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나, 강림 >
***
끼익─.
끼기긱─.
"···더럽게 안 열리네."
각성구를 꺼내기 위해 열어야 하는 문. 여는 데에 일정 이상의 시간이 걸리도록 해 놓은 게 분명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되기 전까진 열 엄두를 못 내도록.
"···뭐. 그래도."
크로스보우는 각성구를 손에 들었다.
두번째 만져 보는 감촉이다.
"인생 역전이네요."
그는 반짝 눈을 빛냈다.
-······'저 사람'이라는게 저승사람 줄임말이었냐?
-아ㅋㅋ···맞는 말이었네
-??? : 검 안 잡아봤어!
이걸 손에 넣은 이상 사실상의 승패는 결정됐다.
그렇게 각성구를 희미한 불빛에 비춰 보는 크로스보우.
그 감각에 문득 정신을 차린 일부 시청자들.
'1인칭으로 보기'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다.
-뭐였지 방금···?
-이거 나만 느낌 이상했던거 아니지?
-나도 그런데; 빙의상태인 트수놈들 다 나와봐
-어···빙의 상탠데 멍 때리는중···난생 처음 느껴보는 느낌···.
-아몰랑 존나···존나···당장 올오버 하러가고싶다
-아니 방금 대체 뭐였냐고;
-이게 그 감각
-???뭔데 이래 씹덕들아
전신에 활력감이 달린다.
지금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절대.
***
[크로스보우 선수. 그야말로 괴물. 괴물입니다···!]
그 이후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경기구역이 닫히는 영역을 따라 달리면서, 크로스보우는 마주치는 모든 적들을 학살했다.
이제는 '각성구'를 통해 스펙마저 상당량 갖춘 상황. 걸리적거리는 변수따윈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와중에, 대한민국의 본대 역시 대단합니다! 중화제일검이 집중포격을 당해 사망하는 모습!]
[조합의 허점을 크로스보우 선수가 막아 낸 이상, 이제 무서울 게 없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장판파의 장비! 크로스보우!]
검격의 연속. 중앙 캠프에서만 해낸 8킬 이외에도 이미 3킬을 더 올린 상황.
"···질 순 없지."
그 모습을 킬로그로나마 확인한 블래드는 밝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맵의 양 끝. 블래드와 크로스보우가 주역이 되어 상대를 정리해 나갑니다!]
[날 막아 봐! 이렇게 외치는 듯한 플레이! 블래드, 그리고 크로스보우! 전율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승리의 주역이 될 두 사람이, 마침내!! 조우합니다!!]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고. 줴엔장."
"···형. 갑자기 말투가 이상한데요?"
"그런가?"
"말수도 좀 느시고···."
"편하니까 그렇지. 아니다, 말투는 옮았나 봐."
"네?"
"시청자들이 자꾸 번역해 줘서."
두 눈을 깜빡이는 블래드에게 크보는 오만상을 찌푸려 얼굴을 묘사했다.
그러자 블래드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누구를 흉내 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푸흡. 누군가 했네요. 그래서···제 하위호환 버전은 어땠어요?"
블래드는 웃으며 농담을 걸었다. '일본판 블래드'라는 소리를 듣던 다이고를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전장의 한가운데. 크로스보우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턱을 쓰다듬었다.
한 손에 든 검으로 블래드를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모두 차단하는 와중이었다.
"영 불량품이던데. 짭이야. 짭. 뉴밸런스에 그 N 거꾸로 돼 있는 그런거."
"푸합!···근데 형 방송 송출되고 있는데 괜찮아요?"
"···오."
-오 ㅇㅈㄹㅋㅋㅋ
-ㅋㅋㅋㅋㅋㅋ다이고 중국산블래드행ㅋㅋㅋ
-띠용? 방사능블래드였던거임ㅋㅋ
-뭔가 더 강해야할거같은데 뭐냐ㅋㅋ
[SYSTEM]'KR_Crossbow(전설의리그)'님의 공격으로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SYSTEM]'KR_Blad(전설의리그)'님의 공격으로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SYSTEM]'KR_Crossbow(전설의리그)'님의 공격으로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SYSTEM]'KR_Blad(전설의리그)'님의 공격으로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오로지 크로스보우와 블래드의 이름만으로 메워지는 킬로그.
그 킬로그의 이름 옆에 달린 태극기가,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있을 모든 사람의 눈에 깊게 들어와 박혔다.
관중석.
"언니! 언니!! 와!!! 와!!!!"
"샌즈!"
"크보님 하는거 봤냐고!! 무야!!"
그리고 채은아.
"···하아아. 흐으. 크보님. 개섹시···"
한국에 남은 신예지나 TK의 전력분석관까지.
"···쪼끔 보고 싶네."
"···전술적 허점을 혼자 커버···승패를 좌우하는 개인···진짜 뭐야···분석 같은 건 그만둬야 하나···."
그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순간, 해설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승리!!! 대한민국! 2승을 따냅니다!!!]
[2패를 거듭한 후 따낸 2승! 꼴찌에서 이젠 모드 1위를 앞두게 됩니다!!!]
***
그리고 5라운드 시작 전.
"하하. 하하···요전 라운드에는 죄송했습니다. 이번엔 크로스보우님 자신 있는 픽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소망. 아니, 대망이었나?
아무튼 그런 이름이었던 프로선수의 말.
···아까완 태도가 다르다.
지난 라운드 때는 분명 그냥 시키는데로 하라는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아무렴 어떠랴. 크로스보우는 어깨를 으쓱이곤 생각했다.
"흐음."
비록 도검으로만 행하는 전투의 묘미를 깨닫긴 했지만···아직까지 총기를 다루는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물론 남들이 들었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생각. 그럼에도 숙련도가 아직 부족한 것은 진실이다.
"그럼 더 원 그라운드 하겠습니다."
이젠 승리를 앞에 둔 매치포인트. 5라운드.
모드의 최종결전이다.
여기서 이겨야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1등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킬 총합이니, 최종 생존 수가 어쩌니 따위를 따져서 얻은 1등은 인터넷 상에서 이리저리 물어뜯고 즐길 싸움거리가 돌변하기에 딱일 터였다.
"하···하하. 음. 더원그요."
"네."
"그건 좀···아니, 알겠습니다. 혹시 감독님들에게 확인받아도 될까요?"
"얼마든지 그러시죠."
그건 좀 아니지 않냐는 듯한 표정. 그러나 3,4라운드 간에 보여준 게 있으니 트집 잡지는 못하는 듯한 느낌이다.
감독 타령을 하는 것도 아마 은근히 가서 어필하듯 일러바치려는 거겠지.
오더를 맡은 대망은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흐음."
익숙한 타입의 인간이다.
물론 익숙해도 밉상이지만.
크로스보우는 픽 헛웃음을 지었다.
문득 1시간 전, 지난 라운드를 마치자마자 체면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왔던 감독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제발 팀 소속의 프로가 되어달라는 요청들.
"···욕 좀 먹겠네. 저 사람."
안달복달 못하며 제안을 건네놨더니, 웬 선수 하나가 초를 쳐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좋은 얘기가 오갈 리 없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표정하고 말투하고 뭐냐 쟤
-지건 딱 대 아ㅋㅋ
-무 엄 하 도 다
-ㅋㅋㅋ클립딱대^^ㅣ발
-어디 크갓님 앞에서
솔직히, 일상에서도 충분히 있을 법한 수준의 대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동을 걸려는 시청자들의 모습.
"···편안하네요."
그는 그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현재 시청자 수 : 10,789명]
전략 노출이나 방플 따위를 방지하기 위해 다른 방송으로 옮겨가는 것을 제한해둔 것은 물론, 내용 유출 시 법적대응까지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트리키 뷰.
그런 상황에서, 지금 모여 있는 만 명은 정말 크로스보우를 아끼는 골수 시청자들이었다.
-뭐가 편안해? 너 호구야!!!!
-아ㅋㅋ우리가 지켜줄게 크보쨩!!
-후욱..후욱···.
-악질만 모아놨네 ㅋㅋ루크보쿤
-?? '크보발가락빨고싶다'님?
-아ㅋㅋ도망가~~
"···."
물론, 저런 건 조금 어떤가 싶었지만.
***
"···오더 선수를 바꾸죠."
"네. 그래야 할 거 같네요."
"허. 참. 실력으로 말하는 프로세계 아니었나? 보는 눈도 없어서야···."
"정치형 게이머라도 되고 싶은가 보죠. 1라운드 진 이유가 더 명확해졌네요."
감독들의 싸늘한 논의. 크로스보우가 더 원 그라운드를 픽하겠다고 했다며 들어와 일러바치듯 말한 선수에 대한 말들이었다.
"···너무 그러지들 말지. 내가 잘 타이를 테니 한 번만 넘어가자고."
그리고 그런 감독들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감독이 한 명.
블래드의 참전을 처음 주장한 이. 대망 선수의 소속팀 감독이었다.
"""···."""
"지금 와서 오더를 바꿨다간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거 알잖나. 어차피 그 스트리머랑 블래드도 있으니 다음 판도 문제없을 거 아닌가."
"···허이구. 짐승도 은혜를 아는데. 좀 많이 그렇네요."
"···미안하네. 기분 풀고 한 번만 넘어가지."
그러자 한숨을 푹푹 내쉬던 송정훈 감독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딱 이번 한 번만입니다."
"고맙구만. 그럼 회의는 여기서···."
"아뇨."
송 감독은 두 눈을 번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말해 두는데, 한 번만 더 대망 선수에게서 결격사유로 판단되는 행동이나 판단미스가 나오면 그땐 조 감독님의 입지까지 떨어진다는 거, 확실히 생각하십쇼."
"···그러지."
"···회의 마칩시다."
***
결론부터 말하면, 잘못된 결정이었다.
분명 오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선배 감독의 체면을 지켜 준다고 유지시킨 오더 선수. '대망'.
그의 오더가 이번에도 뼈아픈 결과를 낳은 것이다.
5라운드의 무대는 거대한 사막맵.
잘못된 오더로 인해 모든 선수들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1라운드에 이어, 똑같은 오더미스.
그러나 그때보다 상황은 더 심각했다.
[SYSTEM]'KR_Blad(전설의리그)'님이 ···님의 공격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남은 팀원 수 : 0명]
모드 교차권까지 써서 강제로 참여시킨 블래드마저, 다대일의 상황에서 결국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었다.
블래드의 마지막 분전으로 그래도 인원수는 많이 줄었지만···최종 생존자 수는 한국, 중국, 일본이 각각 1 : 7 : 11의 상황.
마지막 남은 건 그 어떤 프로선수도 아닌, 단독 행동을 하라는 오더 때문에 조금 멀리 떨어져있던 크로스보우.
"···에라이."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총을 들었다.
카앙─!!
스패츠나츠 헬멧의 가리개를 쎄게 올려쳐 열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양 팀은 모두 유일하게 남은 자신을 없애려 할 터.
탐지스킬을 뿌리면서 다가오면 위치가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다면 어쩐다.
"···뭘 어째."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들곤 사납게 웃었다.
끝의 끝까지 어뷰징 티를 조금씩 내는 양국.
현재의 되도 않는 오더, 그리고 과거 방송할 때 저격이나 트롤, 어뷰징 등에 당했던 기억들.
그리고 우승후보라는 소리를 듣는 주제에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팀원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트리거가 되어, 조금씩 짜증이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됐어. 다 죽여 주마."
우선은 약체인 일본 쪽부터 정리한다.
찰──칵! 찰칵!!
[SYSTEM]당신의 M24를 사용한 헤드샷으로 'JP_DAIGO(마지막 환상)'님이 사망하였습니다.(1킬)
마치 한 번 쏜 것처럼 들리는 연속 저격. 정확하게 눈을 노린 사격.
이전 판에 이어 순살당하는 다이고.
"···한 명 다운."
적중하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카─앙!!
올렸던 바이저를 닫아 버리며 또다시 시야를 반전시킨다.
"···17명 생존."
< 57화-나, 강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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