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만 잘하는? 요리도 잘하는! (1)
*
집으로 돌아온 왕호의 머릿속에 유다희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저처럼 강해지면 돼요.
거의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급의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아니, 강해지고 싶다고 다 달빛여제처럼 강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아~.”
심란해진 왕호는 터덜터덜 움직여 냉장고로 향했다.
덜컥-
냉장고 문을 거칠게 연다.
“어디 보자, 소주가···”
왕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없다.
혼술을 하면서 심란한 마음을 위로하려 했거늘···
맥주와 생수는 있었지만, 원하는 소주는 없었다.
“에라이, 냉수로 속이나 달래자.”
왕호는 생수병의 뚜껑을 거칠게 까재꼈다.
벌컥벌컥벌컥-
냉수를 한가득 들이켰다.
“후우~.”
냉수를 다시 집어넣은 왕호는, 소파에 엉덩이를 푹 집어넣었다.
언젠가는 위협이 찾아올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그저, 천천히 강해지면 될 줄 알았다. 곧바로 최상위 던전에서 음식을 팔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었으니까.
그런데···
솔직히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꼈다. 운 좋게 달빛여제가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코가 깨져 병원 신세 졌을 거다. 침상에 누워 소독용 알콜솜 향기나 맡고 있었겠지.
‘정말로, 던전을 떠나야 하나······.’
요리계로 다시 돌아간다?
일반 재료로는 더 이상 요리 스킬의 숙련도가 오르지 않는다.
물론, 지금의 숙련도로도 어느 정도 빛을 볼 수는 있다.
오너 셰프는 아니더라도, 호텔 레스토랑에서 다시 일할 수는 있을 수준은 된다. 예전처럼 스타 셰프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셰프가 되는 거다.
그렇지만···
아쉽다.
이제까지 올린 요리의 숙련도보다, 올려야 할 숙련도가 더 많이 남았다. 요리 스킬의 끝에는 어떤 달콤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을지, 가슴 떨리는 이 기대감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힐링 요리를 먹고 감동해 마지않던 그 얼굴들 또한 지워내기 힘들었다. 애초에 요리의 길을 걷고자 마음먹을 때부터 그랬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는 그 자체가 좋았다. 요리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2차적인 동기였다. 요리 하는 것이 즐거웠기에, 주저 않고 요리의 길에 뛰어든 것이다.
“결국엔, 나 또한 대형 길드의 비호를 받던가···”
아니면, 정말로 달빛여제처럼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왕호의 눈앞에 유다희의 눈이 아른거렸다.
강해지면 된다고 말할 때의 그 강렬한 눈빛!
왕호는 유다희의 그 이글거리는 눈에서 한 가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강해지는 비법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다희님은 어떻게 3년 만에 그렇게 강해졌을까?’
무슨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고민해서 뭐하리! 직접 물어보면 되지.”
왕호는 곧바로 자신의 핸드폰을 두들겨 유다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왕호 : 다희님 뭐 하세요?]
다행히, 1분이 안 되어 답장이 도착했다.
[유다희 : 그냥 있어요. 조금 이따 자야죠. 무슨 일이세요?]
[안왕호 : 그럼 잠깐 나올 수 있어요? 한잔해요.]
[유다희 : 술이요? 음··· 좋아요.]
자고로 진솔한 얘기는 술 한잔 오가야 술술 나오는 법이다.
-------
금요일 저녁은 장사 대목이다.
특히, 술집 같은 경우에는 최고 매출을 찍는 날이다. 왕호도 포차를 운영할 때, 금요일 저녁에 신경을 가장 곤두세웠다. 그야말로 불타는 금요일.
물론, 요새는 던전 밥차를 운영하기에 불금을 즐긴 적도 없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술을 팔고 있지 않기에, 금요일 저녁이라고 매출이 늘진 않는다. 오히려 각성자들이 불금을 즐기러 빨리 퇴근하기 때문에, 매출이 감소한다.
북적북적-
음식점들이 늘어져 있는 거리에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번쩍번쩍 화려한 네온사인들 사이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음식점 앞에서 식후땡을 즐기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연기였다.
유다희는 그런 담배 연기가 몹시 언짢은지 인상을 팍 구겼다.
“왕호님 어디로 가요?”
“제가 닭갈비 괜찮게 하는 집 알아요. 진짜배기 맛집이라 좀 구석진 데 있어요.”
차도가 늘어서 있는 길가는 임대료가 비싸다. 대부분이 프랜차이즈 음식점이다.
굽이치는 골목을 두 번 정도 꺾으니, 왕호가 자신하는 닭갈비 집이 튀어나왔다. 춘천식 철판 닭갈비 집이다.
숨겨진 맛집.
운 좋게 가장자리에 테이블 하나가 비어있었다.
“여기도 많이 유명해졌네요. 아주 꽉꽉 들어찼네.”
왕호는 유다희를 자리로 안내하고는,
“이모! 여기 고추장 닭갈비 2인분이랑 이슬 한 병이요~!”
곧장 메뉴를 주문했다.
콸콸콸-
왕호는 물컵에 물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사장님이 춘천 출신이라, 닭갈비 제대로 맛볼 수 있어요. 원래 숯불로 구워야 되는데, 아무래도 요새 트렌드가 철판이다 보니까 여기도 철판으로 주긴 합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 확실히 맛있어요.”
“왕호님이 보증하니 맛있겠죠. 철판이면 볶음밥도 먹을 수 있겠네요? 저 볶음밥 좋아해요.”
이윽고, 주문한 메뉴가 테이블 위로 세팅됐다.
왕호는 같이 나온 집게와 나무 주걱을 집어 양념 된 닭갈비를 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유다희가 살짝 의아해했다.
“어? 여기는 안 구워주시나 봐요?”
“프랜차이즈처럼 알바생을 쓸 여유는 아마 없겠죠. 그리고··· 이래 봬도 저 요리사입니다. 알바생보다는 더 잘 구울 걸요?”
“와, 직접 구워주시는 거예요? 저도 잘 구울 수 있는데, 힘드니까 번갈아 가면서 해요!”
“괜찮습니다. 제가 기똥 차게 구워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물어볼 게 있어 부른 거니, 굽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
지글지글-
새빨간 닭갈비가 먹기 좋게 익어간다. 빳빳했던 채소도 숨이 죽어 부드러워진다. 매콤하게 올라오는 향취 사이로, 깻잎의 향긋함이 살포시 느껴진다.
왕호의 눈은 무지개빛으로 번쩍번쩍 빛난다. 적탐안 스킬을 이용해 굽는 터라, 아주 기가 막히게 구워진다.
슥- 슥-
노릇노릇 닭갈비가 잘 익자, 왕호는 철판의 온도를 줄이고 닭갈비를 철판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자, 이제 양껏 드시면 됩니다.”
“잘 먹을게요. 그럼 짠 한 번 할까요?”
졸졸졸-
녹색 병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액체가, 작은 소주잔을 가득 채운다.
둥그런 소주잔에 담긴 소주가 마치 작은 호수 같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그 호수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짠-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첫 잔을 들이켰다.
첫 잔은 원래 원샷이 매너다.
왕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구수하게 소리쳤다.
“크으~ 달다!”
“윽! 이게 달아요? 완전 주당이시네요.”
“처음엔 저도 이렇게 쓴 걸 도대체 왜 먹는 거지? 라고 생각했었죠. 근데 어느 순간부터 달게 느껴지더라구요.”
“왜요?”
“세상이 이것보다 훨씬 쓰니까요. 세상의 쓴맛을 경험한 이후로는, 아주 달짝지근하던데요?”
“음··· 그렇게 말하니까 저도 달게 느껴지려고 하네요.”
유다희는 쓰디쓴 알코올 향을 없애기 위해, 닭갈비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 진짜 맛있어요! 이때까지 먹었던 닭갈비는 그냥 애들 장난 같아요!”
유다희가 정말로 놀랐는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좋은 사람에게, 맛집 하나를 알려줘서 뿌듯했다.
왕호도 웃으며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앙-! 쭈압쭈압-
왕호의 입꼬리도 살며시 올라간다. 오랜만에 먹는 맛이지만 역시 맛있다.
잘 구워진 닭껍질에서는 고소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매콤한 양념이 전체적인 맛을 완벽히 컨트롤한다. 생닭을 바로 구운 터라 쫀쫀한 식감 또한 예술이다.
눈을 감으면, 마치 춘천 명동닭갈비골목에 와 있는 것만 같다.
[맛있는 음식을 섭취하였습니다.]
[미식이 상승합니다.]
저번에 먹었던 미슐랭급 음식의 충격 정도는 아니었지만, 장인의 손맛이 절로 느껴졌다.
‘내가 던전을 떠나 음식점을 차린다면, 이 정도 맛을 끌어낼 수 있을까?’
이 깊고도 진한 전통의 맛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역시, 던전이 답이다.
그리고 야망을 두 번씩이나 버리기는 너무 힘들었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야망은,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올 때 한 번 버렸었다. 다시 나를 찾아온 이 야망을 두 번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왕호는 유다희와 몇 잔 주고받은 후에야, 의도했던 말을 겨우 꺼낼 수 있었다.
“다희님. 낮에 다희님께서 강해지면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네. 그랬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저는 이 버프 요리를 포기 못 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다희님처럼 강해지고 싶습니다.”
왕호가 유다희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어서 비법을 알려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유다희의 외모가 너무 예쁜 나머지, 원래는 오래 쳐다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술이 몇 잔 들어간 터라 용기가 마구 샘솟는다.
유다희도 왕호의 눈에서 의지를 읽어냈다.
“제가 어떻게 이렇게 강해졌는지 궁금하시죠? 그것도 3년 만에.”
“아마 모든 이가 궁금해할 겁니다.”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비밀인데, 특별히 왕호님한테만 알려드릴게요. 우린 친구잖아요.”
“감사합···”
“대신!”
유다희가 왕호의 말을 갑자기 끊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왕호를 유다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왕호님 비밀도 알려주세요.”
“네? 제 비밀이요?”
“왕호님. 제가 왜 왕호님한테 말 안 놓는지 아세요?”
“글···쎄요?”
왕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왕호님께서 무언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그래요.”
“제가 그랬습니까?”
“왕호님 클래스가 칼잡이라고 하셨죠? 버프 만드는 검사요. 제가 왕호님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믿었을 거예요. 수많은 레이드를 뛰면서 별의별 전투 클래스들을 봐왔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왕호님을 지켜봐왔잖아요. 왕호님 성격도 이제는 어렴풋이 알구요.”
홀짝-
왕호는 그녀의 의심을 애써 부정하지 못하고, 가득 차 있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졸졸-
유다희는 곧바로 비어있는 잔에 진실의 액체를 가득 채우며 말했다.
“친구끼리라도 비밀을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만, 이건 제 전문분야잖아요. 마음의 벽이 남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더라구요.”
유다희가 왕호를 지켜봐온 것만큼, 왕호도 유다희를 지켜봐왔다. 그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 탑 랭커 앞에서, 버프 검사라고 둘러댔으니··· 친구 하기로 해 놓고······.’
스스로의 행동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자신은 신중한 성격이고, 힐링 요리사라는 클래스의 특별함을 알게 됐으니까.
혹시나 유다희를 통해 힐링 요리사의 존재가 널리 퍼진다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었다.
물론, 지금은 유다희가 입이 가볍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이제는, 이쪽 세계에 빠삭한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이득일 수도 있다.
“이모~ 이슬 한 병만 더 갖다 주세요!”
왕호가 손을 들어 외쳤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술.
이야기가 짧지 않다. 한 잔, 두 잔 술술 넘어가면 꼬였던 실타래도 술술 풀릴 거다.
짠-!
두 사람의 잔에서 다시금 영롱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그러니까··· 비전투직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유다희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힐링 요리사라니··· 그녀도 난생처음 듣는 클래스였다.
“각성한 첫날에는 저도 어리둥절해서 오리진에 글 하나를 올렸었는데, 그냥 관심종자인줄 알더라구요.”
“비전투 클래스라니··· 아직 발견된 적도 없는데, 쉽게 믿기는 힘들겠죠. 어쨌든, 왕호님은 버프 요리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경험치와 숙련도가 오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레이드를 조금만 뛰는데도 레벨이 더 높은 거구요.”
“맞습니다.”
“음··· 왕호님 생각대로 정말 특별하네요. 계속해서 감추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직은 왕호님 실력이 미천하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볼 때 지금은 애벌레 수준이에요. 번데기가 되어 고치를 뚫고 나오면, 그 때는 힐링 요리사라고 떠벌리고 다녀도 아무도 왕호님 못 건들 거예요. 딱 저만큼만 강해지세요.”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전교 1등은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하잖아요. 다희님이 무덤덤하게 얘기해도 저는 와닿지가 않습니다.”
홀짝-
어느덧 테이블 위에 올라간 녹색병은 4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알코올을 들이부었으니, 안주도 먹어야 한다.
왕호는 쌈을 야무지게 싸서 입으로 집어넣었다.
후압- 쭈압쭈압-
‘기가 막히다! 여긴 쌈무도 맛있네.’
쌈무는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대미각과 이터블 감정 스킬을 이용해, 들어가는 재료의 비율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닭갈비도 거의 다 먹고 살짝 남았다. 밥을 볶기 완벽한 타이밍.
술기운인지 유다희가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왕호님께서 비밀을 털어놓았으니, 저도 털어놓아야겠죠. 아, 이제 오빠라고 부를게요. 오빠는 말 편하게 해요. 그게 더 편해요.”
“그게 더 편하다니··· 알겠습··· 아니, 알았어.”
히죽-
오빠라는 말은 언제나 듣기 좋다. 물론, 희영이가 말하는 건 제외다. 걘 친동생이니까.
“제가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유 스킬 때문이에요.”
“고유 스킬?”
“저는 오리진에 없는 검술 스킬을 구사하죠.”
왕호도 그런 스킬 하나 가지고 있다.
마장 발골.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따로 검술을 배운 거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