팀 선봉 vs 청 팀 부장
"그니까 크로스보우가 뭔데. 씹덕들아!"
그 때 막, 대기실에서 맵으로 소환되어 나온 상대팀의 유저.
저건 자기네 팀의 팀 보이스에 대답한건가?
크로스보우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안도해야할지 안타까워 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긴 이래저래 유명해졌다고는 하나, 그의 이름이 뜬 지가 고작해야 한달 남짓.
게다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그 이름이 주로 알려졌으니, 소식이 느린 사람이라면 아직까지 그에 관해 모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백 팀]
[괴물 헌터들-해머 베이스 캐릭터]
vs
[청 팀]
[더 원 그라운드]
매치업 정보가 전광판에 떠오른다.
"어?"
크로스보우는 상대방의 캐릭터를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원 그라운드?"
-"오. 더원그가 나오네."
-"번데기 앞에 주름잡기 아님?"
-"똥 앞에서 구린내 풍기기. 크크"
-"푸흡. 크, 크보님 화이팅!"
팀 보이스로 들려오는 팀원들의 대화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 태반.
그러고보면 다른 사람도 더 원 그라운드를 픽할 수 있었지? 그는 감탄성을 냈다.
짧은 기간이지만 매일 올오버를 플레이했음에도, 지금껏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해 잊고 있었던 것.
"좋은데."
심지어 상대의 순번은 4번째, 부장이다.
최소 다이아 계급부터 1대1 대전의 부장을 부여받는다는 걸 생각해보면...실력이 없지는 않을 계급.
"아. 그냥 해머캐랑 카운터 상성이라서 픽한거라고요. 아시겠어요?"
-"아 딱 봐도 크보 보고 픽 박은거 맞구만. 뭔...하여간 일대일 모드에는 또라이들밖에 없다니까?"
-"이잉? 기몰잉!"
-"...네 다음 또라이 조무사."
-"비나이다 비나이다...승격전 날로 먹게 해주세요...."
절대로 상대의 주 캐릭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팀원들의 반응. 더원그의 인식이 어느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말들이었다.
크로스보우는 평소 자신이 쓰던 스패츠나츠 헬맷을 보며 웃었다. 저렇게 생겨먹었군.
"카운터 상성이라."
그 정도면 회색빛 현상을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해머를 어깨에 걸치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SYSTEM]각 플레이어의 시작 위치를 임의로 설정합니다.
[SYSTEM]설정된 상호간의 거리 : 장거리
[SYSTEM]설정된 시작 위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설정된 시작위치는 장거리.
오히려 좋다. 본래라면 절대 동의하지 않아야 할 거리지만, 지금은 오히려 불리한 편이 좋다.
[SYSTEM]양 팀 모두 설정된 거리에 동의하셨습니다.
[SYSTEM]맵 : 파괴된 롯디 타워.
[SYSTEM]대전이 시작됩니다. 레디...5...4...3...2...1.
-"헐. 거리 싸움 안함? 자신감 뭐임."
-"올킬 보여주나?"
-"크보쨩! 믿고 있다구! 줴엔장!"
[SYSTEM]FIGHT!
***
"으아아아악!!!"
...생존 모드 재밌어보이던데.
그는 문득, 아까 연습모드를 나오고 한참 고민했던 모드를 떠올렸다.
[생존 모드].
잘은 모르지만, 예전에 유행했던 티비 프로그램과 비슷한 모드라 들었다. 전직 특수부대원이 나와서 온갖 벌레나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던 그 프로그램. 물론 게임성을 위해서인지 그런 끔찍한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나오는 동식물이나 곤충도 실제 지구의 것이라기보단, 판타지틱한 것들.
나중에 시간나면, 같이 할 사람들이나 생각해봐야겠군.
강화권에 대한 방송이 끝나고...아마 네이션스 컵까지 마치고 나면 시간이 나지 않을까? 그는 대충 때를 가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살려줘!!"
"해치지 않아요."
그는 웃었다. 실패로군.
전투 중 다른 생각을 하는 걸로도 발동하지 않는다.
다른 생각에 빠져있으면 위기감이 높아져서 될 줄 알았는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파지지직-.
"으그그그극!!"
게임, 괴물헌터들에서 몬스터들을 잡을 때 쓰는 전기트랩.
상대편은 마치 토끼몰이라도 당하는거 마냥 크로스보우의 유도에 의해 트랩에 걸린 채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더 원 그라운드가 똥 캐릭터 취급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으그극...왜 안 움직여...."
"흐음. 다음 번엔 오히려 머릿속을 비워볼까."
그러려면 슬슬, 상대편을 놓아주어야 한다.
우우웅─.
거대한 해머가 번쩍인다.
[3단 차징 후려치기]의 전조.
후려쳐서 트랩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죽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3레벨 갑바인데?'
그는 이젠 몸까지 빛내며 씨익 웃었다.
"으그극!! 으아아악!!! 기, 기권! 청 팀 부장 기권!!"
"아. 왜요. 지건 딱 대!!"
"그, 그게 어떻게 지건이야! 이 미친놈아!!"
"몰라요. 아무튼 지건입니다. 지건!"
"하, 하지마!! 으아아아!"'
아쉬운대로 손맛이라도 느끼려할 때.
[SYSTEM]기권하셨습니다.
[SYSTEM]매치 종료!
[SYSTEM]백 팀 선봉 승리!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아...."
기권을 외치고 파스스 사라져버린 상대.
"...칫."
-"...저게 진짜 광기다."
-"이잉...개무서웡...."
-"상대편으로 만나면...?"
-"...이 판 끝나고 안 돌린다. 절대."
수근대는 팀원들.
크로스보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흐흐 웃으며 아군 대기실을 힐끗 바라봤을 뿐.
-"헙!"
-"님들 쉬이이잇!!"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괜찮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한 명. 남았다."
대장급이니 기대해봐도 좋겠지?
아마 대장전에서 만나는 유저들의 수준이, 일전에 만났던 그레이드인지 하는 녀석보다 높을 터였다.
[SYSTEM]매치포인트
[SYSTEM]백 팀 선봉 vs 청 팀 대장
크로스보우는 웃으며 다음 대결을 기다렸다.
***
-저거 무냐고ㅋㅋㅋㅋㅋ
-???: 감전사!!
-피곤해서 쉰다더니 크보쉑 피지컬 그대로누
-크보 휴방 이유 뭐 하나 터뜨릴려고 쉬는 듯?
-짬탐누나 멘탈요?
-ㄹㅇㅋㅋ
"스테이~!...1대1 대전 돌린 나 스테이...!"
이수아는 특유의 투로 말했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는 베테랑의 모습.
"님들. 저 이러다 머리 또 빠질 거 같아요."
-아ㅋㅋ빠진 머리도 반영하는 갓겜 올오버
-흉작흉작
-쫄보인 나
그녀는 망치손잡이를 꽉 쥐었다. 상대는 엄청난 피지컬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자, 크로스보우.
한 때 1대1 모드를 즐겨하던 사람으로서, 그와의 대결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녀는 맞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상대방 캐릭터를 카운터치는 픽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는다.
"드디어 호적수를 만난 나...원조 망치여자 갑니다아?"
-호적수는 만났지만 애인은 못 만났단다
-ㅋㅋㅋㅋㅋ
-진정한 사나이(35세 미혼 여성)
-원조력 200%
-망치 여자 대 망치 남자ㄷㄷ
-??? : 망남충 주거ㅠ
-[삭제된 채팅입니다]
[SYSTEM]설정된 거리에 동의하시겠습니까? : 근거리
[SYSTEM]양 팀 모두 동의하셨습니다.
[SYSTEM]대전이 시작됩니다. 레디..3...2...1.
평소와 달리 묘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거대한 망치를 어깨에 걸친 크로스보우가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SYSTEM]FIGHT!
-둘이 1대1 닉 비슷한거봐ㅋㅋ
-똥의호흡 대 똥빚는공장
-동캐전까지ㄷㄷ
-도플갱어는 서로 만나면 죽는다
-???: 당신이 죽어라. 짬탐
"들어가욧!"
그녀는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는 듯, 대전장소로 향했다.
반파되어 그 속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롯디 타워가, 때아닌 긴장감으로 인해 적막이 흘렀다.
***
"1대1 마스터급 여성 유저?"
크로스보우는 상대팀의 대장을 살폈다. 현재 플래티넘 계급인 자신이 선봉인 상황. 그걸로 미뤄볼 때 상대는 아주 높은 확률로 마스터 계급 이상.
과거 PC게임 시절과는 다르게, 지금은 수많은 고계급 여성게이머들이 즐비했지만...1대1은 전혀 선호되지 않는 모드.
드문 일이다.
"거기에 같은 캐릭터...."
레이드 모드에서나 쓰이는, 괴물 헌터들의 해머 베이스 캐릭터까지.
연습하기에 딱일 거 같다는 생각에 그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감전사!! 으그극!!"
아까 전에 크로스보우도 사용했던 트랩. 그걸 집어던지며 이상한 말투로 입딜을 시전하는 상대편.
"...?"
"망치망치!! 망치여자!!"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오는 공격을 맞받아쳐낸다.
"두유노우킴취? 디스이즈 킴취!!"
"...."
"야. 크로스보우. 망치 넣을게~. 아하하하하!!"
...제정신이 아니군.
크로스보우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해머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또다시 같이 해머를 휘둘러 상쇄시키는 상대편. 연습하기에 딱 좋은 준수한 실력인데....
"흐어어!! 움직임이 전부다!"
당최 입을 쉬지 않는다.
그는 강하게 땅을 박차며 거리를 벌렸다.
"어어~딜도망가!"
"이 집 재밌네."
당연하다는 듯 왼손의 작은 투척기로 견제해오는 모습에, 크로스보우는 씨익 웃었다,
옛날 조이스틱으로 격투게임을 즐기던 때가 떠오른 탓.
"그런 거라면 저도 지지 않습니다."
시야에 색이 빠지는 현상같은건 나중에 연습하면 되겠지.
어차피 시청자들은 없다.
보고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이번 판에 매칭된 그를 제외한 9명의 유저들.
"어우. 무서워라."
"...어?"
"해머 차징. 우우웅. 들어오세요."
그리고 해머 차징 소리를 입으로 따라하며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자, 오히려 경직되는 상대.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둘은 서로 할 말만 해대가며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망치망치! 망치여자! "
"안맞죠? 어림도 없죠?"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자강두천
-ㅋㅋㅋㅋㅋㅋㅋ
-여초발 팬클럽 와르릌ㅋㅋ
-오히려 좋은데용? 귀엽다ㅠㅠ
-(덜렁)
그렇게 스트리머 네임, 짬먹을타임.
이수아는 지금까지 없던 기록을 세웠다.
"누님. 조심해요!! 위험해-!"
"으갸갸갹!! 자, 잠깐만요. 저 스트...!"
"빠앙! 똥탄 슬링어 빠앙!"
"우욱!"
그 크로스보우를 상대로, 무려 5분 동안이나 버텨낸 것이었다.
[SYSTEM]백 팀 승리!
[SYSTEM]백 팀 선봉 올킬 성공!
[승리하셨습니다.]
-아ㅋㅋㅋㅋ짬탐인거 몰라도 누난거는 바로 알아보는거봐
-ㅋㅋㅋㅋ입딜 무냐고ㅋㅋㅋㅋ
-ㅋㅋ광대모드onㅋㅋ
-아ㅋㅋ이런 모습 평소 방송에서도 좀 보여주지
-ㄹㅇㅋㅋ짬탐 덕에 알아간다
-합 방 성 공
휴.
"질 뻔 했네요."
크로스보우는 상쾌하게 땀을 닦았다.
여전히, 상대가 스트리머일거라곤 추호도 생각지 않는 모습으로.
< 41화-막간의 합방 > 끝
ⓒ Rea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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