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투기장의 신성 >
***
“역시 이름값이 어디 가진 않는다는 거지. 강하긴 하군.”
본인이 직접 꽂아 넣은 선수, 크로스보우의 경기를 관람하던 크리스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뭣보다 적응력이···원래부터 투기장에 있던 놈 같단 말이지.”
저 재능.
어쩌면 자신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피는 턱을 쓰다듬다가 문득, 옆을 향해 말했다.
“안 그래?”
“···확실히···저 모습을 보니까 개인방송 쪽이 연기였다 싶네요. 저 범죄자 같은 차림도 그렇고.”
“넌 너무 신중한 게 문제라니까. 가끔은 직감을 믿으라고.”
“직감 말인가요.”
동아시아 계열의 남자. 그 얼굴에 걸쳐져 있는 안경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포인트.
크리스피와 함께 투기장의 보스라 불리는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대로라면 오늘 바로 상부리그에 올라올 자격을 갖겠네요.”
“그렇겠지? 그것도 우승 자격으로 올라올 거다.”
“상부 리그 선수가 되면 무슨 혜택이 있죠?”
그 질문에 크리스피는 눈을 찡그렸다.
몰라서 질문한 건 당연히 아니다.
생각을 정리할 때 사람을 시켜 질문하도록 하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상부 리그 선수쯤 되면···사실상 투기장의 주주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것저것 권한이 풀리긴 하지.”
“그쵸. 예를 들면 좀 더 음습한 시설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심지어 캡슐기능도 풀리죠? 녹화 같은 거.”
크리스피는 수긍했다. 가끔 그런 인간들이 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종종 정도의 비율일까.
특히, 고통과 폭력을 즐기는 투기장 선수들은 더욱더 그랬다.
“그런 놈들이 있긴 하지? 사이버 마약 같은 거 쓰고 녹화하는 놈들.”
“···그렇군요.”
남자는 크리스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피 씨.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말인데 들어나 보지.”
그리고 남자에게서 나온 말은, 크리스피로선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것.
“···아시겠죠?”
“···조금 귀찮긴 하겠네. 뭐···저쪽이 본인도 죽을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그럴 일은 없겠다만···.”
“확실해서 나쁠 건 없어요. 크리스피.”
“흠. 우선은 알겠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붉은 검신님이랑은 얘기 잘 끝마치셨나요?”
“하. 말도 마라. 그 여자랑?”
***
파죽지세의 퍼포먼스.
‘브래드맨’의 승리는 하부 리그의 8강전에 다다라서도 여전했다.
이번에도 상대를 농락하는 태세로 경기를 승리한 크로스보우.
“적당히 때리는 건 어렵구나.”
-“스팽킹의 달인 크보 덜덜해.”
“···진짜 방송 밴합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잠시 다른 선수들의 경기 시간.
크로스보우는 모습을 감추는 것보단 대기실에 남아 있는 걸 택했다.
현재, 급격하게 관심을 끌어 모은 상태기에 택한 위치였다.
다만 그게 다른 선수나 코치들의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싸이코 살인마야···대체 무슨 짓을 하면 그런 비명소리가···.”
“조심해라. 저딴 걸 뒤집어쓰고 있는 놈들 중에 제정신인 녀석이 있을 리 없으니까.”
거북함을 느끼는 듯한 반응이 다수.
그러나 그중에서도 한 명, 코치도 없이 크로스보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가 존재했다.
실제 성별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코스튬은 여성. 이쪽이 뚫릴 듯한 시선이다.
‘오호라.’
크로스보우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관찰했다.
‘뭔가 다른데.’
투기장에 접속해 느낀 것은, 오가며 마주치는 이들의 눈동자가 대부분 멀쩡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단순히 인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말이었지만···최소한 크로스보우의 눈에는 그랬다.
그러나 저 여자는, 지금까지 봐 왔던 이들과는 달랐다. 이런 곳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주 똑바른 시선으로, 크로스보우를 혐오하듯 노려보고 있던 것이었다.
“은아 씨.”
그는 속삭였다.
-“듣고 있어요.”
“접촉해 볼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런 표정을 짓는 인간은 얼마 전에도 겪어 본 바 있었다.
이세린.
그녀가 제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크로스보우에게 부탁하던 날.
“···.”
크로스보우는 데쟈뷰를 느끼며, 엄지손가락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
“···?”
그리곤 대뜸 그 손모양을 내밀었다.
“···!!!!”
순간 의미를 깨닫고 눈을 더 가늘게 뜨는 상대의 얼굴. 티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크게 화가 난 듯한 기색.
은아의 통신이 이어졌다.
-“접촉해 볼 사람. 특징이 어떻게 돼요?”
“음···일단은 굉장히 빡이 친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혹시 뭐했어요?”
“아. 엿을 조금.”
-“···엿?”
그리고 벙쪘던 주변에서 격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저, 저 미친 새끼.”
“상부 리그 확정의 슈퍼 루키한테···쟤도 깝치다가 금방 가겠구만.”
“어빌리티 사용자한텐 못 이긴다고. 머저리같은 빵쟁이 새끼.”
“뒤지려면 뭔 짓을 못 해. 우리야 좋지.”
슈퍼 루키.
여러 명의 입에서 거론됐던 이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하하.”
그러나 그 말 중 크로스보우의 관심을 잡아끈 단어는 다른 것이었다.
어빌리티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이 존재하지 않는 투기장. 물론 선수들의 반응이 생생하다는 것에 분명 흥행요소가 존재할 터지만, 그래도 밋밋한 건 사실.
“뭔가 있나 보군.”
***
[크로스보우]
<어빌리티가 뭐지?>
문득 도착한 메시지.
크리스피는 붉은 검신에 열정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던 걸 멈추곤, 감탄성을 냈다.
“그 짧은 시간동안 파악해 냈군. 또.”
확실히, 뭔가 다르긴 하다.
그는 답장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종의 테크닉이다>
<올오버에도 있어. 고계급들이 쓰는 팁 같은데에 보면, 스킬을 투명하게 한다던가, 상대의 기반에너지를 느끼고 어느 캐릭터인지 맞추는 거라던가>
<여긴 스킬이 없으니까 스킬 대용으로 그런 취급을 받는거지. 다른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지만 답장이 없다.
크리스피는 고민하다가 내용을 추가했다.
<예를 들어 투기장의 붉은 검신은···.>
[크로스보우]
<그런거였군. 알겠다>
“···흐음.”
그나저나 붉은 검신과 크로스보우라.
이거···잘하면 그 꼴보기 싫은 년한테 한 방 먹일 수 있는 거 아냐?
크리스피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굳이 나설 필욘 없지.
“···흐음.”
그리고 혹시라도, 크로스보우가 이긴다면 그땐 정말 그를 자신과 동급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다.
“···이길 린 없겠지만. 하.”
붉은 검신은 규격 외의 존재.
아무리 우승자니 뭐니해도, 그 여자한텐 이길 리 없다.
괜한 생각이었군. 그는 쓰게 웃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재개된 경기.
하부 리그 관중석은 그야말로 경악과 공포의 현장이었다.
“뭐여···. 저새끼 운 아니였냐고.”
“씨발. 뭔 힘숨찐이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배팅을 잘못한 이들이 많았던 탓에, 관중석에는 일어난 채로 주먹을 휘둘러대는 이들이 많았던 것.
“제엔장···다 박았는데.”
“브래드맨!! 오늘 니 덕에 차 한 대 뽑는다!!!”
사람들은 빵 봉투를 뒤집어 쓴 저 알 수 없는 놈을 보며, 처음에는 그저 상대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8강전은 처음 상대했던 니키보다 더 약체로 취급받던 선수.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이번엔 정말로 강력한 우승후보와 매칭된 4강전.
──당연히, 탈락할거라 생각했던 관중들.
배당율 역시 처음과 비슷한 수준.
크로스보우가 승리하는 쪽에 배팅하는 것이 엄청난 역배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브래드매애애애앤!! 대엠! 티배깅까지, 완벽한 승리!!!]
[무자비한 경기방식!! 진정한 남녀평등주의자!!! 상대가 여자건 뭐건 때려눕힙니다!! 이래야 투기장이지!!]
다시 한번 승리.
“미친 거냐고···.”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네이션스 컵 끝난 프로인가?”
“무슨 소리냐. 전프로도 개털리는 곳이 투기장인데.”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저기 저 우스꽝스럽게 생긴 빵 봉투를 쓰고 있는 남자가, 그들이 처음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크로스보우는 빵 봉투를 달랑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딱 대. 이 새끼들아.”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관중석의 누군가가 이 순간, 그의 모습을 녹화하고 있기를 바랄 뿐.
그는 엄지를 아랫쪽으로 세우곤, 장난스레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마치 m자를 그리는 듯한 모습.
“···.”
그리고, 그게 실은 엄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넣을까말까하는 제스쳐라는 걸 알고 있는 이가 한 명.
바로 대기실에서 크로스보우에게 도발당한 여성.
그 정체는 바로 이미 상부 리그 진입을 확정 지은, 투기장에 오랜만에 등장했던 슈퍼 루키.
“···혐오스런 인간.”
그녀가 작게 중얼거릴 때, 해설의 안내가 경기장을 울린다.
[자! 마지막 남은 결승전이 30분 뒤에 시작됩니다!! 과연 이번에 배당률의 행방은 어디로 갈 것인가!]
[결승전을 앞두고 각각의 대기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두 선수! 이들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 보자면···이번에도 브래드맨 선수가 이길 확률이 적다고 밖엔 말씀드릴 수 없겠군요!]
시선을 돌려 관객석.
잠시 경기장 바깥에 마련된 편의시설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관객들.
[제가 봐도 솔직히 그렇거든요? 역배충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니라···이번 상대는 어빌리티 사용자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브래드맨이 막타를 칠 때 쓰는 그것도 어빌리티 비슷해 보입니다만···사실 별 의미가 없죠?]
그리고 거대 전광판에는, 분석을 계속하는 중계진.
[그렇습니다. 이 ‘어빌리티’라는 게 원본 서버인 올오버랑은 또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단순히 공격 기술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 어빌리티는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어려 보이는 여성!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에너지포를 쏘아내듯···]
[내용물은 아저씨라고 하던데.]
[오우. 댐잇]
“···개소리.”
곧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모든 풍경.
그녀는 호흡을 들이마셔, 그 모든 걸 마음 속에서 날려보냈다.
조금 어지럽지만 상관없다.
이젠 익숙한 감각이니까.
***
[솔직히 크보가 잘하는 건 인정하는데 한국이 1부리그라는 건 개억지지ㅋㅋ]
-미국성님들이 1부 리그 아님? ㄹㅇ나라 전체가 버스 타놓고 양심웨얼?
└응 우승~ 응 20대1~
└아니 그니까 그 20대1 보여준 크보가 선수임? 선수도 아니고 스트리먼데 크보없는 리그가 어케 1부리그임 아ㅋㅋ
[크보 발가락 빨고 100만원 받기vs그냥 살기]
-어느쪽?
└???닥전이지 똥망밸;
└돈줘서라도 빤다ㄹㅇㅋㅋ
└대충 요리왕비호 브금
└미미!
└??? : 거기 발가락 아니야!
└(신고로 인해 제재된 댓글입니다)
“어휴.”
아주 쓰잘데기 없는 일로 논쟁이 벌어지는 건 커뮤니티에선 아주 흔한 일이다.
남자는 발전이 없는 커뮤 상황에 고개를 흔들며 웹서핑을 계속했다.
그가 주로 찾고 있는 건 크로스보우의 경기 하이라이트를 매드무비식으로 편집해 놓은 영상
가끔 생각날 때 봐주면 뽕이 차오르기 때문에, 자주 시청하는 종류의 영상이었다.
"이제 다 봐서 볼 게 없네···."
아이튜브는 이미 다 본 지 오래.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필터를 눌러 최신 동영상만 떠오르도록 검색했다.
태그는 '대회'.
"응?"
그러자 가장 상단에 떠오른 동영상이 하나.
단지 분류를 위한듯한 제목. 거기에 묘한 썸네일이었다.
"S-Ground? 3초 전에 올렸네···어라?"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게, 화면에 펼쳐진 게 처음보는 경기장이었던 것이다.
올오버 이스포츠의 골수팬임을 자처하는 남자.
지방의 정말 작은 경기가 아닌 이상, 모든 대회를 알고 있는 그임에도 처음 보는 경기장이었던 것이다.
뭐, 새로 시작된 대회인가보지.
올오버는 대단히 큰 게임, 대회 하나둘쯤은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영상을 클릭한 남자.
"오. 뭐야. 꽤 잘 만들어놨네."
대충 넘겨가며 영상을 확인하던 남자는, 이내 경기장의 퀄리티에 잠시 영상을 멈췄다.
"발굴했다. 쓰바."
그는 괜찮은 영상을 찾아낸 기분으로, 다시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
"뭐야···선수가 왜 울지?"
그랬다.
영상 속 대회의 선수가, 돌연 울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언뜻 보건데, 그 누구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다.
관중석으로 생각되는 영상촬영자의 근처에선 비속어가 오고 가는 상황.
"···이상한데."
문득 이상한 느낌에 영상을 재빠르게 저장을 눌렀다.
[저장 중···98%···99%···100%.]
[저장 완료.]
그리고 정확히 저장이 완료된 순간이었다.
돌연, 자동으로 새로 고침되는 페이지.
[작성자가 비공개 처리한 동영상입니다!]
"···잘못 올렸던건가? 비공개로 올릴 거를 전체 공개로 했다던가?"
그러고 보면 '3초 전' 업로드였지.
그는 묘한 의심에 영상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 91화-투기장의 신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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