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최고의 게이머 >
"역시 졌네."
블래드는 멍하니 캡슐 밖에서 생각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생각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외롭다."
그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
크로스보우가 방송을 마친 건 그 날 늦은 새벽 시간이었다.
['TK 크로스보우ㅋㅋ'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근데 집에안가요?ㅋㅋ루삥뽕
-ㅋㅋㅋ민폐손님
-나 오늘 집에 안 가!!!
-??? : 이순신은 집에 안가나요?
"아."
새로운 감각이 생각보다 더 즐거웠던 탓이다.
크로스보우는 새로운 모드, [생존 모드]를 한참 즐기다가 떠오른 후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오늘 휴방이었지 참...."
-휴방인데 풀방을 하는 스트리머가 있다?
-아ㅋㅋ이건 개꿀이지
-생존모드 이렇게 하는 사람 처음 봄
-ㄹㅇㅋㅋ오늘 뱅송 알찼다
"방종하겠습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크바
-크바
그렇게 캡슐에서 번쩍 눈을 뜬 크로스보우.
...낯선 천장이다.
"아. 방송 끝내셨군요."
"이거 너무 오래한 거 아닌가 죄송하네요."
"괜찮습니다. 저도 캡슐 새로 쓸 때마다 그러니까요."
크로스보우는 몸을 일으키며 상황을 살폈다.
환하게 밝았던 연습실의 불이 대부분 꺼져있었다.
마치 영업 외 시간.
그리고 넓은 연습실에 남아있는 건 세 명.
처음 보는 얼굴이 하나 있다.
"아. 이쪽은 저희 게임단의 자랑이자 한국의 자랑...블래드 선수입니다."
송정훈 감독은 퀭해보이는 눈으로 말했다.
...블래드?
크로스보우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온 국민에게 인정받는 프로게이머.
게임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을 가장 많이 희석시켰다 평가받는 개인.
"...안녕하세요. 크로스보우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러나 하도 커뮤니티에서 신격화시키는 선수다보니 뭔가 특별하리라 기대했던걸까.
겉보기엔 평범한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였다.
크로스보우는 그와 악수를 나누며 눈을 살폈다. 뚜렷한 눈동자. 힐끗 엿보이는 승부욕.
과연. 그래도 최고 소리를 듣는 인간이란거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어.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고...."
그 때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던 송다혜가 문득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죠?"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다혜가 저희 팀 경기 분석을 많이 해주거든요."
대답은 송정훈 감독에게서 나왔다.
대충 테이블을 살펴보니, 태블릿PC로 뭔가를 보고 있었던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아직도 오늘 패배에 대한 뚜렷한 이유가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오늘 경기요?"
"...예."
역시 졌군.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니. 무슨 개꿀잼몰카 같은건가?
"그렇군요. 그럴 수 있죠."
"아뇨. 그럴 수 없어요!"
송다혜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그러더니 책상에 머리를 마구 쿵쿵 찧었다.
그 모습에 크로스보우는 오 하고 입을 벌렸다.
"사도세자인줄 알았네요."
"...푸흡. 아. 미안."
"허엉...크로스보우님까지...."
그렇게 세 명이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저...크로스보우님."
잠자코 같이 피식대기만 하던 블래드가 입을 열었다.
"네."
"캡슐 들어가시기 전에 저희 팀이 질 거라고 예측하셨다고 들었는데...진짜인가요?"
"음."
크로스보우는 그를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묻는건지 조금 헷갈렸기 때문.
"예측은 아니고 그냥 그래보이더라구요."
"...혹시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진 원인."
"앗, 아아...결국 질문해버렸어...."
절망하는 송다혜의 모습.
크로스보우는 송 감독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역시 심란한 표정이다.
"...."
이건 생각 외다.
일부러 진 게 아니었나보군.
"딱히 큰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
감독, 분석관, 그리고 최고의 선수.
크로스보우는 이 셋한테 일개 스트리머가 조언하는게 맞나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몇 마디 첨언하는 거 정도는 상관없겠지.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태블릿을 뺏어든다.
그러자 움찔, 몸을 떠는 송다혜.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원론적인 문제는 블래드만 보는 각을 팀원들은 못 보고 있다는겁니다."
"""...!"""
그는 능숙하게 재생바를 슥슥 만져 한타 장면을 틀었다.
"개인화면으로 보건데 블래드 선수가 오더하는 스타일은 아닌거 같더라구요."
"...맞아요."
"자. 여기 보세요. 이 장면."
크로스보우는 선수 개개인의 시야를 5분할로 틀었다.
"...어? 이, 이게?"
그제서야 뭔가를 발견한 듯한 송다혜와 의외의 표정을 짓는 블래드.
"음...대충 말해보자면 이 장면은 그런겁니다. 한타(양 팀이 모여서 여는 큰 싸움)에 주파수가 있다고 친다면...안된다-안된다-된다!-안된다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는 블래드의 시야를 확대했다.
그 시점은, 마치 크로스보우의 것과 비슷했다.
시청자들이 우스갯소리로 모 만화의 예토전생 캐릭터냐고 물었던 것과 비슷한 시야 전환.
보는 사람이 어지러울 정도로 확확 바뀌는 모습이다.
"여기서 블래드 선수는 이미 계산하고 있었을겁니다. 상대방의 스킬 쿨타임과 뭐 기타 등등을요."
"...그, 렇습니다."
블래드의 대답.
크로스보우는 훽훽 시점을 뒤바꿔 다른 선수들의 시야를 틀었다.
"그러면 다른 선수들의 시점도 한 번 보죠. 오. 다행히 카운터 선수는 블래드 선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같이 각을 보고 있군요."
"...."
그는 힐끗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3인방을 쳐다봤다.
블래드를 제외한 두 명은,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입을 헤 벌린 채 얼빠진 표정.
그에 반해 블래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다른 세 선수는 오브젝트(게임에 이로운 효과를 주는 몬스터나 구조물)의 체력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그건...."
그 때 반박하려는 송다혜.
크로스보우는 뻔한 말이 돌아올 걸 느끼고 말을 끊었다.
"압니다. 물론 TK가 초반에 강세를 가져가는 조합인만큼 경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겠죠. 어떤 선택이 옳냐. 글쎄요. 그건 저도 미래에서 온 게 아니기 때문에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블래드의 선택이 옳다. 올오버는 PC게임이 아니니까.
그러나 크로스보우는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는 있지만...그거까지 설명하는 건 도저히 역부족이었기 때문.
"...."
"꼭 이렇게 큰 판단이 아니더라도, 팀원끼리의 의사가 갈리는 모습이 경기 내내 보였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실력이 출중해 거의 티는 나지 않았을테지만요."
대충 이 정도만 말하면 되겠지.
"그래서 질거라 생각했던겁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크로스보우는 분석을 멈췄다.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영상을 돌려보기 시작하는 송다혜와 침울한 표정의 송정훈 감독.
"...."
침묵.
크로스보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멍하니 묻는 송정훈 감독.
"...크보님은 대체...?"
"아아...취미로 게임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루에 게임을 100판쯤 하면 되나요?"
...진짜 그 쯤 한 거 같은데.
크로스보우는 더 원 그라운드 시절 십 수만 시간을 넘겼던 플레이타임을 환산해보려다 그만뒀다.
블래드가 어딘가 기뻐보이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모른 채.
***
[예지]
〈어떻게 됐어?〉
[핥짝(채은아)]
〈혹시 제가 알아야할 게 있을까요?〉
크로스보우는 도착해있는 두 개의 메세지에 '계약금 개꿀' 이라는 메세지로 답장하곤 좌석에 기댔다.
그나저나 채은아는 정상인과 변태를 오고가는군. 그런 생각을 대충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량.
TK팀의 운전을 도맡는 사람이 퇴근해버렸던 터라, 송정훈 감독이 직접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송다혜는 연습실에 남았다.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그런가요?"
"과거에 프로팀 전력분석관이라도 하셨던건가요? 설마 다혜도 몰랐던...."
"글쎄요. 아마 동생분도 금방 알아채셨을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어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다.
가상현실게임, 올오버가 상용화되고 나서 더욱 그렇다.
'그나저나....'
크로스보우는 아까 봤던 게임을 슬쩍 떠올렸다.
'확실히 힘을 빼고 한 건 맞는거 같던데....'
블래드만 보는 각이 문제라면, 본인만 참으면 끝날 일이었을텐데...블래드는 굳이 싸움을 걸었다.
마치 팀원이 자기를 따라오는지 확인하려는 듯.
'...뭐. 스크림이었으니까 그렇겠지.'
크로스보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프로게이머를 할 것도 아니고,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나중에 한 번 붙게 되는 날이 오겠지.
"흐아암...아. 다 왔네요. 저기 횡단보도."
"...진짜 다혜랑 같은 곳에 사시는군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혹시 동거...?"
절레절레.
"절대 아닙니다."
"저런...그건 아쉽네요...."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지만 못 들은 척 해야겠다.
크로스보우는 차에서 내렸다.
...이제 다시 방송인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그렇게 며칠인가가 더 흘렀다.
크로스보우는 이응과 송정훈 감독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접촉해오는 다른 프로팀들을 무시한 채 예정했던대로 '캐릭터 강화권'을 냅다 방송에서 공개해버렸다.
-와;;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아니ㅋㅋㅋㅋㅋ결국 똥이잖아
-똥을 요리해서 똥으로 만드는 똥믈리에ㅋㅋ
-3똥일체ㄷㄷ
-???: 조보아 씨! 이거 좀 먹어봐유
-조보아도 쌍욕할듯
-아ㅋㅋㅋ
"똥이라뇨. 이건 엄청난 버프입니다. 여러분. 누가 더 원 그라운드는 어떻게 강캐가 되었는가 하면 제 이름을 말해주세요."
-더어강ㅋㅋ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아ㅋㅋ걍 균방전이나 돌리십쇼 형님
-요샌 생존 모드가 꿀잼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설정한 더 원 그라운드 강화.
한동안 이슈가 된 그 사건은, 더원그 캐릭터에 '이등병'이라는 별명이 붙는 것으로 끝났다.
[어느덧 일주일 뒤로 다가온 네이션스컵]
[스타킹을 쓴 크로스보우 짤방]
-이번엔 우승한다
└ㅋㅋㅋ설레발ㅆㅅㅌㅊ
└아 너 때문에 우승 못하게 생겼잖아ㅡㅡ
└클리셰on
[네이션스컵 가면 크보 얼굴 나오냐?]
-얼마나 잘생겼길래 사당역npc가 뭔가 사정이 있나봐 같은 소리 하는건지 좀 봐야겠다ㅡㅡ내가 공략 따라해보니까 외노자인줄 알던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너 뭔가 내친구랑 닮았을듯?
└그 친구 잘생김?
└ㄴㄴ 외노자임
└ㅋㅋㅋㅋ아ㅋㅋㅋㅋㅋ
[크로스보우 똥꼬 주름 다 펴졌겠다 미친놈들아]
-아직 공식 경기도 안해본 아마추어한테 기대 좀 하지마라 좀; 내가 크보면 긴장해서 제 실력 못낼듯
└ㅋㅋ악성 크까인줄 알았는데 츤데레였누?
└크보 동고는 나만 빨 수 있어!!!!
└우욱씹;
└나도 빨기 가능? 제발;
└얜 매니저 달고도 똑같네ㅋㅋ개무섭누
[보블 듀오 가즈아!!!]
-준비됐어 블?
└물론이지 보
└역겨움이 언빌리'보블'이네
└얘땜추ㅋㅋ
그렇게 시간은 쭉쭉 흘러 마침내 네이션스 컵 일주일 전.
신예지는 침대에 누워 크로스보우를 발로 쿡쿡 찔렀다.
"어디로 간다고?"
"일단 뉴욕. 몇 번 말하냐."
"오올. 뉴~~욕~~"
"...왜 이래?"
그리고 채은아.
[님 저 S석 티켓 구함]
[어...음...오.]
[하아...싸인 딱 대. 이번엔 저번에 못 받았던 싸인 해주실거죠?]
[저리 가세요. 제발.]
옥상에서 다시 만난 옆집뇨끼네, 송다혜.
"TK 분석관 느낌으로다가 따라갈 거 같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뿅맛사탕 자매까지.
"언니랑 저도 가게 됐어요!"
"...."
"오. 선수로 참가하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그냥 다 나은 기념으로 놀러! 3년 동안 어디 놀러가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즐거운 여행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계획도 다 짜놨다구요. 언니. 근데 왜 크보님 앞에만 서면 벙어리가 돼?"
"아, 아니...그런거 아니야."
[이응님(지호민)]
〈이 날이 오는군요. 해설진으로서 크보님의 플레이 기대가 됩니다.〉
[나]
〈하하. 감사합니다. 갈 때 뵙겠습니다.〉
[TK송정훈감독]
〈카운터가 크로스보우크로스보우 노래를 불러대네요. 왜 말 안해주고 갔냐고....블래드도 내심 크보님 보고 싶어하는 거 같구요.〉
[나]
〈ㅋㅋ가서 뵙겠습니다.〉
크로스보우는 그 날도 배달음식을 시켰다.
"으악. 또 김치볶음밥이야?"
"미리 많이 먹어둬."
"으으으."
"두유노우 킴취?"
네이션스 컵 시작까지 일주일.
비행기 탑승까진 2일.
내일은 본격적으로 짐을 싸야하니, 한국에서 하는 방송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크로스보우는 웃으며 방송을 켰다.
[스트리머 '크로스보우'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 47화-최고의 게이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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