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투기장의 신성 >
문득, 시야에 알림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발신자]
<오늘 접속했나? 들어와 있다면 안내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혹시 미안한 김에 대회에 참여해 보지 않겠어?>
“···왔군.”
채은아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져 결국 자리를 옮긴 크로스보우.
지연되던 경기의 순서가 가장 마지막으로 밀리는 것까지 확인하고 온 장소, 가상 공간 내에 구현된 호텔.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지금 막 들어왔다 씨발 이 좋은데를 이제 알다니>
[알 수 없는 발신자]
[나]
<오? 나야 좋지 그래도 되나?>
[알 수 없는 발신자]
<얼마든지. 아예 선수로 활동해도 좋다>
“호오.”
크로스보우는 턱을 쓰다듬었다.
슬슬 기절시킨 녀석이 직접 내세운 대타라고 참가권을 내밀어야 하던 차에, 기다리고 있던 입질이 온 것.
대충 이렇게 되길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은 상황이 되었다.
“왔음?”
“네. 선수로 참가해 줬으면 한다는군요.”
“씹상타취.”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주목은 안 끄는 게 오히려 좋았을 부분도···.”
“고거슨 인정이구연.”
크로스보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딱딱하게 굳은 채은아가 아까 전부터, 이상한 말투로 말해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
대체 왜 긴장하고 있는 건진 알 수 없다. 그는 한 번 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냥 평범한 고급호텔이다. 크로스보우의 감각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한때 그를 따라 랭킹 2위쯤이나 찍었던 채은아이니만큼 그 사실을 대충이나마 느끼고 있을 터.
“우선 움직이어야 할 때입니다. 은아 씨. 일어나세요.”
“조, 조금만요.”
“나오시죠. 자자. 잠은 나중에 자도 충분합니다.”
“으으···으으으···.”
질질 끌려오는 채은아를 매달고, 그는 호텔을 나섰다.
로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다시 페이스를 되찾은 은아가 입을 열었다.
“···얼굴. 가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군요.”
일단은 선글라스를 낀 상태인 크로스보우.
출전할 때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편이 좋겠지. 아까 쓰던 광대가면이면 될까.
···아니. 그럴 순 없다.
이미 스캐빈저 그라운드에서 한 번 사용한 걸 다시 사용하는 건 위험한 행위다.
누군가 알아보고, 그게 크리스피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영 좋지 못한 일이 되고 만다.
“흐음···.”
띵-.
[로비층 입니다.]
“퇴실이신가요?”
“네.”
“저희 호텔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셨습니까?”
“···.”
어차피 가상공간. 굳이 카운터에 직원을 둘 필요는 없었을 텐데.
크로스보우는 직원의 질문에 은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헤실헤실 풀려 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본래의 냉막한 인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
그는 그 표정에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개선을 위해 혹 어느 부분이 미흡하였는지···.”
“그나저나 이거 안 쓰시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며 뭔가를 가리킨 크로스보우.
“아.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버리실 거면 가져가도 될까요.”
“예? 이걸 말씀이신가요?”
어리둥절해하는 직원.
그가 가리킨 것의 정체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모습.
그러나 크로스보우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 빵집도 있나 봐요?”
“···예. 호텔 지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하.”
종이로 된 빵 봉투.
그가 말한 ‘이거’의 정체였다.
***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기를 15분이나 지연시킨 이 대전!!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고 하는데요!]
[화제의 베테랑 제이. 그에 대항하는 연전연승의 신인! 니키!]
[제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접속이 불가해서 대타가 출전하게 되었는데요! 그 이름···.]
선수 대기실.
크로스보우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방송에서 취하는 스탠스에 대한 생각이었다.
‘···역시 실제 방송이랑은 뭔가 달라야 하겠는데.’
처음에는 그저 철저히 준비하고, 기가 막히게 폭로하여 아이튜브 조회수나 쏠쏠히 뽑아 보려는 심산이었던 크로스보우.
그러나 지난 3일간 준비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로 이곳, 투기장을 단순한 불법도박장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거대해.’
좁다면 좁은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생각보다 더 다양하다.
단순히 통각제한을 해제한 싸움을 구경하는 걸 넘어, 이곳에서 경기 관람을 즐긴 관중들이 쉴 수 있도록 숙박을 제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흥에 음주. 버젓이 담배 비슷한 걸 파는 곳까지 존재했다.
이 모든 걸, 의도적으로 연결하여 마치 현실처럼 배치해 두었다. 시스템을 조작해 이동할 수 있도록 해도 전혀 상관 없었을 텐데, 굳이 엘리베이터나 로비 따위를 만든 것만 봐도 그랬다.
유저의 과몰입을 방지하기 위해 시스템 메시지나 오픈 월드를 제공하지 않는 올오버의 방침과는 정반대의 운영.
‘···과연 가상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은 단순히 게임인가. 아니면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동급으로 다뤄야 하는가.’
크로스보우는 케케묵은 논란을 떠올렸다.
아직 제대로 된 규제 방안도 없는 공간, 가상현실.
마치, 예전의 코인판을 보는 듯하다.
판이 다 커지고 나서야 정부의 규제가 들어갔던 그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현황.
심지어 이번엔 그때처럼 규제가 생겨나지도 않았다.
거대 기업으로 발돋움하여 외화를 착실히 벌어주는 올오버의 제작사 - 레드홀에 굳이 제동을 걸 이유가 없다는 거겠지.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이곳의 서버가 더 증설된다면···그땐 정말 거대하고 음습한 축이 될 게 분명해.’
손을 쓰기도 힘들어지겠지.
투기장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그걸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기에 크로스보우의 생각도 처음과는 다르게 바뀌었던 것이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선은 정체를 숨기는 게 맞아.’
그는 빵 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중얼거렸다.
눈코입을 대충 뚫어 놓은 조잡한 가면이었다.
‘···.’
역시 연기를 조금 해야겠군.
크로스보우가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일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경기 진행 요원 둘.
그들은 쑥덕대며 크로스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이 맞아? 빵 봉투 쓰고 있는데?”
“예. 보스가 직접 인증했습니다.”
“보스? 크리스피 님?”
“예.”
“···하긴 여기서 굴러먹는 놈들 중에 제정신인 새끼가 없는 게 맞긴 하지.”
진행 요원은 떨떠름하게 빵 봉투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투기장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저 남자는 조금 불길하지만···부하가 상관의 명령에 토를 달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해설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준비하시면 됩니다.”
안내하는 진행 요원.
으쓱.
크로스보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오른손에 들린 검을 어깨에 얹은 채 왼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청 코너!! 제이의 대역. 이 선수가 굉장하다! 그 이름은···!]
[바로───!!!! 브래드맨!! 브래드맨입니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중계되고 있었다.
***
“저놈은 뭐야? 브래드맨? 빵이나 사 와! 씹새야!”
“솔직히 이건 배팅 다시 하게 해 줘야지! 정배가 미친 역배가 됐는데!”
[대치하는 두 사람! 베팅한 분들은 걱정 마시길! 자자. 이미 배팅한 금액만큼! 바로 재배팅할 수 있도록 돌려 드립니다!]
관중들의 시야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브래드맨>vs<니키>
[과연 배당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빵 봉지를 쓰고 나온 브래드맨! 4연승째 기록하고 있는 니키! 정배는 어느 쪽이냐앗!]
띠리리리-.
거대한 스크린에 숫자들이 마구 올라가기 시작한다.
“···.”
웃기는 이벤트로군. 꼭 카지노의 슬롯머신이라도 보는 것 같다.
“니키!! 이번에도 믿는다!!!”
“빵 봉투 놈 빨리 떨어뜨려라! 8강전이 보고 싶다고!”
그리고 마침내 나온 결과.
해설자들이 여전한 하이텐션으로 대회장에 열기를 더한다.
[브래드맨 승 배당이 7.6배!! 니키 승 배당이 1.14!!! 무승부가 7.1배!! 이 대전! 배당이 굉장하다!]
[사실상 대부분이 니키가 승리한다고 보는 거거든요! 과연! 4연승을 달리고 있는 니키의 실력은 날카롭긴 합니다!]
7.6배당.
크로스보우가 승리하는데에 만 원을 걸면 7만 6천원으로 돌려받는다는 소리.
아주 드문 역배다.
관중이 평가하길, 크로스보우가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 것이나 마찬가지.
브래드맨, 그러니까 빵 봉투를 뒤집어쓰고 있던 크로스보우는 환호성 속에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남자.
그 외모가 근육질의 서양인, 겉보기로는 어려 보이는 얼굴.
크로스보우는 상대를 관찰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주무기는 양손에 차고 있는 거대 건틀렛인가.’
방패로 써도 좋을 만한 크기다.
“···대충 어느 정도 수준인지 볼까.”
크로스보우는 여전히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중얼거렸다.
의도적인 비웃음이 담긴 시선과 함께였다.
그에 꿈틀, 눈썹을 들어 올리는 상대편. 니키가 아니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야. 이 뉴비새끼는? 코스프레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쐐애애액!!!
돌연, 크로스보우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앙!!!!
굉음이 들렸다.
투기장 바닥이 종이짝마냥 찢어지는 소리였다. 갑작스레 행해진 공격에, 니키가 바닥에 자국을 남기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브, 브래드맨!! 갑자기 공격!!]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크로스보우는 검을 여전히 어깨에 건 채 관중석을 돌아본다. 어느새 검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방금 보신 분? 발차기? 발차기였던 걸까요?!!]
발로 밀어 차 버린 것.
“지리면 안 된다?”
도발하는 말.
“커헉···크허억···.”
이 정도는 버틴다 이거군.
크로스보우는 빙긋 웃었다. 아주 수준이 낫진 않군. 예상보단 즐거울 것 같았다.
“크으···이, 이 자식이 비겁하게!!!”
니키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침음성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송인 크로스보우가 아닌 정체를 감춘 선수, 브래드맨.
지금은 조금 다른 퍼포먼스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
뭐가 뭔질 모르겠다.
[브래드맨! 이건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이었다!!]
[상부 리그에서나 보는 에너지 운용!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 언뜻 드러나는 색마저 유니크합니다!]
“니키!!! 정신 차려!! 놈은 스피드 쪽에 특화됐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보면 돼!!”
─하부 리그긴 해도 코치같은 게 붙는 건가.
상대의 그런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모습.
지금이야.
몸을 틀었다. 왼손을 시야를 가리듯 뻗고, 그 간격을 메우듯 2타.
자신이 선택한 기반 에너지, 오러를 듬뿍 담는다.
─다만, 닿지 않는다.
파앙!
우스꽝스러운 빵 봉투를 쓰고 있는 남자는, 일견 아무렇게나 휘두르듯 검을 돌려 공격을 흘려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니, 어쩌면 같은 순간이었을까.
콰아아앙─!!!
“극?! 커헉!!”
다시 한번, 엄청난 소리가 투기장을 지배했다.
고작해야 발차기. 강철로 이뤄진 건틀렛과 맞닿아서 난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
간신히 막아 낸 팔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니키는 마찬가지로 떨리는 호흡을 어떻게든 정돈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뭐가 뭔지 모르겠어.’
시선은 분명 한순간도 떼지 않았을 터.
그런데도, 저 빌어먹을 빵 봉지는 마치 심리를 읽기라도 하는 듯, 사각에서 공격을─, 기척도 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니키 선수! 반응속도가 느립니다! 계속해서 브래드맨만 타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
‘···반응 속도가 느린 게 아니야.’
비록 아직 하부 리그의 선수지만 나름의 유망주.
이곳 밖에서는 유명 게임단의 연습생 제의도 여러 번 받아 봤던 그로서 생각하기엔, 문제는 반응 속도가 아니었다.
‘박자를 빼앗긴다. 마치···.’
호흡, 맥박, 눈동자의 위치나 근육의 움직임···그 모든 기색을 전부 읽히는 듯한 상대의 시선.
생애 처음 느껴 보는 느낌이었다.
마치 위험한 육식동물과 눈이라도 마주치고 있는 듯한 감각.
‘집중해라. 집중하면 돼.’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반응 속도. 아까 반응 속도랬지. 이렇게 된 이상 지금까지의 전투 패턴은 잊는다. 오로지 반사신경만으로···!’
그는 그렇게 되뇌며 눈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
다음 순간, 눈앞까지 다가온 검날이 보였다.
“허억···?!”
─죽는다.
통각 제한은 해제된 상태.
이걸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굳힌 순간.
“···?”
돌연, 검이 멈췄다.
정적의 순간.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크로스보우.
“···지리진 않았겠지?”
낮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히, 히익···.”
“비명소리하곤. 낫 쿨.”
텁.
“켁!”
목을 움켜쥔다.
몸 안에서 여러 에너지가 마구잡이로 섞인다. 그 탓에 검보라빛의 에너지가 그 몸 주변에 잠시 일렁였다.
“조금 아플 거다.”
“─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속이 뒤틀리는 느낌에 더 가까우려나?”
그래도 쇼크사 하지는 않을 거야.
크로스보우는 대충 중얼거리며 축 처진 놈을 내던졌다.
털썩.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지는 니키의 모습.
너무나도 압도적인 경기내용.
그에 관중석과 중계진이 잠시 벙찐 듯했다.
“뭐, 뭐야!!”
“저 빵 봉투 뭐냐고!!!”
“아. 역배 터졌다. 씨이이이이발!!!”
“브래드맨! 브래드맨! 브래드맨!! 실수로 천만 원 박았는데 고맙다!!! 씹새야!!!”
[청 코너 브래드맨!!! 승리!!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역배충들 기저귀 가는중! 빵쟁이 브래드맨이 4연승의 니키를 꺾었다아아앗!!!]
[브래드맨이 상대를 쓰러뜨린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브래드맨의 승리구나.]
[펀, 쿨, 섹시의 브레드맨!! 이 남자에게서 배드 가이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쏟아지는 환호성, 그리고 돈을 잃은 자들의 절규.
그에 크로스보우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아주 거만한 제스쳐였다.
-“님. 연기도 잘하네요. 아님 원래 그런가?”
“원래 성격이 이렇다면 어쩔 건데요?”
-“어쩌긴요. 시켜봐. 당해볼 게 있어.”
저런 비슷한 소리. 언젠가 들어봤던 거 같은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 90화-투기장의 신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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