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가상현실 (3)사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함은 식수와 식량이다.
미래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크로스보우는 대충 흩어봤던 멸망의 기록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식수는 물론이고, 전투 식량등의 보존식을 구비해야 한다.
‘…제대로 더 확인하고 나올 걸 그랬군.’
크로스보우는 진열대에 서서 상품을 관찰하다가 중얼거렸다.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사회가 무너지는지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던 것.
이제와서 다시 들어가 확인하자니 애로사항이 꽃폈다.
결국 오리지날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고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로그아웃 시켰던 것이다.
‘그나저나 의심을 주입하는 균열 너머의 공간이라….’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은 게 다행인가. 그마저도 제 상태에 예민한 크로스보우기에 깨달은 사실이지, 보통 인간이라면 뭐가 본래 갖고 있던 생각이었는지조차 잊고, 끝없는 의심을 반복해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거 말고, 정수 알약이란 게 있어요.”
“정수 알약?”
“네. 조그만 알약으로 되어 있는데 오염된 물에 휘휘 되는 거.”
멍하니 생수의 라벨을 확인하고 있자 다가온 채은아의 말이었다. 처음 듣는 소리다.
“잘 아네.”
“아. 부모님이 좀 관심있어 하셨어서.”
부모님?
크로스보우는 고개를 갸웃대고 말았다. 시시콜콜한 호구 조사는 딱히 하는 타입이 아니었던 터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것.
“그럼 그것도 사 놓는 게 좋겠네. 구입처는?”
“엘리에서 팔지 않을까 싶은데. 알아보죠 뭐.”
어려울 건 없었다. 셋이 모이니 어떤 물품을 모을지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많이 나눌 수 있었고, 똑똑한 그녀들이다 보니 꽤 합당한 선택지만이 내밀어졌던 것.
“대비용 배낭도 구성이 꽤….”
“일단은 공간 확보가 중요할 거 같은데. 오빠. 역시 쉘터로 쓸 만한 건물이라도 매입하는 게 어때?”
얘들은 집이 없나. 크로스보우는 잠시 생각하다 말았다.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할 나이니까. 이러니저러니해도, 둘 다 능력 있는 성인이었으니까.
“나쁘지 않군.”
크로스보우는 예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 흥미로운 취미생활처럼 여겨지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사실 크로스보우로서도 제대로 된 확신이 없었다.
누군들 그럴 터다. 멀쩡하게 돌아가는 사회. 당장 방송을 커면 2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ㅋㅋ루삥뽕 따위를 쳐대는데 종말에 대비하라니.
차라리 이걸 컨텐츠로 삼는 게….
“!!”
그러고 보면 그랬다.
신예지고 채은아고 한 번씩 카메라에 노출된 적이 있었다. 편집자 겸 매니저 역할을 해 오던 예지는 인천 공항에서, 은아는 불법 투기장 때 이미 시청자들과 인사를 나눈 상태였던 것.
‘야방(야외방송)할 기회 아닌가?’
뭣보다 꽤 그럴 듯한 집단 지성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재밌겠군.”
행동은 빨랐다.
크로스보우는 냅다 어디론가 사라져서는 고객센터에 도착했다.
방송이 가능한지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음…인터넷 방송이요? 상관은 없는데, 다른 분들이 불편…크, 크로스보우?”
“아. 맞습니다.”
“대박. 대박!! 어떡해. 영기 엄마. 이리 와 봐. 크로스보우래!!!”
“…저기…?”
왜 아줌마들까지 알고 있는 거지. 크로스보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치솟은 제 인지도에 떨떠름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외출 때마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에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걸까.
크로스보우는 더 큰 소란을 모으기 전에, 서둘러 확답을 받고 마트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게임이 아닌, 다른 컨텐츠라.
이건 이것대로 즐겁겠다.
싱글벙글하는 미소를 단 채로 크로스보우가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방송용 초소형 드론 같은 것은 없지만, 어쩌면 예지가 가지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런 쪽의 준비성은 철저하니까.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채로, 트리키 뷰 앱에 접속했다.
***
“이런 개 같은 거!!”
쾅!
스펙테이터는, 수많은 회귀동안 겪어 본 적 없던 일에 책상을 내리쳤다.
“…아무도 없다고? 정말로?”
캘리포니아 주를 절찬리에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괴물.
거대한 거미를 닮은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자격의 방 멤버가 거주하는 장소로 왔지만 허탕이었던 것이다.
“다 어디로 간 거야.”
아니. 이건 허탕이라기보단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신경질이 나는 것을 참으며 잠시 이웃에게 물어보자 바로 며칠 전에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사라졌다는 모양.
“오드맨도 그렇고…이거, 연관되어 있나. 설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정답에 도달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쩐다….”
오리지날 쪽도 연락이 안되고, 오드맨도 마찬가지. 선배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지원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점찍어 놨던 멤버들까지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상황.
시간선을 넘어오면서 간신히 갖고 온 각성구가 있으면 뭐하나.
빌려 줄 사람이 없는데.
“…혼자 하라고? 저걸?”
그녀는 시내의 무기점 앞에 주저앉아 흘러나오는 방송을 바라보았다.
“망했다. 진짜.”
도로를 박살내며 도망가던 저것은, 쫓아오는 경찰차를 모두 박살내 버리고 있었다.
박살내는 것뿐만이 아니다. 마치 뭔가를 갈구하는 듯 사람들을 마치, 꼬챙이로 집어들듯 꿰뚫어 확인하고 있었다.
[경찰당국은 군대와 협조를…허억!? 무, 무슨 일이야!]
“저거…아코. 저런.”
방송용 헬기 역시 멀쩡할 리 없었다. 괴생명체는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반파된 차량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던 것.
조종사의 기예에 가까운 회피기동으로 헬기는 멀쩡했지만…그런 송출이 현장을 전부 더욱 끔찍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어쩔 수 없네. 며칠쯤 앓겠지만….”
스펙테이터. 회귀한 쪽의 채은아는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관찰자라는 이명과 어울리게 그녀의 각성능력은 도주와 이동, 소환 계열의 능력에 몰빵되어 있다.
아직 멸망의 게임이 등장하기 전이지만, 그래도 단 한 번의 장거리 소환은 가능할 터다.
‘자…어쩐다.’
그것은 마치 스킬의 발동.
그녀는 집중상태에서 어떤 것을 어디로 이동시킬지 결정하는 맵을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 한 번의 발동으로 그녀는 꽤 심각한 격통에 시달릴 터다. 확실한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 한다.
‘…저 괴물을 태평양 한가운데로 떨어뜨린다…는 불가능해. 마주보고 있어도 불가능할 거야. 그렇다면….’
역시 처음에 생각한 대로 조력자를 하나 불러서, ‘각성구’로 강제로 싸우게끔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굴….’
문제는 이것이었다.
당장 자격의 방 멤버들은 소환할 수 없다. 피시전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는데, 멤버들의 위치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
“크읏…!”
‘벌써…!’
반동이 심하다. 준비되지 않은 스킬의 발동은 당장이라도 꺼져 버릴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급박한 순간.
그녀가 떠올린 이름은 그녀로서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크로스보우.’
위치를 특정할 수 있으며, 전력에 도움이 될 만한 인간!
길다면 긴 관찰로 보아하건데, 적어도 해롭지는 않은 인성을 갖고 있는 사람.
우우우웅──.
‘자, 잠깐!’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분명 이 시간에도 집에 박혀 있겠거니 해서 좌표를 지정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
갖고 있던 마력이 급속도로 빨려들어간다.
“…쿨럭!”
스킬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
은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합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 와아아아앗!!!!”
파앗-.
심상치 않은 흰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크로스보우는 영문 모를 얼굴로 스펙테이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에 회귀-은아가 내적 쾌재를 부르기도 전에.
“이…뭔.”
크로스보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악성 저격충들을 상대할 때나 보여 주는 표정.
방송을 방해받은 탓이었다.
“…쿨럭.”
채은아는, 그 표정에서 한 번 기가 죽고….
우웅─.
크로스보우의 몸 주변을 돌고 있는 드론에 한 번 더 어처구니가 없어져, 허탈하게 웃었다.
“…쥬지됐네. 진짜.”
스킬의 반동이 찾아온다.
***
이게 꿈이야 생시야.
크로스보우는 아찔한 기분에 머리를 짚었다.
-뭐임?뭐임?뭐임?
-아ㅋㅋ개꿀잼 몰카 무냐고
-머임ㅋㅋ1인칭 보기 안되는데 이거 현실이냐?
-여긴어디야 똥믈리에 자식아
분명히 싱글벙글대며 마트에서 방송을 켰는데…킨 직후, 빛이 나온다 싶더니 영문 모를 곳에 도착해 있었다.
“커헉. 아, 안녕…크로스보우.”
거기에 어색하게 웃는 표정의 유니폼. 채은아와 똑 닮은 모습이지만, 그녀보단 나이가 먹은 표정. 그리고 얼굴.
지금의 은아는 덜 자란 거였구나. 크로스보우는 문득 드는 쓸데없는 감상에 머리를 털곤 입을 열었다.
-??매니저아님??
-눈나 거기서 뭐해!!!
-극한의 포상충 드디어 드러누워
-악질자세 구아아악
“…뭡니까. 갑자기.”
방송할 생각에 신이 났던 텐션이 확, 죽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째 영 이국적인 풍경.
그뿐만이 아니다.
‘…정수?’
그녀의 가슴께에서 뭔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젠 현실에서도 익숙해진 공감각이 문득 발동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정체는, 올오버를 플레이하면 흔하진 않아도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에너지.
일전, 블래드가 사용했던 꼼수의 원천인 ‘정수’다.
게다가….
‘눈이 부시군.’
아랫쪽엔 황금빛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굴러다닌다. 크로스보우는 거기서 뿜어져나오는 빛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채은아-늙은 버전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그게…어…음….”
어색한 듯 볼을 긁는 그녀의 모습.
바로 그때였다.
[…상황은 점점 끔찍해져 가고 있습니다. 정부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끄아아악!! 노우! 플리즈 노우! 커윽…으아악!]
치이이익….
정적을 갈라 놓는 가게의 방송. 이내 방송 사고를 알리는 화면이 떠올랐다.
-오우;;
-저게 머야;;
-소리 살벌한 거 보소ㄷㄷ
-설마 여기
-킹리적 갓심on
-이딴걸로 몰카하는건 아니지 크보야? 믿는다
‘…미국이었군.’
크로스보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눈앞에 있는 것은 널브러진 올오버 직원.
아마 채은아의 회귀버전이겠지.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찬란한 황금빛의 구체.
“…혹시나 해서 묻는데.”
크로스보우는 강력한 직관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이런 느낌이 들 때는 정답인데.
이번만은 오답이길 빌며 물었다.
“뭔가 도와달란 건 아니죠?”
‘하, 하하…하하….’
대답없이 웃는 모습.
크로스보우는 허허 웃고 말았다.
“이,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드립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잖습니까.”
일단은 상황 해결이 먼저인가.
크로스보우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다.
“말이나 먼저 들어봅시다.”136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