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막간 (4)“그러니까…그래. 음…이런 식으로라도, 버티면 좋은 거지. 힘들었겠다.”
“……부탁이니까 말하지 말아 줄래?”
“아니. 그 왜.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건물의 1층에 즐비하던 이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이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을 데려다가 조작시킨 것도, 뭔가 꺼림칙한 수단을 쓴 것도 아닌…정말 NPC.
정확히는 모두가 ‘오리지날’이었다.
그렇게 많은 NPC들을, 직접 의식을 파편화하여 조종했던 것.
그러니까 즉.
“1인2역…혼자하는 소꿉놀이 같은 건가. 스케일도 크군.”
“제발닥쳐줘제발닥쳐줘제발닥쳐줘….”
몰랐는데, 오리지날의 성별은 여성이었던 모양.
크로스보우는 그간 가져왔던 의문-인간의 정신으로 어찌 수십만 번의 회귀를 버텨 왔는가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린 기분이 되었다.
“동료들이 뭐라고 안 하던가?”
“…걔들은 모르거든? 그냥 권능으로 움직이는 줄 알지…. 감지력이 뛰어나다곤 생각했지만 이런 사생활까지 감지해도 되는 거야?”
“아. 미안.”
순순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크로스보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리지날이 잘생긴 NPC들로 뭘하건,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따위의 일은 없다. 그렇다면야 취미생활로 존중받아 마땅한 것.
그녀의 흑백을 가리기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사생활을 들춰본 것 역시 사실이었다.
사과할 필요가 있다.
“함부로 엿본 점. 사과할게.”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줄래?”
컨셉이 오락가락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
크로스보우는 그 모습에, 이 지리멸렬한 대화를 빠르게 마치기로 결정했다.
“이야기를 돌리지. 무슨 일로 불렀지?”
“…바라던 바야. 부른 이유는 간단해. 네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리고 그때 알려 주지 못한 것들을 알려 주기 위해서.”
“글쎄. 앞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21세기가 시작되고 끊임없이 발전해 온 오락. 재밌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시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말은.”
그것들을 전부 무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린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 확답은 아니지만. 일단은 협력한단 거다.”
“…그렇구나.”
겉으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오리지날.
그러나 크로스보우는 그녀의 잔뜩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가 축 늘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물론 그가 그러한 갭을 입에 담는 일은 없었지만.
“…좋아. 완벽해. 크로스보우. 정말이지. 완벽해.”
“오늘 같은 모습을 자꾸 보다 보면 조금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그, 건…! 아니. 후우. 흥분했네. 미안하구나. 말을 조금 삼가 주렴.”
그 후는 간단했다.
***
결국, 그 만남에서 얻은 것은 별 건 아니지만 대단한 것이었다.
‘…이걸 준다고?’
‘널 믿는다는 소리야. 한 명이 더 늘어난다고 해서, 뭐가 바뀌진 않겠지. 그리고 어차피 열람할 수 없는 정보가 더 많을거니까.’
‘오호라.’
오리지날의 얼굴에서 조금 실수하나 싶은 표정이 잠깐 보였지만, 그녀가 들고 있던 걸 냉큼 뺏어온 크로스보우.
그래서 얻게 된 것이 바로 이것.
[SYSTEM]기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나중에.”
‘멸망의 기록’이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쌓인 것. 일종의 역사라 해도 좋을까.
아직은 블라인드 처리된 부분이 많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해 전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만에 하나, 종말을 막지 못했을 때도…생존하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되겠지.
“───님? 크로스보우 님!”
그리고, 다시 시간을 돌려 크로스보우의 방송.
“…아. 네.”
“갑자기 멍하시고…왜 그러세요?”
-미녀판독기?
-ㅋㅋㅋ크보가 멍때리는 건 또 첨보네
-귀여워(덜렁덜렁)
걱정스러운 표정의 세린. 뿅이라는 이름을 머리띠로 달고 있는 그녀가 크로스보우의 안색을 들여다보았다.
“아. 괜찮습니다. 잠깐 다른 생각이 나서.”
-다른생각(딴여자)
-딴여자생각(매니저)
-(차단된 채팅입니다.)
-??이왜차단
“어디까지 얘기했죠?”
“…테크닉 전파요…뿅 언니랑…저랑…비교해서…알기 쉽게….”
“아.”
그랬다.
크로스보우의 오늘 방송 모토는 바로 제자 키우기.
단적으로 말해서, 강의 방송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전국에 수많은 ‘크로스보우’들을 양산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경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최종 목표.
재능충만한 단서라와, 재능이 없는 편인 이세린.
이 두 명을 초빙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그래서 오늘 연습할 모드를 제가 준비해 왔죠.”
“…좋아요!”
“…어디…?”
-어디긴 어디야 연습모드지ㅋㅋ
-ㄹㅇㅋㅋ당연한 거 아님?
“연습모드요? 글쎄…과연 그럴까요?”
크로스보우는 빙그레 웃었다.
연습할 곳이 어디냐니.
우문이었다.
[SYSTEM]모드를 선택해 주십시오.
“오늘 플레이할 건…바로 그곳. 언제나 인기가 많았던 모드죠. 제가 처음 유명해진 모드기도 하고요.”
-ㅇ?
-???
-설마사카
-헐ㅋㅋㅋ
[SYSTEM]모드 선택 : 균열방어전
“바로, 균방전입니다.”
균열방어전.
지금 생각해 보면, 대對 종말전이라고 해도 좋겠다.
***
-???
-제자 두명 어리둥절행ㅋㅋ
-연습은 실전처럼!
-아ㅋㅋ해병대냐고ㅋㅋ
당황스러워하는 두 명의 스트리머. 그리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크로스보우.
세 명의 모습에 채팅창도 신이 났다.
“저, 저어…크보 님.”
“…균방전. 마음의 준비가…필요….”
그들이 전이된 곳은 바로 서울의 그마 하인트 호텔.
한강이 보일 정도로, 서울의 중심과 근접한 곳이었다.
-오우무냐고
-이것이 말로만 듣던 빈부격차의 오르막길인가
-ㄹㅇ균방전 중에서도 개ㅈ같은 하인트 호텔맵을 걸리네ㅋㅋ
-감각개별로네ㅋㅋ똥캐릭터
호텔의 정문.
걸어 올라가기엔 허리에 무리가 올 정도로 끔찍한 오르막길이 존재하는 장소.
신이 난 일반채팅창과 다르게, 어느새 1인칭 보기에 진입한 시청자들의 아우성이 줄을 이었다.
“연습은 실전처럼. 오늘 레슨입니다. 최고 계급을 달성할 때까지 나갈 수 없어요.”
“아니….”
“하실 수 있습니다. 균방전이 별 거 없거든요.”
“그, 그런가요? 아니, 아뇨.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실 단서라와 이세린이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균방전에 소환되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전무후무한 게임천재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크로스보우.
무려 그런 이에게 배우는 것인만큼, 방송동안 힘든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각오했던 바였던 것이다.
심지어 단서라는 이미 최고계급. 이세린도 이미 과거 ‘세기말 골드달기’에서 경험했던 적이 있었던만큼, 그들의 각오는 상당했던 것.
다만─지금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건 조금 다른 종류의 당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게…음…왜 스패츠나츠 헬멧을?”
“네? 뭐가요.”
“…아니, 그러니까요.”
크로스보우가 픽한 캐릭터가 어느새, 과거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캐릭터인 더원그 캐릭터로 변경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광택의 철가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캐릭터 ‘크로스보우’를 플레이했다간, 1인칭 보기에 진입해 있는 모두가 어지럼증을 호소할테니까.
게다가…후일을 생각하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캐릭터가 좋았다.
적어도 대처의 여지를 줘야만 한다.
-ㅋㅋㅋㅋ
-대충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뜻
-그게맏따ㅋㅋ
“요즘 구 캐릭터들 아무도 안 하지 않아요? 다들 자기 캐릭터에 애정 가져서….”
“그것도…그건데…왜…3인 모드…? 이거 5인 전용…맵인데….”
“…네, 네? 서라 님 지금 뭐라고…?”
캉─!
말이 많다.
크로스보우는 스패츠나츠 헬멧을 닫았다.
정겨운 소리가 들려오고 다음 순간.
“준비하세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SYSTEM]충격에 대비하십시오…30…29….
[SYSTEM]곧 전투가 시작됩니다!
호텔 앞 조성된 원형교차로.
끼이이이익──!!
돌연, 쌩쌩 달리던 차들이 모두 멈춰섰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그리고.
…덜컹.
덜컹─.
덜컹덜컹덜컹덜컹덜컹!!!
-왔냐?
-온다
-시작한다 쓰바
“옵니다.”
제각기 다른 복장을 입은 이들이 모두 좌석에서 내렸다.
끼이이익-.
쾅!
뒤늦게 합류하는 차들. 여기저기서 마구 발생하는 접촉사고들. 그러나 누구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호텔 앞에 펼쳐져 있는 숲에서도 인간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조, 좀비? 좀비웨이브 같은 건가요?”
“…아니, 에요….”
사정을 잘 모르는 이세린의 질문에 단서라가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도플갱어 기생체. 인간을 조종하는 괴물.”
“…네?”
“끔찍…해요….”
이세린은 그말에 전방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모두 멀쩡한 혈색.
누군가는 옷매무새를 다지고, 고개를 꺾는다. 엄마가 아이를 안아올렸다.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던 청소년이 귀에서 이어폰을 뽑는다.
일견, 아무 문제 없는 사람들.
“…자. 호텔 정문 닫습니다.”
크로스보우의 말.
다만 정문이라고 해 봤자 로비로 통하는 정문이 아니다.
차가 지나는 통로.
허술한 철문이 전부.
“아, 아니. 적어도 설명은 해 주시고…!”
“…준비…하세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갑자기 이게 무슨…!”
그 말이 방아쇠였다.
끼이이이이이이익────!!!
저 멀리 거대한 화물차가 달려오는 모습.
[SYSTEM]충격에 대비하십시오…10…9….
크로스보우는 느긋하게, 구석으로 가 차량용 바리케이트를 올라오게 하는 버튼을 눌렀다.
삐익-!!!
스으으으으….
천천히, 철기둥이 올라오는 모습.
[SYSTEM]충격에 대비하십시오!…5…4….
-긴박감무냐고
-아 여긴 할때마다 진짜
-하는건 크로스보운데 니가 왜 생색냄ㅋㅋ
-다 크보몸에서 나가!!!!
그리고 다음 순간.
[SYSTEM]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콰아아아아아아앙!!!!
“…에?”
일상은 삽시간에 비일상으로 물든다.
화물차의 전면부가, 바리케이트에 속절없이 우그러들었다. 너무 커다란 충격량에 잠시 땅이 뒤흔들린다.
그리고 동시에, 가만히 서서 그걸 보고 있던 인간들이 모두 달려들기 시작한다.
“저, 저게…?”
엄청난 속도.
기괴한 걸음걸이였다.
[SYSTEM]임무 : 방어.
[SYSTEM]사당역에서 미처 막지 못했던 도플갱어 기생체들이 군집하였습니다. 저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단 한 개체도 호텔로 진입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모두 섬멸하십시오.
[SYSTEM]제한 시간 : 2 : 00 : 00
“일단 버텨 보세요. 적당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철컥.
크로스보우가 아주 오랜만에, 돌격소총을 든 채로 말했다.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건 여러분을 사랑해 마지않는…한 명의 스트리머자,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부탁입니다. “
-ㅇ?
-???
“오늘 방송하는 이 영상. 부디 소장해 주세요. 어디든 좋습니다. 컴퓨터든, 스마트폰이든.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가족 당 한 명은.”
타아아앙──!!!
총성이 뒤를 잊는다.
“인지하고 있길 바랍니다. 이 맵을 어떻게 클리어 하는지를요.”
무기질적인 스패츠나츠 헬멧이, 화각을 바라보았다.
“부디, 부탁드립니다.”128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