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종족 갈등 (1)***
오리지날의 말.
음모론이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증거가 모여 있는 말들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세상의 종말은 예정되어 있다.
그를 막기 위해선 게임과 비슷한 뭔가를 클리어 해 내야 한다.
올오버는 종말을 막기 위해 인재를 육성하는 게임이며 동시에, 막지 못한 종말이 일어났을 때 유저들의 대피처다.
그리고.
“거기에 희생되는 게 본인 몸이란 건가. 오드맨의 과도한 행위를 이제 와서 차단하기엔 올오버 자체를 모두 없애야 한다고.”
“맞아. 이 정도 크기의 세계를 만드는 건 아무리 나라도 버거워. 다시 만드는 데에는 몇 년 이상이 소모된단다.”
그런 대화가 오고 갔던 것이다.
결국, 성별은 알 수 없던 ‘오리지날’의 초대.
그 목적은 크로스보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너는 특별하다. 부디 도와달라.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설득에 필요한 짓은 죄다 해대는군.”
크로스보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댔다.
실제로 그랬다. 오리지날이 말한 것들은,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설득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는 발언들뿐.
먼저 논리,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장소의 재구성을 통해 파편적으로나마 보여 준다. 그 심각성을 알 수 있게끔.
그리고 듣는 사람의 기분. 이쪽이 불쾌하지 않도록 멋대로 헤집고 다니는 행동에도 맞춰 준다. 자신이 우스운 꼴이 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예쁜 여성의 형태로 나타난 것도 그런 것의 일환이겠지.
마지막으로 설득하는 이의 진실성.
자신의 치부를 보이면서까지 본인의 진실성을 드러냈기까지.
동정심 유도와 협박성 멘트는 덤이었다.
니가 특별한 만큼, 없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고 보는 게 가장 낫나. 아니. 그보다 얘기해야 하나.”
뭐가 최선일까. 크로스보우는 고심했다.
오리지날의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얘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던 것.
“···.”
역시, 판단하긴 이르다.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
크로스보우는 자신의 원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부딪히며 생각해 보는 편이 좋겠군.”
뭔가 거창한 걸 들어도 결국 그의 본질은 게임을 잘하는 인간.
당장에 명확한 대책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한쪽만 들을 수도 없는 노릇.
오리지날과 대척점에 선 누군가가 있다는 직감과 함께 그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도 그럴 게, 크로스보우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어려운 게임이라고 해도, 수십만 번의 회귀 내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는 건 오히려 불가능하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일단은···방송이네.”
생각은 그만.
뭐가 되었든 올오버 내에 들어가 있으면 뭔가 일이 벌어지겠지.
게다가 휴방 길게 해 버렸다.
오늘은 방송을 해야 한다. 아무리 크로스보우라도 4일이나 쉬어 버릴 수는 없었던 것.
금새 도착한 집 앞. 그는 도어락의 버튼을 눌렀다.
삑삑삑삑-.
띠링.
그때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
“드, 드디어 왔구나! 오빠. 왜 연락을 안 받아?”
“리얼 크크. 느린 건 침대 위에서만 해 주셈.”
편집자인 신예지. 그리고 매니저 노릇을 하는 채은아.
같이 있는 건 드문 광경인데. 아니. 처음이던가?
크로스보우는 사이 좋게 앉아 있던 두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성희롱 뭐야. 이 무단침입자 자식들.”
“오빠. 이럴 때가 아니야. 좆됐어.”
“무슨 범조도시임? 오퐈~조때써~.”
“채은아 조용히 해 봐.”
“근데 좆되긴 했음.”
호들갑을 떠는 예지와 대충 다리를 쭉 뻗고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채은아.
무단침입 해 있는 건 둘째치더라도, 머리가 복잡한 가운데 소리를 지르는 건 조금 자제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뭐. 왜. 세상이라도 망했냐.”
두 명의 미인이 편한 복장으로 앉아 있는 광경. 분명 흐뭇해야 할 그 광경에도 크로스보우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신예지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터진 건 정말인 듯 보였던 탓이다.
“세상이 망하긴 왜 망해. 아니. 망했나.”
“뭐라는 거야.”
“크보님 입장에선 망한 거긴 하죠.”
“···?”
채은아의 끄덕거림까지.
“역시. 뭔가 열중한다 싶더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오빠.”
그녀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더 알아들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 오빠 무림공적 됐다고!!”
“아. 크크. 무림공적. 그게 맞다.”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갸웃댔다.
***
할로윈-운동회 이벤트.
일주일간 열리는 축제의 5일차.
남은 기간은 3일뿐.
진영 간의 경쟁은 크로스보우가 모르는 곳에서 상당히 심화되어 있었다.
바로 어제, 이종족 연합이 인간족을 꺾고 1등의 자리에 안착했다. 2등으로 뒤쳐진 인간족은 이를 악물고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크로스보우가 속한 마족은 여전히 3등에 머무르는 상태.
그도 그럴 게, 크로스보우나 카운터 정도를 제외하면···마족 진영에 고계급이나 네임드는 별로 존재치 않았던 탓.
아마 크로스보우와 만나본 고계급들에게 공통적으로, 집단전으로라도 크로스보우라는 인물에게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이유인 듯 보였다.
아무튼 구심점의 부재로 인해 상당히 처진 마족진영.
여기까지라면 무림공적이니 하는 이야기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었던 듯 보였지만···.
문제는, 오늘부터 바뀐 변경점에 있었다.
[공지사항]
[이벤트 5일차부터, 축제 도시 ‘뉴 올오버’에서 적대행위가 허용됩니다!]
[마지막 3일간 점수를 올려보세요! 승리한 진영에는 소정의 보상이 있습니다!]
“적대 행위 허용? 이거···.”
“맞아. 그냥 필드에서 PK 할 수 있게 된 거야. 오빠. 유저수도 제일 적은 마족은 뭉치기도 힘든데다가 구심점까지 없어서···그냥 걸어다니는 보너스 수준이라고 지금.”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유저 수를 차지하는 인간족 유저들.
매년 그들에게 ‘말박이’니, ‘씹덕’이니 하는 차별성 발언을 들었던 이종족 유저들이, 때마침의 적대행위 허용 패치에 따라 들고 일어난 상황.
인터넷에선 이 일을 가지고, 인싸 VS 아싸 대전이라며 주목도를 높이고 있었다.
심지어 민감한 발언도 마구 해대는 모 커뮤니티에선, ‘HALF-BREED LIVES MATTER’ 따위의 말까지 우스갯소리로 나오며 차별을 모두 물리치겠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등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던 것.
발단은 트리키 뷰 거대 방송인 중 하나인 ‘김볼모’가 유행시키기 시작한 일종의 밈이었다.
─“솔직히 이종족이 차별받은 건 맞잖아. 어? 맨날 변태수간충이라는 소리만 듣고. 이게 맞냐고. 안 억울하냐고. 인싸놈들한테 게임까지 뺏길 거야?”
-어? 듣다보니 빡치네?
-어? 화나네?
-ㄹㅇㅋㅋ
-갑자기 ㅈ같네ㅋㅋㅋ인싸쉑들ㅋㅋㅋ고백 8번받고 아싸 ㅇㅈㄹ하던거 다 뒤집어엎고 싶다.
-’진짜’들은 너무 오래 참았다
아주 오래전, 모 게임의 서포터를 ‘도구’라고 부르던 느낌의 밈으로써 시작된 것이···차츰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아지며 과격화 된 것이었다.
거기까지 들은 크로스보우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인싸니 아싸니, 뭐가 차별이니 말박이니 하는 말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는 와중 드는 의문이 있었던 것.
“···그럼 마족은?”
“마족같은 3등따리 진영은 누가 신경써 줘요, 크보쨩. 크크. 루프탑에라도 올라가야 하나.”
“마족이 받는 차별은 시스템적인 차별이 아니라던데. 오빠.”
“뭔 개소리야. 드디어 돌았나?”
즉, 상황은 이랬다.
이종족과 인간족.
둘의 가열찬 순위 경쟁에서, 마족 진영의 유저들 등이 터지고 있었다는 것.
눈에 보이는 족족 척살당해서 진영포인트가 되는 와중이라는 듯 했다.
마족 진영 유저들은 아예 게임을 하지도 못하는 수준의 현상이···현재의 상황이었다.
“이거봐. 실시간 진영포인트인데. 심각해. 커뮤에서 뭔 일 나는지도 모르고 접속한 마족 유저들이 다들 죽는 거 같더라구.”
[1. 이종족 진영 : 24,209점]
[2. 인간족 진영 : 23,984점]
[3. 마족 진영: 8,301점]
“···세 배 차이?”
“점수를 얻을 만한 뭔가가 전혀 없는거야.”
“심하네.”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인간족 진영과 이종족 진영의 포인트는 급격히 오르는 데 비해, 마족의 포인트는 거의 오르지 않는다.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크로스보우는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이종족들이 차별받은 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구욧!]
-모르면 공부하세욧!
└(물음표 개구리콘)
└아ㅋㅋ이제 니들이 1등인데 차별 아니지 않음?
└지능적 인간족놈; 이런 놈들이 지금까지 말박이니 괴물이니 이딴 소리함
└과몰입좀 하지마라
└근데 마족인권은 누가 챙겨줌?
└루프탑에나 올라가야지ㅋㅋㅋㅋ
└ㅅㅂㅋㅋㅋ
[오랜만에 접속한 유저가 보는 현재 진영 경쟁 상황. jpg]
[선물을 들고 들어오자 온통 불타는 짤방]
-ㄹㅇㅋㅋ
└적절추ㅋㅋ
[솔직히 이종족놈들 하는 짓 역겹긴 함ㄹㅇ]
-지들 약자니 ㅇㅈㄹ하면서 보이는 마족 다 죽임ㅋㅋ뭐가 약잔지 모르겠음
└응~니들 인간족도 마족 죄다 죽이잖아~
└솔직히 걸어다니는 보너스긴 하지ㄹㅇㅋㅋ그래도 우린 니들처럼 위선은 안떰ㅋ
└인싸쉑들 화나서 갤러리 찾아오는거봐ㅋㅋ클럽이나 가라 인싸놈들은
[근데 발단은 인간족들이 맞지; 이건 인정해야하는거 아님??]
-솔직히 지금까지 쥰내게 이종족 까댄 건 맞잖아 ㅈ종족이니 괴물같이 생겨서 사람말하지 말라느니 잡종이니 포니 좋아한다고 말박이니ㅋㅋ;니들이 시작했는데 쳐맞던 찐따가 반항하니까 띠거운가봐?
└아무도 그런 말 안했어!!!!!!!
└중간에 함정이 있는거같은데
└우린 멈추지 않는다!!!!HLM!!
└그건 알겠는데 마족애들은 왜 괴롭히냐고 아ㅋㅋ
└이딴말하면서 니들 다 낄낄대고 있을거 다 앎ㅋㅋㅋㅋ
영 제정신이 아니어 보이는 게시글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모두가 커뮤니티의 인기글이라는 점이었다.
하나의 커뮤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커뮤에서, 이런 식의 갈등구조와 연관된 게시글이 모두 인기글에 올라 있었다.
“···이건 좀 그런데.”
여기저기를 모두 살펴본 크로스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말들은 저렇게 하지만, 두 진영의 유저들 사이에 흐르는 것은 대부분이 유쾌한 분위기였다.
물론 반쯤은 진심인 듯 보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피해받는 것은 오히려 크로스보우가 속한 마족 진영이었다.
결국 순위경쟁은 경쟁.
약하면 당한다는 거다.
“저희 방 시청자들이 언제오냐고 아우성이에요. 크보만 있었어도 이렇게 당하진 않았다고.”
“이런 글도 있어. 오빠. 아까 무림 공적이 어쩌니 했던 이유."
신예지가 내미는 스마트폰의 화면.
그곳에는 이런 게시글이 존재했다.
[근데 아무리 싸워도 크보오면 힘 합쳐야함]
-크보 하나로 어케될지 모른다···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로는 ㄹㅇ임 바로 상황 알리고 척살드가야함ㅇㅇ
└??솔직히 아무리 크보라도 3배 점수 뒤집기는 힘들듯
└근데 원래 마왕타도를 위해 인간이고 이종족이고 연합하자너ㅋㅋㅋ이게 맞따
└마왕님 진영포인트 몇점 줄까?
└못해도 500점 이상일듯ㅋㅋㅋ
└크보야···어디서 뭐하냐 대체···석궁단 3개월찬게 게임도 못한다ㅠㅠㅠ
└아무리 크로스보우라도 뒤집기는 힘들긴한데···괜히 탄력받아서 쫓아오면 상황 복잡해지긴함
└네다음퇴물ㅋㅋ
└???지금까지 올오버 내내 동반자살 아니면 노데스인 애보고 퇴물ㅋㅋ솔직히 크보는 인정이지
추천수가 무려 8천 개를 넘는 게시글.
심지어 조회수는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100 단위씩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 신예지가 설명을 보탰다.
“이것뿐이 아니야. 오빠. 아발론TV쪽은 아예 크로스보우 한번 죽여 보자는 식이고, 트리키 뷰도 거의 마찬가지야.”
“트리키 뷰도?”
트리키 뷰에는 그래도 친분을 쌓은 동료들이 많은데.
잠자코 듣던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오빠. 인게임에서 업적이나 계급이 높을수록···죽였을 때 진영포인트를 많이 준대.”
“네임드 처치 보상 같은 거임. 크크. 무림공적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니깐요.”
“얼마 전에 프로선수 하나가 잡혀죽었는데 500점이나 가져가더라구.”
“오호라.”
그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감탄성을 냈다.
크로스보우라는 방송인. 죽였을 때, 필시 높은 진영포인트를 줄 인물.
그 포지션이 일종의 황금고블린 같이 여겨진다는거군.
“···오빠. 이거 지금은 밈이지만 잘못하면···큰일···이야. 욕먹기 딱 좋은 포지션···.”
신예지는 조금 답답한 듯 말을 이었다.
“상관없어.”
“아니 상관없을 리가···오빠?”
그러나 다음 순간.
크로스보우의 얼굴을 확인한 신예지.
“···.”
그녀는 말을 잊고 말았다.
“하하. 이거 참.”
그렇게 말하는 크로스보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공공의 적. 모두가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상황.
거기서 오랜만에, 의욕을 느꼈던 것이다.
“···진짜.”
“···크보 님.”
그 표정에 두 명의 얼굴이 잠시 아득해지고.
재밌어 보이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크로스보우는, 지체 않고 캡슐에 다가갔다.
“···.”
“···사진 찍을걸. 왜 섹시하지···.”
채은아의 중얼거림만이 방에 남았다.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두문불출 기간을 마치고.
꾸욱.
풀다이브.
[SYSTEM]환영합니다. 크로스보우님!
이벤트 종료까지 3일.
1등 진영과의 격차, 3배 차이.
전설을 써 나가는 게이머, 크로스보우가 올오버에 복귀했다.
오리지날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잠시 미뤄둔 채.115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