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투기장의 신성 (8) >
***
“이번엔 또 어떻게 한 거임?”
“제일 아픈 지건을 때려 주었습니다.”
“···이봐요. 미친놈 씨.”
달리는 와중, 어느새 곁에서 달리고 있는 채은아.
크로스보우는 대충 대꾸하며 중얼거렸다.
“참. 방송 켜져 있는데.”
“어? 결국 녹화 해금했나 봄? 님들. 하이하이. 크보쨩핥짝입니다.”
“···인사하란 의미가 아니라 괜찮냐는 뜻이었긴 한데.”
“상관없어요. 이런 마당에 뭐가 중요하다고.”
그도 그랬다.
-씨발; 대충 상황파악하는중인데 이거 생각보다 큰 거 같다
-응원한다 크보야···좀 큰 거 같은데
-쟨 누구임? 조력자?
-신 행세하는 인간 단죄하러 온 크로스보우ㄷㄷ
은아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기 때문인지, 시청자들은 그저, 돌연 내밀어진 무거운 화제에 열중이었던 것이다.
“근데 이렇게 계획 다 어그러뜨려도 되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예지한테 미리 연락해 둬서 다행이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짜증이 나서.”
“아. 크크.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들이 향하는 곳은, 이 투기장에서도 지하.
깊이, 더 깊은 곳으로 향해 간다.
길 따윈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자신의 재능이 인도해 주는 데로 향한다.
“그래서 앞으로는요?”
“백문이불여일견. 현장을 잡습니다.”
“···오키. 엄호로 갈게요.”
아까 전 전투 때부터 회색 세상에 진입해 있는 상태.
마치 네이션스 컵 때처럼, 그 음영이 평소보다 훨씬 더 짙다.
“저새끼들 잡아!!!”
“저기다!!”
순조로운 가운데 문제라 할만한 건 우르르 몰려드는 인간들이었다.
마치 정말 뭔가의 조직이라도 되는 양, 까만색 복장으로 일통한 인간들.
드르르륵─!!!
“와우! 크보 님! 저놈들 총 쏘는데요!”
“알아서 피하세요.”
“차가운 남자! 그리고 똥피하기 게임. 최고다. 거근보우!”
“닥쳐 주세요. 좀.”
-ㅋㅋㅋ아 좀 웃기네
-무거운 가운데 웃는자···일류다
-저 사람 누구임? 스트리머임?
다만 날아오는 건 총알뿐만이 아니었다.
복도가 맞닿는 장소.
그곳에 나타나 검을 들고 대기하는 놈들의 모습.
“잡았다!”
“이 미꾸라지같은 년놈들···감히 물을 흐려?”
이대로라면 앞뒤로 포위되고 만다.
“어떡하죠?”
“글쎄요. 양각 돌파는 어떻게 한다?”
“···!”
그 말에, 채은아의 눈이 커졌다가 반달을 그렸다.
더 원 그라운드 이야기다.
“연막부터 친다?”
“저런. 그러니까 랭킹 2위인 겁니다. 피지컬로 밀어야죠.”
“···핵쟁이들 상대로 피지컬로 미는 인간은 크보 님밖에 없어요.”
“쿠쿠루삥뽕.”
긴장을 푸는 만담은 좋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저거 막아!!”
“죽어!!”
복도를 내달리는 두 명.
그러나 빠르게 다가가는 상황에, 돌연 적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
명확하게 이쪽을 조준사격 하는 자세.
“···위험해요!”
위험을 감지한 은아의 외침이 있었지만 크로스보우는 듣지 않았다.
그 동공이 훅, 축소된다.
검격. 우상단에서 내리긋는 형태.
자세만으로 그 사실을 파악해 낸 크로스보우는, 교묘하게 상대의 검을 틀어쥐었다.
“?! 이런 미···!”
파캉!
“···와우.”
채은아의 감탄성과 함께 산산히 부숴져 버리는 검.
복도에 있던 인원들이 모두 그걸 인식하는 순간이 바로, 또다시 탄환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검을 뽑는다.
동작은 단 한 번. 크게 내리치는 모션.
일견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하나의 선이 그어지는 걸로 보이는 착각을 순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동작이 가져온 현상 역시 경이롭다 할 만한 것이었다.
카앙!!
그 작은 탄을 정확히 인식하여 두 동강 내 버렸던 것.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상대의 기관단총까지 일도양단에 성공한 크로스보우.
그는 빙글 몸을 돌렸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등을 맞대며 자세에 호응해 주는 채은아.
“···젠장. 쏴!! 죽여도 상관없어!”
“···그, 그치만.”
“그냥 쏘라고!! 씨발. 총 내놔. 이 새끼야!”
이건 곤란했다.
아군이 맞는 걸 신경쓰지 않고 쏴 버릴 셈인듯 했다.
“컥!!”
그때, 처음 검을 휘둘러 온 상대의 머리를 내리찍어 마무리를 짓는 은아의 모습.
적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고갔음에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당연한 신뢰.
고작해야 시청자와 스트리머의 사이라기엔 무거운 그 믿음에 크로스보우가 피식 웃었을 때.
드르르르륵──!!!
공간을 가득 매운 것은 총성이었다.
몇 백 발은 족히 될 법한 탄환이 단 한 사람을 향해 발포된 것이었다.
투두두두두!!!
공포심이 섞인 무차별 사격.
탄환이 이리저리 빗발친 공간이, 울퉁불퉁한 바위의 표면처럼 파인다.
그리고 마침내 탄창이 모두 소모된 후.
“······뭐냐. 저건, 뭐냐고.”
“···말도 안돼. 여기, 여긴 투기장 시스템이 적용된 곳이라고!!!!”
그곳에 태연히 서 있는 것은 크로스보우였다.
“끝인가.”
빗발친 총탄의 흔적이, 크로스보우가 서 있는 곳을 기점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검을 돌려 모두 막아 낸 것이었다.
“고맙게 쓰지.”
그는 검면에 모인 탄두를 바닥에 주르륵 나열했다.
그리고 강하게 올리치는 모습!
그 모습이 마치 네이션스 컵의 결승전에서 누군가가 보여 줬던 것과 같은 피지컬 컨트롤.
“크아악!!”
“···크, 크로스보우?”
“한국의 크로스보우?···젠장. 어디서 봤다 했더니!!”
반응은 채팅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지컬 살벌한거보소;
-ㄷㄷㄷ크보말대로면 여기 통각제한 없는 곳 아님?
-와 현실피지컬 뭐야
-이거 사실 크보가 주인공인 머블 신작 예고편이었냐?
그리고, 그 반응이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파직─.
검보라빛이 새어나오는 크로스보우의 손.
그게 그들을 모두 강제로 로그아웃시켰기 때문이었다.
“끅···아아아악!!!”
[SYSTEM]풀다이브를 강제 해제합니다!
“가죠.”
“···네.”
-가즈아ㅏㅏㅏㅏㅏ
-가슴이 ㄹㅇ웅장해진다; 악의 조직과 싸우는 크보
-이 싸이렌···이 추격의 소리···혼란스런 분위기···ㄹㅇ영화네
-???: 다음에 볼 때는 적입니다. 적은 아군이 아닙니다(끄덕)
-지금도 적이야 미친놈아
***
지하투기장의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
관계자들 사이에선 그냥 상황실이라 불리는 곳.
채은아가 맨처음 보며 마치 판옵티콘 같다 평했던 구조물의 지하.
그곳은 지금 난리통이나 다름없었다.
드드드드드-···
지하 깊은 곳까지 전달되어 오는 진동.
부스스 떨어지는 가루들 사이로 다급한 브리핑이 오고간다.
“침입자!! 현재 지하 2층!!!”
“젠장. 젠장!! 대체 어떻게 부수고 들어가는 거야!!! 모든 구간 다 차폐하라고!!”
쿠우우웅──···!
“차폐했습니다. 그런데도 뚫리고 있습니다···!”
“지가 뭔 마스터키냐? 젠장. 어떻게 길도 똑바로 찾는 거냐고···!”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증거인멸조의 상황은?”
“통로를 통해 최대한 빨리 이동하고 있습니다만···규모가 워낙 커서 차질이 많습니다···!”
“취한 손님들이 많아 처치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상황 구체적으로 보고한다! 지하 4층부터 주요 시설 목록 싹 브리핑해!”
“룸이 23개. 취미실이 21개. 편의시설이 10개. 사이버 감옥이 8개. 미러룸이 5개입니다!”
“···염병. 존나게 많네. 어떻게든 막아!!! 상황실 인원도 절반 이탈해서 전투준비!”
위잉- 위잉- 위잉-.
빠르고 적절한 명령이었다.
남자의 말에, 상황실에 있던 인원이 날듯이 뛰어 밖으로 향한다.
“포탈이라도 하나 만들면 안 되냐고 했더니! 씨발. 그놈의 현실성!”
단번에 증거를 인멸할 수가 없다. 서버를 닫을 수 있는 권한도 없거니와,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상의 뭔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몸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
그 사실을 떠올리며 지휘를 맡은 이가 이를 갈고 있을 때.
“그건 불가능합니다.”
“···보스! 죄송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돌연 나타난 안경을 낀 남자. 그에 고개를 팍 숙이며 식은땀을 흘리는 지휘 인원.
“침입자 정체는 파악되었나요?”
“그, 그게···.”
“말해 보세요.”
“스트리머, 크로스보우라고 아십니까. 그자입니다.”
질끈 감은 눈으로 전해진 보고.
“역시 그렇군요. 불안하다 싶더니.”
“예···?”
“크리스피는?”
“그게···기절한 거 같습니다.”
안경남자의 반응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것이었다.
“확인했습니다. 33번 카메라 메인화면에 띄우세요.”
“33번 카메라! 알겠습니다!”
떠오른 화면에 비치는 것은 두 남녀. 통로를 내달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득 크로스보우가 화면에 잡히는 각을 정확히 바라본 것은.
씨익.
보란듯한 미소.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싸늘한 오한이 달린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증거인멸까지 소요될 시간은?”
“10분 정도면 얼추 가능할 거 같습니다.”
***
-저거다!!!
-가즈아ㅏㅏ
-녹화따는중 씨발 가자
온갖 장애물들을 헤치고 도달한 장소.
크로스보우는 황금빛 엘리베이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얼추 도착한 거 같네요.”
“···하아. 하아···.”
채은아는 그저 헐떡대고 있었다.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벌인 전투만 십 수번.
그래도 명색이 망겜의 랭킹 2위였던 유저. 크로스보우가 순간순간 짜내는 전투 시퀀스에 어떻게든 맞추고는 있지만,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도 한계였던 탓이다.
“진짜 괴물···거근···개새끼···변태새끼···하아···.”
“나쁜 말은 안됩니다.”
-???: 랭귀지!
-ㅋㅋㅋ저분이 매니저라구요?
-아ㅋㅋ구라치지 말라고ㅋㅋ
-크순이on
이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면, 마침내 목표했던 곳에 도달한다.
“···조용하군요. 여기는.”
가장 빠른 길로 여겨지는 통로로 왔을 뿐인데,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엘리베이터.
···아마 통로는 이쪽뿐만이 아니었던 거겠지.
그도 그럴 게, 엘리베이터 하나로 모든 인원이 이동할 수 없을 터.
자세히 들으면 아우성 같은 게 희미하게 귓가에 울린다.
“···VIP 전용 엘리베이터. 그런 개념인가봅니다.”
“눈썰미가 좋네. 맞아.”
대꾸는 뒤에서 돌아왔다.
“···!!!”
움찔, 다시 몸을 긴장시키는 채은아.
크로스보우는 천천히 뒤돌아 그 정체를 확인하곤, 중얼거렸다.
“···일어나서 여기까지 쫓아온 겁니까? 오호. 새 칼까지.”
붉은 검신.
투기장 부동의 랭킹 1위.
여자는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나랑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갔잖아? 욕구불만이라고.”
“진짜 구질구질하네요.”
“···뭐, 뭐?”
난데없는 인성질.
-포상on
-저건 또 누구야 중간보스냐?
-아;;지금 장난칠때가 아니야 크보야;
-*발 석궁단새끼들아 이게 지금 장난이야? 범죄 현장 아니냐고
-부숴버리죠ㅡㅡ
크로스보우는 태연히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도록 했다.
“···못 지나간다. 당신. 바깥에선 올오버 4시즌 최강자라지?”
크로스보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저래봬도 꽤 실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쪽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리면 좋지 않다.
“···어이 없네?”
그리고, 그걸 은아도 알고 있었던걸까.
돌연 그녀가 크로스보우의 앞으로 나섰다.
“누구보고 욕구불만이래. 줄 안 서냐?”
“···이년은 또 뭐야.”
“우리 크보 발가락이라도 핥으려면 줄 서라고. 순서 없는 년아. 뒤질 때도 새치기해서 가고 싶지?”
그를 향해 먼저 가라는 눈짓을 해 보이는 채은아.
크로스보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검을 건네준다.
“···죽고 싶구나? 아가씨. 뭐라도 돼?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CB따먹고싶다.”
“뭐?”
“그게 나야. 아줌마.”
띵─.
어느덧 도착한 엘리베이터.
빠르게 탑승한 크로스보우는, 전투가 개시되는 걸 보며 망설임없이 ‘닫기’ 버튼을 눌렀다.
< 95화 투기장의 신성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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