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 몸 등장 (2)***
크로스보우가 떠올린 것은 간단한 아이디어였다.
‘공공연연한 비밀로 만들면 된다.’
떠올린 것은 어느 유명인물.
지금도 활동 중인 어느 래퍼가 있다.
‘우광’.
우울한 광대라는 랩네임으로 불리는 그에겐─ 우광 말고도 또다른 정체가 존재한다.
빨간색 붕대를 얼굴에 휘감고, 우광과 자신은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머미손’.
같은 목소리. 같은 발음을 가진 우광과 머미손.
당연히 사람들은 두 인물이 동일한 이임을 알고 있지만…그것을 굳이 언급하진 않는 것이다.
하나의 밈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 크로스보우…?”
그가 하려는 방법도 같았다.
아무리봐도 크로스보우지만, 본인이 아니라니까 의심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구도로 만들려는 것.
크로스보우면서 크로스보우가 아닌 그 정체성은─돌연 그가 미국을 구해 내더라도 꼬투리는 없이, 칭송만 들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거 괜찮은 거 맞지?”
물론, 이 모든 것은 그가 ‘성공할 경우’에나 가능한 일.
채은아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걸 느끼며 몸을 떨었다.
‘…….’
오리지날의 조력자이자 관찰자로서 수많은 회귀를 거쳐 온 스펙테이터-채은아는 지금까지 각성구를 얻은 인간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리고, 그런 경험으로 말하건데.
‘…말도 안 돼.’
수만 번의 세계에서.
그 어떤 누구도, 이런 현상을 보여 준 적 없었다.
크로스보우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
그것은 차라리 [폭풍]이었다.
───!!
다원多元 에너지.
올오버에선 기반 에너지라 불리는 것이 거리를 찢어 놓고 있었다.
‘…미친, 거 아냐…?’
각성구.
그 효과는 사실, 올오버와 상당부분 비슷한 면이 존재한다.
좋은 캐릭터가 먹으면 상당한 스펙업을 노릴 수 있지만…더 원 그라운드 같은 똥 캐릭터가 획득하게 되면, 이게 정말 좋은 건지도 모를 수준의 아이템이나 뱉는다는 점.
즉, 개개인의 잠재능력에 따라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그러니까 이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상황은….
“괴물.”
크로스보우가 가진 재능이 전무후무한 수준이라는 반증이다.
으득.
그러나 오히려 채은아는 이를 악물었다.
일견 좋아 보이는 상황.
하지만 효과가 격렬한 만큼, 삐끗하면 크로스보우의 목숨이 위험하다.
이 에너지 폭풍의 반경에 들어와 있는 자신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갈가리 찢겨죽을지도 모른다. 저 남자와 함께 육편으로 변해, 머나먼 미국 땅에 흩뿌려지고 말 터다.
그러면, 더 이상의 회귀는 없다.
잘못하면 그냥 개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자신도, 크로스보우도.
‘…어차피. 어차피 전부 바뀌었어.’
그러나 그녀는 몸을 빼지 않았다.
‘이게 멋대로 소환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입안에서 철분 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이 터져나가는 것도 모른 채 눈을 부릅떴다.
‘제발. 제발 언제나처럼. 크로스보우.’
“….”
그녀의 간절함이 닿은 것일까.
다음 순간.
폭풍이 멎어 간다.
자욱하게 솟아올랐던 먼지가 가라앉고, 휘몰아치던 총천연색의 기류가 잠잠해졌다.
뚜벅뚜벅.
사람 그림자가 하나 걸어 나온다.
“한결 낫군.”
“…!!”
크로스보우가 씨익 웃었다.
채은아는 그 순간, 그제야 오리지날이 그에게 집착해 온 이유를 깨달았다.
“…왜, 이제 나타난 거야.”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
스펙터의 감격에 크로스보우가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물어보셨죠? 방송 쪽은 어떻게 하려고 하냐고.”
“어…응.”
“간단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가상의 인물을 하나 만들겠습니다.”
“?”
손바닥을 내미는 모습.
“스타킹 좀 벗어 주세요.”
“…어?”
“그 모자도 좀 주시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무릎을 끌어안은 은아. 그 동작을 팔에 달고 있는 기계를 가리는 것으로 착각한 걸까. 크로스보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완력보조기는 필요 없습니다.”
“어…음….”
“빨리 좀 벗어 주세요. 아니면 제가 벗겨드릴까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녀는 어쩐지 이번 세계에서의 자기자신에게 미안해지는 감정과 함께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뭐하려고…?”
“쓸 데가 있습니다. 빨리 주세요. 사람들 다 죽겠다.”
“아니. 그, 그럼 새 거 찾아올게!!”
찾을 시간 같은 건 없다. 이런 곳에 스타킹 따위를 팔 만한 곳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채은아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크로스보우는 이미 그녀의 신발을 벗기고 있었다.
“흐익?! 내 신발. 아니, 그보다 언제….”
“가만히 계십쇼.”
신발이 없으면 그 뒤는 쉽다. 이런 걸 보고 오버니삭스라고 하던가.
막으려는 손을 대충 치우고, 뱀허물처럼 스타킹을 벗겨 버리며 크로스보우가 한 생각이었다.
“저, 저기! 좀 천천히…!”
“머리가 썩으셨군요. 저한테 그쪽은 할머닌데.”
“…뭐?”
“농담입니다. 이상한 상상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곤, 망설임 없이 스타킹을 뒤집어썼다.
“복면으로 쓸 거니까요. 제 이름은 이제 정의의 스타킹맨입니다.”
“….”
그게 이상한 거 아니야?
수만 번의 회귀에도 처음 겪어보는 기상천외한 일에, 채은아는 비명을 지를까 잠시 고민했다.
***
“──!! ───!!!”
“─! ──!!!!!”
아릿하게, 귀가 저린다.
알 수 없는 소리가 진동이 되어서 고막을 찢는다. 싸구려 보청기를 끼고 있는 듯한 감각.
온몸이 불에 덴 것 같았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뜨거운 증기를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아파. 왜 이렇게 아프지.
“그, 으으으….”
기괴한 신음소리가 그것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한때는 투기장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이. 붉은 검신은 피눈물을 흘리며, 제 주변을 바라보았다.
“지원이 더 필요하다!! 지금 당장!! 이대로라면 저 괴물이 도심가로…!”
-“막아! 어떻게든 막으라고!”
“이런 젠장! 퍽 유!”
눈부셔. 실명이라도 해 버릴 것 같은, 강렬한 태양빛.
모든 감각이 멋대로 증폭되어서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다.
존재하는 게 고통이었다. 온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
불쾌함.
“아, 파….”
붉은 검신은 뜨끔하게 시린 빛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인간들을 발견했다. 시야가 너무 빨리 점멸하는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어.
“그, 아악….”
그리고 이내, 흐릿한 시야에 참혹한 광경이 마치 오래된 필름영상처럼 비친다. 오랫동안 도플갱어가 쌓아온 괴물인자가, 기억을 역류시킨다.
부서진 도로. 흩뿌려진 시체.
마치 케이크에 뿌려 놓은 초코가루 같다.
그 광경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붉은 검신은 으흐흐 하고 웃어 버렸다.
“시끄…러워….”
우웅-
내부에 주입된 무언가가 그녀의 살기에 반응한다.
아주 익숙한 것.
오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팔만으로 어떻게든 기어서, 기어서…나아간다.
제 팔이 몇 개인지도 모른 채…단지 기어나가고 있다, 그런 인식뿐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타는 듯한 고통을 사라지게 해 줄 무언가가 이 근처에 있다.
모든 에너지가 총집합되어 있는 각성구.
본능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던 것.
지금껏 마치, 포위에서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의 행동은…사실 각성구를 가진 채은아를 향해 가는 생존본능의 일종.
그녀는 마약을 찾는 중독자처럼, 각성구가 자신을 낫게 해 줄 거라 믿었다.
괴물로 변한 붉은 검신은, 날아드는 총탄을 모두 무시하며…또다시 나아갔다.
콰아앙!!
“캡틴! 헤, 헬기가!”
“빌어먹을. 보도헬기들 전부 물리라고 했잖아!”
“도움 안 되는 연방경찰 놈들…!”
헬기가 박살나며 생방송이 끊겨 버린다.
명백한 방송사고.
미국 전역이 이를 보고 있었다.
‘빨리, 빨리….’
그러나 괴물로 화해 버린 붉은 검신에게 있어, 그런 것따윈 상관할 리 없는 것.
그녀는 엄청나게 커진 폭풍과도 같은 기운의 흐름에, 여섯 개의 발을 서둘렀다.
***
에이미는 언론사 CMN의 리포터로서 살아온 나날 중, 오늘이 가장 끔찍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캘리포니아 주에 돌연 나타난 괴생명체를 보도하던 와중 헬기째로 추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위험하다고 말릴 때 들을걸.’
실패하면 그때 후회하면 될 일.
그녀 인생의 모토였다.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던 이 당당한 기자는 지금 자신이 생의 위기와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아파라….”
애초에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동승했던 조종사가 피떡이 되어 버린 걸로 봤을 때, 아주아주 운이 좋았다고밖엔 설명할 방법이 없을 수준.
게다가 살아 있다고 해서 멀쩡하다는 뜻은 아니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쩌면 내장이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
‘그래도 카메라는 지켰어.’
메인카메라는 박살이 나 버렸지만 그녀 개인적으로 갖고 다니는 카메라는 멀쩡하다.
그렇다면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하나.
그녀는 필사적인 힘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CMN 리포터 에이미. 헬기에서 추락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영상을, 쿨럭, 남긴다.”
렌즈에 비치는 것은, 주경찰의 병력과 맞서고 있는 괴물체의 형상.
“오마이갓…끔찍하다. 어느 연구소에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2020년이 물리적인 방법으로 되풀이되진 않길 바란…커헉. 쿨럭, 쿨럭….”
진짜 곧 죽겠네.
그녀는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벌벌 손을 떨었다.
“주방위군이 도착하면…이 사태가 멎겠지. 그리고 아마, 내 심장도 멎을 것이다. 희생당한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위로의 말을….”
그러던 때였다.
바스락.
“…응?”
문득 화면 상에 누군가의 다리 같은 것이 잡혔다.
간신히 눈을 돌려 확인할 수 있는 것은…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자.
“괜찮으십니까?”
침침한 눈으로 자세히 보면─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모습.
어째선지 위에 있는 여자는…스타킹을 한쪽 다리에만 신고 있다.
에이미는 수치스러워 하는 여자의 표정은 확인하지 못한 채 물었다.
“누, 누구…?”
“상처가 심하군요. 그래도 치명적인 수준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에이미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가볍게 들어 올렸다.
훈련받은 도수운반법. 아플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어쩌면 군대와 관련된 인물일까…?
뚜벅뚜벅 걸어나간 남자.
라인 가장 바깥을 지키던 경찰에게 그녀를 인계한다.
“응? 이봐! 민간인은 어서 여길 벗어나! 위험…!”
“괜찮습니다.”
모두가 혼란한 가운데, 복면을 쓴 남자를 향한 곤란한 표정들이 보였다.
오가는 외침 속에서 제대로 물을 수 있었던 것은 이름뿐이었다.
“이름…이름을 알려 주세요!”
“이름?”
잠시 정적.
그리고 이내 돌아온 대답.
“정의의 스타킹맨?”
“무…what?”
피식 웃곤 어깨를 으쓱여 보인 남자.
넓은 등이 작은 카메라에 가득 담긴다.
달려 나간 남자의 군용단검이 괴생명체의 다리를 단칼에 잘라냈다.138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