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현실과 가상현실 (4)***
“신기하군.”
크로스보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흐흐···흐흐흐···이렇게 된 이상 난 몰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뭔가 저지르고 다음 순간 일어난 일.
쏴아아아아─.
앞머리가 시야를 젖어 시야를 가린다.
기분 나쁜 차가움이 온몸을 적셔 나가고 있었다. 쾌적함만이 존재하는 가상공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다.
“모른다라?”
빗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시야가 가려진다. 마치 다른 유저들이 섣불리 움직이기 싫어지도록 하는 듯한 환경 조성.
크로스보우는 가만히, 그저 가만히 서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뭔가 발동시켰지? 한두 명이 서버에 난입하는 거였다면 상관없었던 것처럼 보였다만, 무리하게 다른 난입을 불러와서 시스템이 감지한 건가.”
합당한 추측. 그에 잠시 움찔한 더블혼은 이내, 딱히 알려져도 별 상관없는 사실이란 걸 깨달았다.
“하하. 정답이네. 크로스보우. 참 대단하단 말이지.”
그때였다.
─철퍽.
돌연,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
철퍽.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오고 있다.
크로스보우는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
넓은 보폭. 중량은 대략 90Kg 전후. 큰 키의 성인 남자.
그 소리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자동 프로세스의 일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뇌리에 떠오르고.
“그래도···아무리 너라고 해도 2대1은 이기기 힘들 거야.”
골목길 어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인영.
상대는 길디긴 일본도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둘이 구면이지? 그때 한 번 봤잖아.”
어느새 기세를 회복한 더블혼의 말.
“한때는 충검蟲劒 같은 이름으로 유명했었는데. 알까 모르겠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더블혼.”
남자는 크로스보우의 뒤편에 자리 잡은 채 멈췄다.
차가운 대꾸에도, 신이 난 더블혼은 말을 이어나갔다.
“소개할게. 자격의 방에서, 1대1만으론 오드맨 아저씨 다음이란 소릴 듣는 인간···일본 최강의 유저.”
넓은 삿갓을 쓰고, 기모노 같은 것을 입고 있다.
긴 머리가 어깨에 닿는다.
“그 이름 하여···무시무사시! 하하하. 일본 내의 1대1 모드 우승자라고 했던가? 아. 투기장 출신이었나? 아무래도 좋지만!”
“닥치라고 했다.”
크로스보우를 가운데에 두고, 그들은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마치 벌써부터 이긴 듯한 말투.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 태도.
“···.”
그에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이자가 날 불러야만 했을 정도, 인가?”
“웅. 오빠. 쟤가 나 때렸어.”
“닥쳐라.”
“진짜 세더라고.”
“···부디, 이번엔 네 말이 옳길 빌지.”
남자의 삿갓 아래, 날카로운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그러나 크로스보우는, 그 모습들에 그저 생각했다. 지긋지긋하다. 그의 앞에서, 뭐라도 된 것처럼 굴던 이는 그들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시간이 끌리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허접 1처럼 생겨서는 주둥이가 요란스럽군.”
“···뭐?”
시청자들은 없는 상황.
다만 만약 방송 중이었다면···하이드 모드라느니 하는 채팅이 잔뜩 올라왔을 게 분명한 크로스보우의 모습.
그는 아주 오랜만에 열이 뻗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팬티만 입고 나타났으면 조금 긴장이라도 했겠다만, 게임에서, 그렇게 열심히 꾸민 코스튬으로, 심지어 설정놀음 따윌 하는 놈이면···.”
그들을 위아래로 흩어본다.
피식.
“보통은 제정신이 아니지.”
“···팬티? 헛소리.”
“너···말 진짜 이쁘게 한다.”
조금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 불쾌한 표정이 된 둘.
불편한 정적이 흐르고─.
돌연, 다음 순간이었다.
“그보다 이런 것도 반응하지 못하는데, 뭐가 최강이란 거지?”
“──!!”
상대의 입장에서.
─깨달으니, 검이 미간 가까이에 도달해 있었다.
쐐액!!
“이, 무슨?”
당황.
크로스보우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다.
자격의 방이니 뭐니 해도, 결국 다 똑같은 걸까.
“이, 이게─!!”
“···더블혼. 처음으로 네 말에 긍정하지. 저건 꽤 하는군.”
세상이 어느덧 무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애초에 이미 그 시야는 회색으로 물들어 있다.
느릿느릿하게만 인식되는 세상 속, 모든 것이 낱낱이 파헤쳐진다···
크로스보우는 씹어뱉듯 말했다.
“이젠 카운터와 슈미츠의 위치는 불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냥 알아서 찾도록 하지.”
철컥. 손에 권총을 들고, 격발.
“촌극은 끝이다. 허접 1, 2.”
타아아앙──!
***
폐허.
부서진 도시.
반파된 건물들이 즐비한 공간. 빛을 잃은 간판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다.
어느 장소를 모방한 공간. 그 끔찍한 자취가 심하게 남아 있는 공간 속.
가상현실 올오버의 초기 단계.
“···과연. 날 소환할 정도의 힘은 남아 있다는 겐가.”
그곳에서 오드맨은 눈을 떴다.
분명 크로스보우가 자신에게 도달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상한 곳으로 전송되어 온 것이다.
“여전히 끔찍하군.”
그는 중얼거렸다. 건물의 잔해 속, 썩어 버린 인간의 시체가 그득하다. 하늘은 평소에는 보기 드물 만큼 맑다.
“···기억 박제인가. 구역질 나고 천박한 짓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오드맨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곳으로 돌연 날아온 것치고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
한참을 걸은 그가 도달한 곳은, 어느 모래사장이었다.
인적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저 멀리에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박살 난 채로─기둥만 남은 다리가 보였다.
“···.”
쏴아-.
파도가 몰려온다.
그 순간, 신기루처럼 모래성을 쌓는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어린아이의 등.
음험한 거구의 중년남자가 무방비해 보이는 등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엔 부산인가? 다양하기도 하군. 이런 끔찍한 추억팔이로는 말일세.”
“왔구나. 제임스.”
청명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무한 말인걸. 제임스.”
반복된 호칭에 오드맨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날 호출했지? 여기서 계속 모래성이나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가?”
깨달으니 묘한 방에 전송되어 있던 것치곤 오드맨은 놀라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한 모습.
“왜 그랬어?”
“···왜 그랬냐니. 무엇을 얘기하는 거지?”
어린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끔찍하게 난도질 된 형상의 얼굴.
“알잖아? 크로스보우.”
“아아. 뭐야. 관측하고 있었나.”
으쓱하는 모습.
“내가 너에게 알려 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대답해 주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래. 당연히.”
둘의 문답은 분명 방송인 크로스보우에 관한 것이었다. 설령 동명이인이 있다고 해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만 봐도 당연한 귀결.
“틀렸어. 제임스.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니. 틀린 건 너다. 오리지날.”
“···?”
일견 거구의 남자와 어린 아이.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둘의 대화는 마치 오드맨 쪽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고풍스러운 말투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신중했어야 한다? 이봐. 오리지날. 심지어 신중은 이미 할 만큼 했다. 네 말은 그냥 이상이다. 계획이 아니야. “
“이상이 아니야.”
“아니!!! ‘이상’이다!!!”
돌연 오드맨은 격하게 말했다.
이미 사라져 버린 공간. 그것을 영원히 재현하고 있는 ‘오리지날’.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자는 위험하다는 걸!!!”
“···그렇기에 더 신중했어야 해. 게다가, 네 방식에는 문제가···.”
“정신 차려라! 오리지날!! 이미 계획은 대부분 흐트러졌어!! “
“···.”
대답은 없었다.
오드맨은 그 사실에 더욱 격하게 주먹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애초의 계획은 대부분 흐트러졌다!! 투기장은 본래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고, 다시 시작하더라도 수많은 반발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 이용자들이 이용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건 더이상 멤버를 키울 수 없게 된 뜻이나 마찬가지!”
그뿐만이 아니야.
모래가 팍, 튄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다!! 본래라면 그녀는 일찍이 그 썩을 게임을 접고, 지난 네이션스 컵에 출전했어야 해.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인터넷에서 한심한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지 않나!!!”
매니저 노릇을 하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변수란 알 수 없는 것이야. 오드맨. 어쩌면···.”
파도가 덮쳐 왔다.
모래성은 무너지고, 그 잔해만이 조금 남는다.
“······당신도 늙었군. 정신만 존재하는데도 늙는 것인가?”
알 수 없다.
정말이지 이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란 그랬다. 어느 정도 깨우쳤다고 느끼다가도, 어느새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맞물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대표적으로 크로스보우가 그랬다.
“변수? 변수라고? 틀렸어.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일 뿐이야. 놈 때문에 함께해야 했을 ‘반반무’가 올오버에 발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블래드는 오로지 놈을 저격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유럽에서 인지도를 쌓았어야 할 슈미츠가 한국으로 왔다. 로키가 쓸모없는 패배를 경험했다!! 그뿐일까!! 이미 수많은 후보군이 바뀌었어!!”
“···그는, 처음 발생한 변수야. 그 정도는 예상했어야 해.”
“헛-소-리-!!!!”
콰아아아아앙──!!!
모래가 비산했다.
“다른 놈도 아니고, 네놈이 그런 말을 내뱉는다고? 개소리 하지 마라!!! ‘멸망의 게임’은, 결코 혼자만이 비범하다고 해서 뭔가 바뀌는 게 아니야!!!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로 그것도 못 알아차린 거냐!!”
“──그래서, 죽여야 한다는 거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많이 헝클어지긴 했지만, 아직 추스를 수 있다. 녀석에 대한 대처는 만약 다음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이어졌을 때 생각하면···!”
손바닥을 보여 말을 멈추는 ‘오리지날’.
끔찍한 얼굴을 한 아이는 모래성의 잔해를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그 입에서 극단적인 말이 흘러나온다.
“죽인다는 말이구나. 매번 다른 세계의 ‘너’를 죽이는 것처럼.”
“···뭐?”
두근.
오싹한 압박감.
“···헛소리하지 마라.”
“그래. 안 할게. 하긴, 그런 태도가 아직까지 유지될 리는 없으니까 내 착각이겠지. 그래도 이건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란다. 제임스.”
“···생각할 필요 없다. 그냥 죽이면 돼.”
그래? 아이는 웃었다.
이런 가설을 한번 세워 볼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면 어떨까?”
“···뭐?”
“그가 십 수만 번의 반복된 회귀 끝에 드디어 주어진 가능성이라면?”
“······다음번에 제대로 정리해서 시도하면 된다.”
“다음번이, 없다면?”
싱긋, 웃는 모습이 마치 괴물과도 같았다.
“멸망의 게임을 클리어할 마지막 한 조각이 바로 그 남자, 크로스보우라면?”
“···그럴 리 없다. 그렇게 판단할 만한 요소도 없을뿐더러, 그 녀석은 인격적으로도 파탄 나 있어!!”
마구 성을 내는, 아이 같은 모습.
그에 진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리지널’이 입을 열었다.
“인격···? 글쎄. 그런가.”
“그래!! 이쪽의 회유는 듣는 척도 안 하더군. 심지어 네 초대까지 무시하지 않았던가!”
“흐음···근데 말이야. 인격은 모르겠는데.”
그 순간이었다.
우웅────!!!!
기묘한 울림이 공간 전체를 뒤흔든다.
드드드드──···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한 진동.
세상이 흔들린다.
그에 아이의 눈은, 환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단 실력은 있어 보이는걸.”
쩌적-.
“설마, 침범당할 줄은 몰랐는데.”
쩌저저저저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무언가가, 부서져 나간다.
“제임스. 혹시 친구 사이로 등록되어 있니?”
“······뭐? 무슨···?”
“아무렴 어때.”
오드맨이 아연한 얼굴로, 거미줄처럼 금 가기 시작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째애애앵!!!
조각조각 흩어지는 에너지 파편.
그 틈으로, 낮은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속삭여진다.
“───찾았다. 쥐새끼 같은 놈.”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된 크로스보우였다.
“꽁꽁 숨었군 아주. 덕분에 알 수 없는 열쇠(캐릭터 생성권)이랑 그 강화권까지 소모했지 뭐야. 오드맨.”
장난기 가득한 말.
그와 달리 살벌한 기세가 그들을 옥죄어 온다.
“내 방송 소재. 어떻게 책임져 줄 거냐?”110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