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 (1)
-이 빌어먹을 사회는 악덕을 행해야 잘나가는 건가?
악덕의 번영을 읽고 왕호가 처음 떠올린 생각이다.
연일 매체에서 쏟아지는 뉴스들만 봐도 그러했다.
무려 300년 전에 쓰여진 책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익을 위해 악덕을 행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했었다. 그때의 왕호는 성선설性善說보다 성악설性惡說을 더 신봉했다.
하지만···
수많은 악덕 기업들이 정의구현 당했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여론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었다. 그게 옳았으니까. 물론, 정의로 둔갑하는 악덕도 아주 없진 않다는 게 함정이지만.
정의의 철퇴를 맞은 몇몇 기업은 도산하고, 몇몇 대기업은 사과하기 급급했다. 비록, 악덕 대기업들은 다시 우뚝! 솟아올랐지만, 사회는 그렇게 조금씩 바뀌어나갔다.
자정작용自淨作用.
왕호는 사회에 내던져지고 나서, 이 자정작용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다짐했다. 비루하게 살지언정 올바르게 나가아가자고.
그때부턴, 성선설이건 성악설이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떳떳해지고 싶었다.
결국엔···
이 책을 쓴 저자인 사드 후작도, 사형선고를 2번이나 받고 생애 대부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보내지 않았던가. 소설의 주인공은 영화를 누렸지만, 정작 현실의 주인공인 작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프레이 길드도 언젠간 빗발치는 정의에 의해 깨끗이 씻겨져 나가겠지.’
인간 사회에 속한 이상, 이 자정작용을 피할 수 없을 거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언제이냐는 거다.
왕호는 남자에게 질문했다.
“당장 노동부에 신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왕호의 말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저어 난색을 표했다.
“신고하면 뚜이님을 계속 고용했던 가구 업체나, 여기 프레이 길드는 처벌받겠죠. 다만, 뚜이님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아마 고향으로 추방당하겠죠.”
“그럼, 아직 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가···”
“맞습니다. 뚜이님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뚜이님은 지금 길드 생활에 엄청 만족해하는 상태입니다.”
“만족이요?”
만족? 일주일만 있으면 레벨이 50대나 되는데, 좋은 점심 한 끼 사 먹을 수조차 없다. 그런데, 만족이라니······.
“가구 공장에 비하면 상황이 훨씬 좋기 때문이겠죠. 정산비가 거의 착취수준이긴 하지만, 가족들에게 꾸준히 돈을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씁쓸하다.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더 큰 착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에 만족하고 만다.
비슷한 일례로, 왕호는 미국의 극작가 리로이 존스가 언급한 ‘사슬 자랑’을 떠올렸다.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혹은 더 무거운가.」
지금도 탑골공원에 가면, 할아버지들이 군인으로서 청춘을 착취당한 시절을 이렇게 자랑하곤 한다.
-마! 나는 해병대 나왔다! 니 원산폭격이라고 들어봤나?
-참나, 해병대 거 뭐 별거 있나? 나는 인마 최전방 GP에 있었어, 니 북한군 직접 본적 있어?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마!
-크크, 다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네? 너네 특전병이라고 아냐? 혹한기 훈련 때, 동상 걸려서 발 자를 뻔 했다!
이렇게 열심히 나라를 지켰음에도, 대우나 월급은 노예 수준에 가까웠다고 들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신이 노예라는 자각만 없을 뿐이다.
남자도 왕호만큼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뚜이님의 상황을 아는 이들은 뚜이님이 멍청해서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족들 때문이죠.”
가족이라는 단어를 듣자, 왕호의 가슴도 먹먹해졌다.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안다. 혹자들은 일방적인 희생이라 칭하는데, 당사자의 입장은 그게 아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다. 그저, ‘고생했어’, ‘고마워요’ 한 마디면 된다.
남자도 쌓인 것이 많았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역만리 타지에 나와 손가락질받아도, 가족들 얼굴 떠올리며 버틴 겁니다. 제가 옆에서 본 뚜이님은, 멍청하지 않아요. 순박하다고는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고 속인 사람을 뭐라 해야지 속은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는 건 어이가 없죠.”
“프레이 길드라고 다 이상한 분만 계시진 않나 봅니다. 선생님 같은 분도 계시는 걸 보니까요.”
악의 집단이라고 해서, 다 악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선의 집단이라고 다 선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왕호는 남자를 향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한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하하, 뭘요. 저도 고향이 제주도인데, 레이드 뛰러 여기까지 왔죠. 뚜이님한테 감정이입 돼서 조금이나마 챙겨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이제 여기까지지만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하신걸요. 제 생각엔 그래도 신고를 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뚜이님도 처벌받으시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각성자가 되셨으니, 다시 워크 퍼밋을 발급받을지도 모르죠. 그게 아니라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레이드 뛰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음··· 저도 생각해봤죠. 일단은, 뚜이님에게 설명하려 했는데···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아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아직은 한국어가 미숙해서 알아듣지 못해요. 여기 길드에서 가구 공장에 건넨 비용을 다 뽑아내면, 워크 퍼밋 발급해주고 정식 계약한다니까 그거나 기대해봐야죠. 지킬지는 의문이지만······.”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
해외에 나간 사람들이 가장 고생하는 부분이다.
왕호는 어느덧 완성된 샌드위치를 뚜이에게 건내며 말을 걸었다.
“뚜이님! 어디서 오셨어요?”
“오! 캄싸함미다! 오디? 아! 나 비엣남 와써효!”
“아, 베트남이요? 거기 음식 진짜 맛있죠. 쌀국수! 포! 그리고, 분짜, 반짱, 짜조, 고이꾸온, 반미, 느억맘···,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다 말을 못 하겠네요.”
불고기 샌드위치에 정신이 팔려있던 뚜이는, 고향의 단어들이 나오자 눈을 똥그랗게 뜨며 신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 퍼pho! 너므 머꼬시퍼효! 우리 퍼 지짜 마시따!”
한참을 신나하던 뚜이는 향수병이 도졌는지, 다시금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꼬르륵-
시무룩해졌지만, 야속하게도 배에서는 밥을 달라고 조른다.
뚜이는 지친 마음과 위장을 달래기 위해, 샌드위치를 큼지막하게 베어 물었다.
와작-! 쭈압쭈압-
뚜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오오! 싸장님! 너므 마시써효! 때박! 때박!”
왕호를 향해 엄지척을 사정없이 날린다.
[손님이 당신의 요리에 감동했습니다.]
[요리의 효과가 1.5배로 상승합니다.]
맛있게 먹는 뚜이의 모습을 보자, 왕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쌀국수 한번 만들어볼까? 재료들은 어차피 있으니까.’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 사람들도 선호하는 요리다. 만들어서 반응이 좋다면 메뉴에 추가하면 된다.
‘보르도 울프 잡고 나서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
남자와 뚜이가 사라지고 나서, 파티원들이 도착했다. 왕호는 그들에게 버프 요리를 먹이고는, 브레이킹 타임이 끝나자마자 던전 속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장비를 많이 교체했다.
중식도를 놓고, 장미칼을 가져왔다. 게다가 등에는 배낭과 함께, 프라이팬도 메고 왔다.
처음에는, 보르도 울프를 잡으면 즉석으로 한 번 구워볼까 하는 마음에 가져왔다. 불을 피우지 않아도 자동으로 달궈지니, 즉석에서 쉽게 요리할 수 있다. 해서, 향신료도 가득 챙겨왔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방패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왕호는 짧은 식칼을 주 무기로 사용한다. 식칼이 익숙해서 잘 다룰 수 있다. 롱소드처럼 두 손으로 쥘 필요가 없다. 남은 한 손이 자연스레 놀게 된다.
그럼, 이 손으로 방패를 쥔다면?
훨씬! 안전해지는 거다.
그리고 일반 방패는 다뤄본 적이 없으니, 손에 익은 프라이팬을 들면 딱!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왼손엔 프라이팬을, 오른손에는 장미칼을 들고 던전을 활보했다.
“큽! 오빠 모양새가 좀 웃겨요!”
여름이가 왕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꾸 웃는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까지 합치면 영락없는 요리사인데··· 저걸로 사냥을 나서니 웃음을 참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이 파티원 어느 누구도 왕호가 가장 강하다는 걸 부인하지 못했다.
스탯깡패.
파티원들이 왕호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별다른 스킬도 없는데, 높은 스탯으로 몬스터를 짓누른다.
.
.
.
부웅-
장미칼의 칼날이 울프 대장의 뒷목을 향한다.
이미 대장은 마법을 얻어맞고 헤롱헤롱 거리는 상황.
레드혼 카우를 즉사시킨 것처럼,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추아악-!
왕호의 톱니 칼날이 울프 대장의 가죽을 찢는다.
칼날은 가죽을 지나 살을 찢는다. 근육도 찢는다. 그리고 뼈를···
턱-
찢지 못했다.
‘막혔다!’
무시무시한 장미칼이 보르도 울프의 뼈에 턱! 걸렸다. 레드혼 카우와는 다르게, 뼈가 무척이나 단단했다.
허나, 지금 장미칼은 톱날 모드다. 쓱싹쓱싹한다면, 제아무리 단단한 뼈라도 두어 번의 움직임만으로 썰릴 거다.
문제는··· 그럴 여유가 없다.
탓-!
공격당하는 대장을 보호하기 위해, 정신을 차린 보르도 울프 한 마리가 크게 도약했다.
크어엉-!
아가리를 쩌억 벌린 늑대가 누워있는 대장을 넘어 왕호의 목덜미를 노린다.
왕호는 장미칼을 뽑아 들어 반격하려 했지만, 뼈가 톱날에 걸려 잘 빠지지 않았다.
당황한 왕호는 어쩔 수 없이 왼손을 휘둘렀다.
대학 시절 잠깐 들었던 테니스 동아리. 그때 배운 자세가 어렴풋이 튀어나온다.
디딤발을 제대로 딛고, 왼손은 강하게 포물선의 궤적을 그린다.
부우웅-
컨티넨탈 그립으로 꽈악 쥐여진 프라이팬이, 공중에서 날아오는 늑대의 안면을 정확히 노렸다.
아름다운 스윙.
까앙-!
맑고 고운 소리가 청아하게 퍼진다.
프라이팬의 밑바닥과 늑대의 안면이 정확히 충돌했다. 이빨 몇 개가 후두둑 빠져나갔다. 달려오는 추진력이 있던 터라, 늑대가 받은 충격량은 어마어마했다.
철푸덕-!
그대로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헤까딱 쓰러졌다.
[둔기를 이용해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입혔습니다.]
[스윙의 궤적이 아름답습니다.]
[스킬 “스매시”가 생성되었습니다.]
[스매시smash - 숙련도 0% 마나 소모량 : 80]
[둔기로 타격하여 대상을 박살내버리는 기술.]
[둔기에 마나를 입혀 강하게 휘두릅니다.]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충격량이 커집니다.]
‘헙! 이거, 방패가 아니라 무기로 사용해도 되겠는데?’
만약, 1,000도로 가열해서 때렸다면? 위력은 배가 됐을 거다. 화상은 덤이다.
뽁-!
위협이 사라지자, 왕호는 장미칼을 다시 뽑아 들어 스킬을 사용했다.
“일도양단!”
장미칼이 마나를 머금자, 위력이 말도 안 되게 증가했다.
서걱-
[“보르도 울프”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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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지글-
왕호의 프라이팬 위에서 보르도 울프의 고기가 잘 익어간다. 후추와 허브솔트를 솔솔솔 뿌린 터라, 향이 기가 막히다.
꿀꺽-
파티원들이 절로 침을 삼켰다.
“오빠! 그 프라이팬 요리하려고 가져온 거예요?”
여름이가 묻는다.
“응. 근데, 방패로 써도 좋겠더라고.”
“방패가 아니라 아까 보니까 완전 흉기던데요?”
한여름은 왕호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프라이팬이 의외로 쓸 만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왕호는 프라이팬을 휘둘러 늑대들을 섬멸했다.
일도양단의 마나 소모량은 300. 지금 지닌 마나로는 겨우 3번 정도밖에 사용을 못 한다.
왕호의 사냥 전략은 이러했다.
마나가 넉넉할 때는, 일도양단으로 몬스터를 해치운다. 마나가 떨어지면 벌겋게 달아오른 프라이팬으로 늑대들을 후두러팬다. 마치, 복날의 개장수처럼 말이다. 그러다 마나가 차면, 다시 일도양단을 사용한다.
지금은 보르도 늑대의 맛이 궁금해서, 쉬는 김에 한 번 굽는 중이다.
단백질이 구워지는 고소한 향기가 프라이팬을 중심으로 스멀스멀 퍼져나간다.
“자, 이제···”
갈색빛으로 잘 구워져 한 젓가락 뜨려는 순간,
끼이잉--
어디선가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소리가 어찌나 작았는지, 왕호 말고는 들은 사람조차 없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왕호가 물었다.
“아뇨? 무슨 소리요?”
파티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소리 말고 빨리 고기나 내놓으라는 눈빛이다.
왕호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곳에는 무성한 풀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들렸는데······.’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지 못한 왕호는, 결국 적탐안을 사용했다. 만약 생명체의 목소리였다면, 체온 때문에 붉게 변한 부분이 풀숲 사이로 나타날 거다.
왕호는 무지갯빛 눈을 띄며, 눈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멀리 있는 풀숲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그러자··· 풀숲의 중앙이 옅은 노란색으로 바뀌어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생명체? 근데··· 체온은 그리 높지가 않아.’
색이 아주 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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