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가상현실의 아이콘 (2)“이건 그냥 폐허 수준….”
단서라가 중얼거렸다.
어제, 크로스보우를 본의 아니게 놓아 준 방송인.
그녀는 방송을 마치고 잠시 도시를 살펴보고 있었다.
방송 중엔 자꾸만 말더듬이가 되다 보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룰러’라는, 점수를 많이 주는 역할까지 떠안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조심하려는 셈이었다.
여전히 도시는 대난투의 한중간이었다.
크로스보우가 첫날에는 인간족 쪽의 도시를, 둘째날에는 이종족 쪽 도시를 꽤 많이 박살내버린 탓에 중앙 분수대를 끼고 유지되던 긴장상태가 터져 버린 것이다.
“…싸움 소리. 비명 소리.”
배틀로얄 모드라도 들어온 것 같은 기분.
그때였다.
─죽어라아아앗!
─비, 비겁한 놈!! 끄엑!
콰가가각!
돌연 그녀의 옆으로, 스키드 마크를 남기듯 바닥을 긁으며 날아가는 유저가 한 명.
“비겁하긴. 임마. 배틀로얄에서 비겁이 어딨어?”
“너, 넌 뒤졌다…이따 보자….”
“이때봬쟤~크크. 해 보던가!”
“개같은…이종족 놈…으윽.”
“….”
코웃음을 치고 사라져 가는 유저.
갔나?
어느새 벽 뒤에 바짝 붙어 숨어 있던 단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컨셉으로 시작한 진영 경쟁.
감정 싸움이 어쩐지, 생각보다 깊은 것 같다.
“…저계급들은 힘들겠다…아닌가…오히려…?”
오히려 친구들과 함깨 기습을 하거나…진영 경쟁에 함께하면 더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낼 고계급도 기습과 함께라면 킬을 올릴 수 있을 터이니.
그러나 함께하는 동료가 없는 단서라의 입장에서. 이곳의 치안은 그야말로 최하. 이곳에서 10분만 걸으면, 한국의 밤거리가 얼마나 안전한지 알 수 있을 정도.
길을 걷는 인간이 누구건 습격당한다. 현실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은 전혀 상관없다. 대기업 관계자도, 어쩌면 국회의원도 이곳에서는 습격당하는 유저 1에 불과하다.
그게 올오버의 매력이겠지.
게임사 역시 그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보통의 게임이라면 전투에 참여하기 싫은 사람들은 사전설정을 해두면 공격할 수 없는 룰 같은 것을 만들어 줬을 법하지만…올오버는 그렇지 않았던 것.
고작해야 비무장 호텔을 하나 운영하고 있을 뿐. 그마저도 규모가 너무 작아 사람들을 많이 수용할 수가 없다.
“세기말이네.”
게임이 광기에 물들어 가니 유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커플들 사이에는 무슨 전쟁로맨스 영화마냥 상황극을 하는 것까지 유행이 되고 있는 모양.
그래. 저거처럼.
“…자기야? 자기야!!! 야, 김철수!!!! 왜, 왜…!!”
아까 쓰러진 남자에게 돌연 달려온 여성 유저.
갑자기 시트콤을 찍어댄다. 그들을 피하느라 숨은 건물 벽이, 등에 닿아 차갑다.
“난…틀렸어. 자기야. 먼저 가….”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괜찮으니까.”
“우린 애초에 사랑하면 안됐어. 넌 인간이고, 난 이종족…이럴 운명이 아니었던 거야….”
“왜…왜 그래. 자기야…그, 그런 말을…그런 말을 할 거면….”
단서라는 다시 숨을 참았다.
연기에 푹 빠진 커플.
괜히 모습을 드러내서 서로에게 뻘쭘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
“그런 말을 할 거면 점수가 되어라!!! 나약한 자식!!!”
“크악?!”
“…?!”
서라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후후…승리는 이종족의 것이야.”
“이, 이걸로 네가…행, 복…하다면.”
“당연하지. 김철수. 넌 나를 못 죽여. 왜냐면 동물학대거든! 동물학대로 청원 올려 버릴 거야!”
“뭐래…황소개구리처럼 생겨갖고…황소개구리는 유해종이야….”
“황…?! 뭐?! 야!!! 김철수!!! 야!!!”
“….”
어쩐지 한 커플의 역사적인 순간을 봐 버린 것 같다.
이럴때 방송이 켜져 있었어야 하는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벽에서 나왔다.
“…커플…재밌게…노네….”
많이 나아졌다곤 하나, 아직 대인기피증이 조금 있는 그녀.
막연히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이벤트 첫 날 마주쳤던 그 사람같은.
“…정신, 차리자.”
그녀가 자신의 뺨을 짝짝 때리던 때였다.
돌연,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위기 감지.
전신에 경종이 울리는 감각.
‘…총알?’
피융──!
“───!!!!”
눈먼 공격이라기엔 지나치게 위협적인 공격이, 볼을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어떻게든 고개를 돌려 회피에 성공한 그녀.
프로급 실력을 가졌기에 겨우 인식할 수 있었던 공격.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지지직─!!!
“플라즈마…?”
총알 궤적을 따라, 공기가 터져나간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격발음이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의 장거리 저격, 혹은 의도적으로 소리를 죽인 저격.
뭐가 되었든 대단한 실력임이 분명하다.
“…절대 방어.”
카가가각!!!
스킬까지 발동해서 어떻게든 막아 냈다.
그제야 타앙-하고 희미하게 소리가 전달되어 온다.
“…이거.”
그녀는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리 텀이…비거리가 최소 3키로…?”
이런 스킬.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의 장거리 저격.
그것이 가능한 인간은, 그녀가 알기로는 단 한 명뿐.
막상 당해 보니까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공격인지 이해했다.
방송에서 볼 때는 그냥 잘 쏘는 것처럼만 보였는데──.
그녀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보 님?”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건물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며.
***
“피했군.”
시체만이 가득한 건물.
크로스보우가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 괜찮은 실력.
스코프에 점으로 보이지만 않았다면 아마 아는 얼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만큼 훌륭한 회피.
후속타를 흘려내는 것까지 완벽한 모습.
“고계급일 거 같은데.”
가늠하건데 최소 100점은 줄 법한 실력이다.
접근해서 죽일까.
잠시 고민하던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저었다.
일견 괜찮아 보이는 생각이지만, 저기까지 가는데에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 보면 수지타산이 맞질 않는다.
여기에서 계속 저격을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겠지.
게다가, 상대가 고계급이라면 저격수를 확인한 순간 이쪽을 향해 올 것이 자명한 사실.
배틀로얄의 기본이었다.
“다음. 간다.”
서둘러야 했다.
킬을 시작하면 자신이 다시 올오버에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퍼져나가는 건 시간 문제.
목표는 그 전에 최대한 많은 킬을 하는 것.
“…집중.”
이 정도 거리는 아무리 크로스보우라고 해도 거의 시도해 보지 않았던 거리.
대상과 무려 3키로 정도 떨어져 있는 상태다.
저격수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만으로도, 명중률이 떨어질 것은 필연.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는 감각으로.’
눈을 감았다.
크로스보우는 온갖 기운을 몸 주변으로 돌려, 퍼뜨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이 근방을 모두 감각에 넣는 것
어제 실전을 통해 회색 시야의 발전형을 발동하는 데에 능숙해지고 난 후부터 좀 더 쉽게 가능해진 테크닉.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더 발전한 모습이었다.
보는 사람들에겐 그저 ‘괴물’ 수준이라고만 인식되는 크로스보우.
너무 높은 건물은 지상에서 보기에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없는 것처럼, 크로스보우가 그랬다.
…실력이 는다고 해도 알아볼 사람이 없다.
‘생각은 나중.’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을 인식에 담는 데에 집중한다.
철컥-.
저격총의 볼트를 잡아당겼다.
[녹화 중입니다….]
카메라가 돌아간다. 방송 중이 아니라고 해서, 이런 귀한 영상감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던 노릇.
“안녕하세요. 아이튜브 시청자 여러분.”
그는 적당한 멘트를 치며 스코프에 눈을 갖다댔다.
“오늘은 사격장 체험 브이로그를 하러 왔어요.”
마침 늦은 시간에도 오픈하는 사격장이 있더라구요.
크로스보우는 그렇게 말하며 빙굿, 웃었다.
스코프를 대고 있는 눈 아래로 보이는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모습.
“자. 체험해 보겠습니다.”
무차별 폭격 스탠바이.
타아앙──!!
커다란 총성이 폐건물을 울렸다.
***
그 시각 잠시 전투 소강 상태.
두 인영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그랬지. 크보 없는 마족은 그냥 잡졸 수준 아니냐고.”
“하하. 그래서?”
“뭘 그래서야. 거기서만 거의 50점 빨았을걸. 마족 애들 영 못하긴 하더…?”
그때였다.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간에 구멍이 뚫리는 소리.
“…어?”
“이, 이봐. 너….”
그게 끝이었다.
소리와 함께 의기양양했던 표정이 사라졌다.
죽은 것이다.
돌연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가 쓰러지는 경험.
그것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있어, 생각보다 더 공포스러운 광경.
“히이익…! 뭐야!!”
허둥대는 거대 곰. 이종족의 모습을 하고 있던 유저는 팔을 휘저었다.
“저, 저격…?”
어디서?
주변은 모두 이종족 측 유저들이 정리하지 않았던가. 사실상 이쪽은 이종족 진영의 영토일 터인데…!
“엄페. 엄폐!!”
생각은 나중이다.
서둘러 쓸 만한 엄폐물을 찾는 유저.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피융-.
“헉…?!”
볼을 스쳐 지나간 탄환.
적중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당황을 가속시킨다.
곰 형상의 유저는 총알이 박힌 땅을 바라보았다. 모양을 통해 저격수의 위치를 찾으려는 것.
그런데 그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탄흔이 왜 붉은색…?”
…잠깐.
이런 이펙트.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던가?
어디서였더라.
떠올리는 것도 잠시.
그는 데쟈뷰를 겪는 인간처럼 멍하니 동작을 멈췄다.
“……크로스보우?”
그 순간.
붉은 탄흔이 부풀어오른다.
──퍼어어어엉!!!!
폭발.
크로스보우. 다섯 글자.
그것이 유언이었다.
비슷한 사태가 도시 곳곳에서 이어졌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저격에 고계급이고 저계급이고 가릴 것 없이 머리가 터져나가기가 벌써 수십 번.
“젠장. 젠장. 대체 어딨는 거야!”
“크로스보우. 또 너냐…개같은 거….”
“야!! 머리 집어넣어!!!!”
“맞춰 보든가~ 우헤─크억?!”
그렇게 한참.
“탄이 없군.”
방송을 종료하기 전에 만들어뒀던 탄이 모두 소모되었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엎드려쏴 자세를 풀고는 일어난 크로스보우.
그는 총열을 살펴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그는 돌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움직임이 다~ 예상이 됩니다. 예상이~.”
“역시…대단, 하네요…….”
못 알아듣네.
드립을 쳤던 크로스보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 어제도 봤어요….”
“아뇨. 단둘은 오랜만이라.”
“…!!”
그 말에 얼굴을 붉힌 것도 잠시.
이내 뭔가를 깨닫곤 긴장하는 단서라.
“…역시…감지한…거죠…어떻게…?”
그들이 서있는 곳은 6층 건물의 옥상.
눈앞의 남자는,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 이 공간에 단서라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스스로가 오버로드급 실력자기에 어렴풋이 닿은 추측.
“노오력을 하면 다 느껴집니다.”
“네이션스…컵 때도 느꼈는데…그거, 거의 ESP…..”
“그런 말 몇 번 들어보긴 했습니다.”
큰일났다. 또다시 더듬기 시작했어.
단서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꾸욱 누르며 말을 이었다.
“서라 씨도 해 보면 가능합니다. 알려드릴까요?”
“…1대1 과외…환영….”
정말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서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물론, 크로스보우가 보기엔 살짝 끄덕인 것이 전부였지만.
“좋습니다. 합방한 지도 오래됐으니…그래서 과외 선생님이 될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저격당한 사람이 저격수의 위치를 찾아왔다.
뻔한 이유다.
“…선생님. 되기 전에…승부!”
단서라. 몇 안 되는 고계급의 여성유저.
게임에서 경쟁하는 것에 의욕이 없었다면 무려 오버로드라는, 최고계급을 찍었을 리 없다.
그녀는 내심 동료들이 모두 크로스보우에게 패배하는 것을 보며 언젠가는 한번 붙어 보고 싶단 생각을 품어 왔던 것이다.
설령 그 대전에, 처참한 패배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게이머로서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녀는 드물게도, 쌍검을 꺼내들었다.
“쌍검이라. 드문데요.”
“…스킬. 절대 방어. 그리고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주기술. 받은 피해를 증폭해 돌려줌…패시브…체력이 깎일수록 이동속도 대폭 증가…궁극기 블링크. 이해…했나요….”
“오호라.”
크로스보우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공격일변도처럼 보이면서 방어 쪽 특화 스킬이 있군요. 그거, 허를 찌르는 캐릭터 구성일 텐데 굳이 말씀하신 이유는?”
“…나는…크보 님 스킬, 전부 숙지…이대로는 불공평….”
“…?”
뭐지.
이기는 게 장땡 아니던가.
크로스보우에겐 조금 생소한 방식의 자기 소개.
그러나 캐릭터 개편 이후, 1대1 모드를 주력으로 삼는 유저들 사이에선 이미 전통처럼 자리 잡은 문화였다.
“가요…!”
“그런 마인드는 싫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서라 님과 싸워 보는 건 처음이었죠.”
그는 씨익 웃었다.
“살살 해드리겠습니다. 동료였던 정이 있으니까요.”
“…화전양면전술…안 속음…!”
“…녹화 중입니다. 논란이 될 발언은 안돼요.”
“네이션스 컵…일본 여성게이머…벌집 만드는 거…다 봄….”
“쿨럭.”
본래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유쾌함.
말투가 저렇게 변하기 전…그러니까 허이크에게 당하기 전의 성격이겠지.
사실, 더 이상 그런 사소한 것은 아무래도 좋다.
크로스보우는 웃으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단서라. 점령전과 1대1모드의 오버로드. 명실상부한 최상위권 실력자.
적대 행위 패치 이후, 그랜드 마스터 계급과는 여러 번 붙어 봤지만 오버로드와는 처음이다.
최고 계급이면 몇 점 줄까.
기대가 잔뜩 차올랐다.12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