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로 (2)
“···네?”
왕호는 슬픔이 가득 담긴 눈망울로 형사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 같은 사슴 눈이었다.
‘헉!’
형사는 그 비통한 눈을 제대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가슴 한편이 저며오는 것 같았다.
“허··· 많이 속상하시겠습니다. 방금 전화드린 김갑수 형사입니다.”
김 형사가 왕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려는 의도가 아닌, 주저앉아있는 왕호를 일으켜 세우려는 손길이다.
왕호도 그걸 느끼고는, 김 형사의 손을 잡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탈탈-
왕호가 엉덩이에 묻은 이물질을 털어내자, 김 형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일단은, 방화로 추정됩니다.”
“방화요?”
“예. 근처에 있던 시민이 영상까지 찍어서 신고했거든요. 지금 저희가 주변을 탐색 중입니다. 인상착의가 제대로 나왔으니, 아마 금방 잡힐 겁니다.”
하아-
왕호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체한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누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단 말인가!
퍽-! 퍽-!
왕호가 애꿎은 돌멩이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격분하는 왕호의 귀로, 김 형사의 벨 소리가 들려왔다.
따르르릉-
“어, 강 형사. 뭐? 잡혔어? 알았어, 금방 갈게.”
잡혔다는 말에, 왕호의 고개가 김 형사를 향한다.
“사장님! 방화범 잡혔답니다. 지금 송파서에 있으니까, 저랑 같이 가시죠.”
“하, ···네.”
왕호는 잠옷 바람 그대로, 경찰차에 탑승했다.
범인이 잡혔다니, 그래도 다행이다. 일단은 물어볼 수는 있지 않나. 왜 그랬는지 말이다.
왕호는 “그냥.”이라는 말만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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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 도착하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왕호도 아는 얼굴이었다.
2주 전, 머리카락으로 진상을 부리던 그 중년 커플이었다.
“허! 아주머니 저번에 가게에 오셨던 분이네요?”
왕호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두 사람을 취조하고 있던 강 형사가 물었다.
“예, 저희 가게에서 소란 피웠던 사람들입니다.”
“음, 그렇다면 이거 계획범죄겠네요. 이봐요 두 분! 술 먹고 우발적으로 그랬다면서요? 이거 완전 보복성이 짙은데? 일부러 씨씨티비 없는 곳으로 돌아갔죠? 범행 도구도 우리가 금방 찾을 테니까, 괜히 발뺌할 생각 말고 그냥 자백하죠?”
쾅쾅-
강 형사는 서류철로 책상을 내리치며, 방화범들을 쏘아붙였다.
강압적인 취조에 열이 받았는지, 갑자기 아주머니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욧!!! 술 먹고 나도 모르게 그랬다니까? 심신미약 몰라요? 심신미약?! 그리고 나도 세금 내는 시민인데,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거야? 경찰들은 대한민국 공무원 아니야? 니들 월급 누가 주는데? 내가 주잖아! 내가 누군지 알면, 니들 이럴 수 있을 거 같애?”
“아주머니가 누군데요? 뭐, 청장님 와이프라도 되시나? 청장님 어머니가 오셔도 저는 안 봐줍니다.”
강 형사도 한 따까리 하는 성격이었다.
“나 노점상 협회 협회장이야! 니들 지금 이거 내가 언론에 다 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경찰이 약자를 상대로 강압수사를 펼친다? 사람들이 뭐라 할 거 같아? 견찰이라고 욕할 거야. 견찰이라고!”
“하, 이 아줌마 완전 골 때리네. 아줌마 지금 완전히 각 나오는 거 모르죠? 두 분이 부부도 아닌데, 새벽에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불을 저질렀다? 아줌마 말 대로라면, 두 분 다 불법으로 노점 하시는 분인데, 저기 사장님 포차가 장사 잘되니까 배알꼴려서 그런 거 아뇨! 안 봐도 비디오구만. 우리가 형사질 원데이 투데이 하는 거 같습니까? 그리고 아줌마는 세금 안내니까 경찰 욕할 처지도 안 되는 거 같은데?”
“이, 이익! 어쨌든! 나 변호사 불렀으니까, 우리 변호사 오면 얘기해! 나는 잘못 없어!”
아주머니가 적반하장식으로 나오자, 경찰서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왕호 또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불을 지른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잘못한 게 없다는 저 떳떳한 태도는 도대체 뭔가.
왕호가 아주머니에게 한 마디 하려고 하자, 같이 도착한 김갑수 형사가 어깨를 다독이며 왕호를 말렸다.
“사장님. 걱정 마세요. 저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범행 도구도 곧 찾을 거고, 정황 증거도 완벽하니까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피곤하실 텐데 잠깐 저기 앉아서 쉬고 계세요. 이따 저희가 몇 가지 물어볼 건데, 그때 다시 부르겠습니다. ···야! 막내야! 여기 방석 하나만 갖다 드려라! 커피도 한잔 타드리고!”
“옙!”
후우-
왕호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속에 있는 화를 가라앉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 괜히 같이 화만 내서는 자신에게 하등 좋을 게 없다. 게다가 저 진상 아줌마는 화를 낸다고 해도 미안하게 받아들일 위인이 전혀 아니다.
왕호는 고작 한 시간 남짓밖에 자지 못했지만, 전혀 졸립지 않았다. 아니, 피곤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심장은 계속해서 콩닥콩닥 뛰고 있다.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다.
왕호는 수사에 착실히 협조했으며, 경찰서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방화범들은 법의 심판을 받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진상 아주머니 측 변호사가 오고 나서, 상황이 꾸릿꾸릿하게 흘러갔다.
깁갑수 형사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왕호를 밖으로 불러냈다.
김 형사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한 까치를 더 꺼내, 왕호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장님, 담배 태우십니까?”
“괜찮습니다. 전 흡연 안 합니다.”
왕호는 요리사다. 요리사에게 있어서 담배는 해악 그 자체다. 요리사는 미각과 후각이 엄청나게 중요시되는 직업이다. 담배를 피우면 그 감각이 둔해진다. 왕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후우우--
김 형사가 담배연기를 깊게 내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아줌마가 부른 변호사가 대형 로펌 소속입니다.”
“네?”
“법무법인 ‘대서양’이라고,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한국 3위입니다. 법의 허점을 완벽하게 노리고 있어요. 술을 마신 것을 참작해, 심신미약으로 빠져나갈 생각입니다. 저희가 좀 찾아보니까, 저기 협회에서 비슷한 짓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럴 때마다 저 변호사가 나섰는데, 아마 집행유예로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네에?!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립니까.”
“하~ 저희도 씁쓸합니다. 완전히 노리고 저지른 거 같은데, 법꾸라지가 따로 없습니다. 시민분의 신고가 없었더라면, 자연 화재로 종결됐을 수도 있습니다. 범행 도구가 식용유였거든요. 한강 변이라 씨씨티비도 따로 없었구요.”
꽈악-
왕호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살짝 파고 들어갈 정도였다.
후-
김 형사는 다시 한번 담배연기를 진하게 내뿜었다.
“그래도 민사 소송은 승소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제보 영상은 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형사님.”
왕호가 낮은 목소리로 김 형사를 불렀다.
“예.”
“저는 이대로 도저히 못 물러 나겠습니다.”
“사장님······.”
“제가 왜 세금 꼬박꼬박 내가며, 정직하게 장사하는 줄 아십니까? 재능 순, 수저 순으로 나열되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저 같은 개미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고 세상에 떳떳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편법이 정직을 이긴다면, 저 같은 꿈쟁이가 어떻게 희망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모두 취할 겁니다. 잠깐 전화 한 통화만 하고 오겠습니다.”
왕호는 스마트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전 9시.
직장인은 한창 달콤한 꿈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망설여진다.
왕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윽고 단말기를 꾹 눌러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르르- 딸각-
-여보세요?
“아저씨! 혹시 주무시고 계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저 포장마차 총각입니다.”
-하하 안 사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저야 뭐, 항상 6시면 버릇처럼 눈이 떠집니다.
“저, 죄송한데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은···”
왕호는 굳은 표정으로 한참을 통화했다. 그리고는 담배를 다 태운 김 형사를 따라서, 다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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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커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이젠 아주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농담을 따먹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강 형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눈에서 살기가 뚝뚝 흐른다. 강 형사도 왕호만큼이나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경찰서 안으로 양복을 멋들어지게 빼입은 중년 아저씨 하나가 들어왔다.
“허허, 안 사장님!”
왕호가 전화를 걸었던 아저씨였다.
“아저씨!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왕호는 주말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아저씨가 너무도 고마웠다. 아저씨의 손을 꼭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아저씨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왕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큰일을 겪고, 얼마나 상심 많으셨습니까. 걱정은 꽉 붙들어 매십쇼. 이 박칠우가 법의 무서움을 보여드리죠.”
아저씨의 정체는 포차 단골 박칠우였다.
항상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치고, 소매도 완전히 걷어 올린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번엔 수트를 포멀하게 차려입은 박칠우다. 듬직함이 절로 느껴졌다.
박칠우는 왕호에게 윙크를 날리고는, 방화범들과 강 형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형사님? 저 안왕호 씨 변호사 박칠우입니다. 자, 명함 받으시죠.”
“아, 예. 반갑습니다. 강 형사라고 불러주십쇼.”
헛-!
명함을 받은 강 형사가 화들짝 놀란다.
이내 놀람도 잠시. 알 수 없는 비릿한 미소를 짓는 강 형사였다.
강 형사가 받은 명함에는 ‘김앤박 법률사무소 박칠우 변호사’라고 심플하게 적혀있었다.
김&박.
대한민국 최대이자 최고 로펌이다. 대기업 회장님들도 병원으로 보내, 기소유예를 만들어버린다는 최고의 로펌! 최고의 로펌답게 탑클래스 실력자들만 모인다는 괴물 집단이다.
놀란 것은 강 형사뿐만이 아니었다. 방화범들의 변호를 맡은 최 변호사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서, 선배님!”
“하하, 최변 오랜만일세.”
“선배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방금까지 당당했던 최 변호사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갈 만큼 작아져 있었다.
“어쩌긴? 우리 의뢰인께서 힘들어하니까 왔지. 자네는 여기, 법인 허락은 맡고 수임한 건가?”
“그, 그게······.”
“김 대표님한테는 내가 맡았다고 말하고, 손 떼게. 그게 자네 커리어에도 유리할 거야.”
“하, ···알겠습니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대화에, 진상 아줌마의 얼굴에 물음표가 마구 떠올랐다.
“뭐예요? 지금 변호 수임을 중도 포기하겠다는 말인가요? 이거 변호사 자질 위반 아닌가요? 변호사 협회에 말하면 당신 완전 큰일 날 텐데?”
아주머니는 자신의 변호사에게까지 갑질을 시전했다. 아주 갑질하는 것이 몸에 잔뜩 배어있었다.
그런 아줌마의 태도가 짜증 났는지, 최 변호사의 입에서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최 변호사는 대형 로펌 소속이다. 같잖은 협박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맘대로 하세요. 의뢰인의 신뢰 위반으로 중도 해지한다고 하면 그만이요. 손해배상 청구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니, 아무도 그 소송 안 맡을 거요.”
최 변호사는 고깝게 말하고는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아줌마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흔들리는 눈빛이 역력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이게 무슨 경우야······. 아, 아저씨 누구예요? 대체 누군데, 대서양 변호사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거야?”
“크크크크, 하하하하하하하.”
당황하는 아줌마의 모습이 웃긴지, 강 형사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아줌마 완전 엿 됐어. 이분 김앤박에서 나왔거든. 아 올해 들어서 최고로 통쾌하다 하하하하.”
“기, 김앤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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