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등장 >
현장의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던 크로스보우의 실물.
그러나 그의 모습은 생각 외로 크게 노출되진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스트리머들이 일반인으로 오해하면서 최대한 송출을 막고, '다시보기'까지 삭제한 덕이었다.
그저 멀리서 걸어오는 영상클립.
그의 얼굴은 그 정도 수준으로만 공개되는 걸로 끝을 맺었다.
[그 남자 등장씬]
[영상클립]
└와...뭔 모델이누
└코트 걸친게 ㄹㅇ이네 하...인생 불공평하다
└ㅅㅂ뭔 라노벨 주인공이냐?ㅅㅂㅅㅂㅅㅂ
└아ㅋㅋ트붕이 화난거봐
└근데 구라 안치고 영화 한장면인줄 알았음 걸음걸이가;
└???: 누나 나 이거 코트 누나한테 맞겨도 돼?
"거 빠르기도 해라."
코리아나 항공 비즈니스석.
핸드폰을 끄기 전에 마지막으로 트리키 뷰 전용 커뮤니티를 확인한 크로스보우는 피식 웃곤 허리를 기댔다.
14시간.
오랜 비행이 될 터였다.
그는 지인들에게 지금 탑승했다는 연락을 돌리곤 눈을 감았다.
***
띠잉-.
잠을 깨운 건 비행기 특유의 묘한 알림음이었다.
[손님 여러분. 불안정한 기류로 비행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좌석벨트를....]
"...."
크로스보우는 머리를 짚었다.
알림음 때문에 깼다기보단 기내의 흔들림이 더 큰 이유였던 모양.
비행기에서나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이 아득하게 전달되어 온다.
"아앗...!"
"...?"
그 때, 누군가 옆에서 소리를 냈다.
그쪽을 살피자 마주친 눈을 훽 돌리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
"...깨, 깨셨다...."
"...어쩌다보니요."
그가 기억하기로는 [점령 모드]에서 꽤 높은 랭킹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실력 뿐만 아니라 출중한 외모를 가진 여성인걸로도 꽤 많은 화제가 되어, 엄청난 팬덤을 갖고 있는 걸로도 유명한 스트리머.
적어도 한 때는 그랬다.
"그, 그게...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곤히 주무셔서요!!"
"...저런. 그랬군요."
"네. 네. 그, 그게. 음. 저, 저저는...."
"...알고 있습니다. 단서라 님."
"앗...."
스트리머 네임 '단서라'.
과거, 허이크 사건 때 시청자들이 '단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알고 계셨구나. 아하하,하하...."
"...?"
"...혹시 이거라도 드실래요?"
쉬잇.
크로스보우는 커지는 목소리에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
그러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달달 떨며 뭔가를 슥 내미는 그녀.
잘 부숴지는 걸로 유명한 과자다.
"감사합니다."
...잘 부숴지는 걸 넘어 아주 바스라졌군.
크로스보우는 티내지 않으며 그걸 받았다.
안 그래도 이제 막 정신이 들어 당이 떨어진 느낌이 조금 들던 차였다.
"다, 다른 분들은 아직 다 주무시고 계셔서...옆에 계셔서 쳐다본 거 뿐이에요...!"
"긴 비행이니까요."
와작.
그는 과자를 까먹으며 대꾸했다. 속삭이는 목소리로도 호들갑을 떨 수가 있구나.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방치하며 멍하니 과자를 씹었다.
...정적.
난기류는 이미 통과했는지 기내는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크로스보우는 그녀 쪽을 힐끗 살폈다. 통로를 가운데 끼고 있는 터라 기색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
할 말은 끝인가보군. 크로스보우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래도 각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선수들이 모인다는 네이션스 컵. 신예지가 선수들 사전분석이라도 하면 좋지 않냐며 영상을 저장시켜준 터라, 그거나 확인할 셈이었다.
[각 나라 선수별 주 캐릭터 분석 및 참조영상]
[중국]
[일본]
[미국]
.
.
.
'뭐가 이렇게 많아?'
별 생각없이 파일에 접근한 크로스보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방대한 자료에 감탄했다.
대충 봐도 각 선수당 5개씩은 존재하는 영상과 상세한 설명.
'...시간 많이 들였겠군.'
그는 월급이나 더 올려줄 생각을 하며 영상을 눌렀다.
"...."
그렇게 한참.
크로스보우가 영상을 보며 왜 이렇게 하지? 라며 의문을 떠올리던 때였다.
"...저, 저, 저기...."
문득 단서라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네."
"음...."
말을 자꾸 더듬네.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1열에 4좌석밖에 존재하지 않는 비즈니스석. 상대와의 거리는 복도 하나만큼 떨어져있는데도 느껴지는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사, 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갑자기요?"
"...그, 허이크 사건...."
아하.
크로스보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욕 많이 먹었거든요...."
허이크가 퍼뜨린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잘은 몰랐지만, 그로인해 그녀는 물론이고 한동안 그녀의 팬들도 함께 욕을 먹고 있다는 걸 들었던 기억이 있다.
"고생하셨겠습니다."
"...편해진 게 다 크로스보우님 덕인데...이, 인사 한 번 드리러 가지도 않고...."
"저한테 인사를요? 글쎄요."
"그래도...덕분에 이런 자리도 함께 할 수 있어서...감사합니다...."
꾸벅 머리를 숙이는 단서라.
그 모습에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뭘 바라고 도와드린 것도, 도와드릴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 그런가요...."
듣는 사람마저 정신 없어지는 말투. 이것도 오랜기간 정신적으로 시달린 후유증이겠지.
크로스보우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제안했다.
"네. 정 신경 쓰이시면 나중에 합방이나 한 번 같이 하시죠."
"...!"
그래도 네이션스 컵까지 출전한다는 건, 다시 개인방송계에 발을 들이겠다 결심한 것일 터.
"그, 그래주신다면...감사...압도적 감사...."
"대신 그 날 들어오는 후원금은 다 제껍니다."
"다 가져가 주세요...지, 집 문서라도...아, 참...전세로 옮겼구나...."
"...농담이었습니다."
"아앗...."
묘한 텐션의 사람이다. 크로스보우는 어깨를 으쓱이곤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착륙까지 4시간 전.
곧 있으면 도착이다.
***
선수 대기실은 뭐랄까, 꼭 목욕탕의 탈의실 같았다.
넓은 평상. 그리고 커다란 티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캐스터 배성댑니다. 저희는 지금 제 4회 네이션스 컵 개막식이 열리는 올오버 스타디움에 나와있습니다.]
"오. 이응님이다."
"아. 크크. 대머리 아조씨 공중파에서 보니까 왜 이렇게 웃기지."
"친근하네요."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큰 규모, 본격적인 구조.
설마 선수 입장식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크로스보우는 스트리머들과 함께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이미 옷은 태극기가 가슴에 박혀있는 복장으로 환복한지 오래였다.
"으...긴장돼."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요?"
"클립으로만 박제되던거 전세계적으로 박제되는거죠."
"오우쉣~. 미친거냐구~."
"커물쥐님은 악성 후원 한 3개월은 시달리실듯."
"끔찍한 소리 하지마세요."
"말대꾸 하지마 한번만 해주세요."
"에이. 무슨 소리...."
[네! 아. 정말 많은 것들이 새롭게 시도되는 4회 네이션스 컵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자리를 메워주셨고, 개막식이 시작되려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4회 올오버 개최국인 미국. 뉴욕에서 개막공연을 시작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가수들, 그리고 예능인들이 나와 공연을 시작한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 퀄리티.
가상현실에 대한 인식이 언제 이렇게 바뀌었지? 크로스보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크를 채웠다.
"오...그랑데도 나오네요. 게임은 질병 아니었나?"
"아. 크크. 다 같이 걸리면 아님요."
[각국의 선수들이 입장할 차례입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선수단! '블래드' 이정혁을 필두로 한 40명의 프로게이머들이 입장합니다!]
[아. 블래드 선수. 그렇습니다. 이 선수를 빼놓고 AOS를 논하지말라! 자타공인 최고의 올오버 플레이어! 표정이 밝습니다!]
[AOS 모드에 있어서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이거든요! PC시절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워했던 우리나라 선수들입니다!]
확실히 프로게이머들은 다들 몇 번 출전했던 경험이 있는 탓일까. 스트리머들과는 다르게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
"와. 저 사람이 그 '다이고'인가 걔죠?"
"일본판 블래드라던데? 으. 뭐야. 왜 저래."
"아. 애니메이션의 나라라 그런지 모션이...."
"하는 짓 보고 네다씹 외치고 싶은 적은 처음이네."
"오. 중국 쪽 봐요. 맨 앞이 '중화제일검'인가? 실물 키 왜 저렇게 작아."
"크크. 실물하면 크보님인데."
"인정이죠."
그렇게 각국의 프로게이머 선수단의 입장장면을 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돌연, 뒤에서 지켜만 보던 스태프가 확성기를 들었다.
"──개인방송인 선수단 여러분. 다음 차례에 입장하셔야 합니다. 방송용 드론 다시 한번씩 확인해주세요."
인이어로 다음 식순을 전달받은 모양.
"...저희 차례임. 님들."
"가죠."
"...저 근데 오줌 마려워요."
"전 똥 매려움."
"하아...크로스보우님은 긴장 하나도 안하시네."
"오이오이. 크보쨩...믿고 있는다구!"
그 안내에 각자 개인용 방송 드론을 띄우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방송인들.
초소형 드론들은 경기장의 푸른 조명에 반짝이며 뱅글뱅글 주위를 돌았다.
유효한 화각을 잡으려는 과정.
곧 드론들이 일정한 편대를 이뤄서 각자의 led를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중들의 주목도 일제히 스트리머들을 향해 쏠린다.
"꺄아아아악!!!"
"와아아아아!!!"
찢어질 듯한 함성.
스트리머들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본인 갑자기 존나 떨림."
"아 나 무대공포증 있는데."
"으윽! 심장이야! 청심환 있는 사람?"
"컨실러 있는 사람은 없음? 나 눈동자 좀 가리게."
요란을 떠는 스트리머들에 비해 크보의 반응은 단촐했다.
"....예쁘네요, 드론들."
"크보님도 있잖아요. 주최 측에서 지급해 줘서."
잠시 중얼거린 소리에 대답한 누군가.
"맞네요."
크로스보우는 피식 웃었다.
"아니. 크크. 맞네요라뇨! 빨리 띄우셔요. 선두 가셔야죠!"
그렇다.
개인방송인 선수단의 선두는 크로스보우다.
그는 피식 웃곤 품에서 드론을 하나 꺼내 높이 던졌다.
"...가죠."
그 드론은 곧 무리에 합류한 뒤, 렌즈에 붉은 빛을 발했다.
[스트리머 '크로스보우'님의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
-미쳤네 규모
-와 현실감 지리누ㅋㅋ
-근데 개막식에서도 갠방 틀수있음?
-송출 권한이 아니라 송출 의무였던거임ㅋㅋ
-크...맨 앞이 크보니까 그래도 면이 사네 면이 살어
-선은 안삼?
-아ㅋㅋ...매니저!!!!
크보쨩햝짝. 채은아는 관중석에서 채팅창 관리를 위해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올오버는 마치 티비, 인터넷, 아이튜브나 개인방송 등 모든 매체에 '네이션스 컵'이 나오도록 할 요량인지, 평소보다 오히려 시청자가 줄어든 상황이었지만....
"와아아아아!!!!"
"블래드!! 블래드 잘 생겼다!!!"
"휘이이익!!"
"카운터! 두인아!! 여기 봐줘!!!"
"크로스보우!!! 팬티 머리에 쓰고 싸인받겠다던 사람 여기 있어요!!!"
이런 환경에서 채팅창을 관리하기엔 힘든 일.
거의 뭐 광기의 도가니탕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흐음."
축제 아닌 축제기간.
이럴 때는 조금 선을 넘는 발언도 내버려두는게 좋겠지.
그녀는 대충 채팅창에 조금씩만 자제해달라고 공지를 올려놓고는, 본인도 주변을 따라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도 싸인받을거다! 크로스보우 이 쫄보자식!!! 속옷도 안 입고 받을거야!!"
"...?"
"...."
그 말에 오히려 주변이 조금 조용해진 것 같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
< 49화-등장 > 끝
ⓒ Rea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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