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오급 (6) >
이영자는 작금의 상황을 부정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희란언니 아들이 정말로 안왕호?
어째서?
하지만, 둘의 감격스런 상봉 장면을 보니 의심할 여지 없는 모자지간이다.
‘왜? 왜 아들 자랑을 안 한 거야?!!!’
어이가 없었다.
희란언니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갑자기 창피한 감정이 파도치듯 밀려들어왔다.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진다.
박희란의 아들을 무시하며, 공무원 아들을 자랑했다.
실로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뱁새 앞에서 황새의 다리를 자랑한 것과 다름이 없다.
본래 인간이란 스스로의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이영자에게 왕호같은 자식이 있었다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을 거다.
‘잠깐!’
이영자의 새빨갛던 낯빛이 이제는 완전한 흑빛으로 물들었다.
우승 상금 3억을 거머쥔 아들!
어디 상금 뿐이랴?
에셰코 우승은 엄청난 스펙이다.
원하고자 하면, 5성급 호텔에 바로 취직할 수도 있다.
허나, 이것은 고작 1차 충격에 불과했다.
에셰코를 한 화도 빼놓치 않고 본 이영자는 왕호의 동생이 누군지 잘 안다.
수능 만점자.
세상 그 어떤 부모가 자식농사를 이만큼 잘 지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가 2차 충격.
게다가···
왕호와 함께 온 여자친구(?)로 보이는 처자의 외모가 이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얼마전 자신의 아들이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예비 며느리를 소개시켜줬다.
꽤나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저기 처자의 옆에 세워 놓는다면 단연코 오징어 꼴뚜기 행일 것이다.
3차 충격.
‘졌다······.’
완벽한 패배.
완패도 이런 완패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그동안 떠벌려놓은 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역관광 제대로 당한 거나 다름 없었다.
왕호는 박희란의 동료 아주머니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하며,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안녕하세요 이모님~! 숙자이모 맞으시죠?”
“어머어머! 희란언니가 아들을 그렇게 꽁꽁 감추고 있었는데, 감출만 했네~. 이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좋으니, 우리가 사위로 홀라당 채갈까봐 그런 거였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이거 받으세요.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워유~ 이게 다 뭐다냐? 한우 아니여? 아이고 이 비싼 걸······.”
“우리 박여사님 잘 챙겨주셨는데 이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죠.”
“챙기긴 누가 챙겼다 그려~ 희란언니가 우리들 챙긴 것이지. 그나저나, 마음씨도 곱고 볼수록 탐난단 말여~? 옆에 있는 아가씨는 여자친구? 여자친구 없었으면, 우리 큰딸 소개시켜주는 것인디~. 아이고 아쉬워라.”
“여자친구는 아니고 그냥 친구에요.”
“그냥 친구? 아! 요새 유행하는 여사친인가 뭔가 하는 거네 그려~.”
어찌 알았는지, 왕호는 아주머니 한분한분의 이름을 전부 알고 있었다.
박희란은 아들의 얘기를 동료들에게 안했을 뿐이지, 동료들 얘기까지 왕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평소에 박희란은 아들과 메신저를 자주 나누고, 그때마다 왕호는 이모님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잔뜩 들어야했다.
왕호가 이번엔 이영자 앞에 다가왔다.
“영자이모 안녕하세요~.”
“으, 응.”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여기 에이스시라면서요?”
“응?”
왕호는 사근사근한 투로 이영자를 띄웠고,
이영자는 그런 왕호의 태도에 상당히 어리둥절해 했다.
“이거 받으세요!”
“나, 나도 주는 것이여?”
“그럼요! 어머니 친구분들이신데.”
이영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왕호가 건네준 선물을 받아들었다.
금빛 보자기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앞서 받은 동료의 반응으로 볼 때 한우인줄 알았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보자기를 살짝 풀어서 확인하니 한우가 아니다.
“엥? 전복이네?”
“영자이모 전복 좋아하신다고 해서요.”
“아니, 그건 어찌 알았대···”
“아, 그리고 아드님 공무원 합격하셨다며요 축하드려요!”
이상하다.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가 않다.
진심 眞心.
왕호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전혀 비꼬는 말투가 아닌,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아무리 나이를 헛 먹었다지만, 이것만큼은 연륜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오래 살아온 만큼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나봤으니까.
“고마워라······.”
부끄러웠다.
살면서 이정도로 부끄러웠던 적이 있던가?
자식농사 배틀에서 져서도,
역관광을 당해서도 아니다.
스스로의 편협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동안 희란언니를 질투하고 우월감에 빠져 조롱했었는데,
희란언니는 자신이 전복을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가슴에 담고 있었다.
반면교사 反面敎師.
나이 50이 넘어서야, 이 교훈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영자는 순도 100% 진상은 아니었다.
선물증정식이 끝나고, 왕호는 영양사와 약속했던 내용을 이모님들에게 설명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이모님들은 편하게 쉬세요! 영양사님한테 허락 받았습니다.”
“잉? 200인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혀어? 도와주는 것은 고마운디, 혼자서 하겠다는 건 무리아녀~?”
“하하, 제가 각성자거든요. 혼자서도 거뜬합니다. 아, 그리고 여기 제 든든한 주방보조가 도와줄 겁니다.”
턱-
왕호가 다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유다희의 얼굴에 물음표가 마구 떠오른다.
‘아니, 따라오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부려먹겠단다.
그렇게 아주머니들을 시내로 마실 보낸 왕호는, 박희란 여사를 따로 불러냈다.
여기에 온 본 목적은 선물 보따리를 푸는 것도,
이모님들에게 하루 휴식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왕호가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 이제 서울 올라오세요. 같이 살아야죠.”
“난 여기도 괜찮어~.”
“기숙사가 뭐가 괜찮아요. 이번에 상금이랑 이것저것 합쳐서 좋은 집 구했어요. 관악구쪽 아파트에요. 넓기도 넓고, 신축이라 살기 좋을 거예요. 희영이 학교다녀야 되니까, 학교랑도 가깝고.”
“얘는··· 서울 가면 일자리가 어딨다고······.”
“저 이제 수익 많아요.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직 꼬부랑 할머니도 아닌데, 아들 용돈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지.”
내 이럴 줄 알았다.
왕호는 어머니의 양손을 꼬옥 잡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10년 넘게 고생만 하셨으니, 그래도 돼요 이젠···. 저는 그렇다 쳐도 희영이 생각하셔야죠.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 대학 다닐 때까지라도 챙겨멕여야죠.”
“······.”
“정 미안하시면, 딱! 3개월만 맘 편히 쉬세요. 10년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하셨으니, 딱! 3개월이요. 그 담에 좋은 일자리 구해봐요. 분식집 다시 시작해도 되고.”
“분식집 차릴 돈이 어딨다고······.”
“제가 투자할게요. 그냥 차려드리는 게 아니라 투자니까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되요.”
“왕호야··· 분식집 얘기는 다음에 하자······.”
한참을 고민에 잠겨있던 박희란은, 이내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올라가자. 우리 희영이랑··· 그리고 네 아침도 이제 엄마가 챙겨줘야지. 어미가 돼서 그동안 너한테 큰 짐을 짊어지게 했네, 미안하구나······.”
“짐은 무슨··· 가족이잖아요.”
“네 아빠만 살아있었다면, 너한테 이런 고생 안 시켰을 텐데······.”
“아부지 얘긴 갑자기 왜 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두 모자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간신히 눈물을 훔친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긴 갈 건데, 겨울방학 전까지는 여기 일 계속 해야 될 거다. 다음주에 끝나니까, 그 때 버스타고 올라가마.”
“그건 예상했죠.”
그제서야 왕호가 활짝 웃었다.
아들의 웃는 얼굴에, 어미도 웃음꽃이 활짝핀다.
그리고 그 웃음은, 왕호의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아가씨를 보자 더욱 짙어진다.
“아이고, 이 예쁜 아가씨는 어떻게 만났대?”
박희란이 환하게 웃으며 쳐다보자, 다희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어색어색열매를 먹은 것마냥 어색하기 그지없다.
“아, 다희라고 같이 일하는 주방보조.”
“아까 듣자하니 여자 사람 친구람서? 그럼 여자친구··· 아니, 며느리는 언제쯤 돼?”
“며느리는 무슨······.”
“호호호, 내가 너무 앞서나갔나? 그럼 며늘아기 하기 전까지는 우리 딸 하면 되겠네~. 희영이보다는 나이 많을 거니까 큰딸 삼으면 되겠어. 다희라고 했지?”
박희란이 유다희의 손을 꼬옥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다희에게도 전해졌다.
손에서 느껴지는 직접적인 온도도 따뜻했거니와,
마음으로 느껴지는 온정도 따뜻했다.
처음 받아보는 어미의 감정이다.
‘엄마······.’
울컥한 탓에, 순간적으로 이 말이 튀어나올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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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할 때 삽 사용하긴 또 처음이네.”
왕호가 조리용 거대 삽을 말아쥐며 감탄했다.
“그러게 왜 혼자한다고 나서서···”
탕탕탕탕-
다희가 200인분의 재료를 거침없이 썰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다다다-
칼질의 속도가 장난 아니다.
두께도 완벽하게 균일하다.
요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칼질 하나만큼은 기계수준이다.
“여기 기숙사 거주하는 학생들도 있어서, 이모님들이 아침, 점심, 저녁 다 챙겨줘야 돼. 쉴 틈이 없어. 반나절이라도 어디가서 영화라도 보시라 해야지.”
“헐, 정말요? 되게 힘드시겠다. 다행히 고3들이 수능 끝나서 200인분만 만들면 되네요? 학기 초에 왔으면 300인분 될 뻔했네.”
그렇게 200명이 먹을 급식 만들기가 시작됐다.
그것도 단 둘이서.
얼핏보면 불가능한 미션이지만, 둘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각성자.
Nothing is Impossible!
.
.
[100인분 이상의 급식 요리 “클라스 오지는 급식”을 만들었습니다.]
[레시피 데이터베이스에 “급식 요리” 목록이 형성되었습니다.]
[급식 요리의 특성상, 대량으로 만들어도 버프의 효과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
영양사는 이때다 싶어, 급식실에 종이 하나를 인쇄해서 붙였다.
<에셰코 우승자 안왕호가 만든 스페셜 디너!>
학교 급식의 위상을 높일 이 사건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점심 시간에 왕호와 사진을 찍은 아이들도 왕호의 부탁을 성실이 이행했다.
“갓왕호 형이 오늘 저녁 급식 맛있다고 했음. 오늘은 매점 가지 말자.”
“갓왕호가 아니라 ‘갓갓갓’이시다. 정정해라.”
“헐?! 레알이네? 저기 적힌 거 봐봐. 갓갓갓 님이 저녁만들었대!”
보기드문 진풍경이 펼쳐졌다.
전교의 모든 학생이 매점에 들르지 않고, 줄을 길게 늘여뜨렸다.
매점아줌마가 의아해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왕호와 다희는 배식까지 맡았다.
“맛있게 먹어~.”
“우와~ 맛있겠다! 감사합니다~!”
왕호는 급식 아주머니들이 쓰는 조리용 위생모와 투명위생마스크를 낀 상태로 웃으며 요리를 배식했다.
마치 파마모자를 쓴 아줌마 같았다.
급식을 받아들고 식탁에 앉은 학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헐··· 이게 레알 우리학교 급식?”
“아니, 급식 상태 대체 무엇? 또띠야, 킹육볶음, 쉬림프볶음밥, 고로케, 매운짬뽕 실화냐? 디저트로 타르트까지 나오네 개씹오졌다······.”
“어맛! 이건 꼭! 찍어야 해!”
찰칵- 찰칵- 찰카라라락-
학생들은 페북과 인스타에다가 자랑글을 올릴 생각에 들떠, 사진을 마구 박아댔다.
그리고 급식을 맛본 아이들이 하나같이 경악해 마지않았다.
“와, 제육볶음 맛 진짜 개미쳤다. 인생급식이다 인생급식···”
“레알 밥도둑··· 아니, 레알 밥강도네!”
“제육볶음 천상계 맛인 거 인정하는 부분? 또띠아피 쫄깃쫄깃한 거 인정하는 부분? 매운짬뽕 바지락양 혜자인 거 인정하는 부분?”
“인정~ 어 인정~ 씹 인정~. 이거레알 반박불가. 지나가던 플라톤까지 인정하는 각?”
“네 인정합니다.”
“페북 급식 배틀에서 1등각 빼박캔트죠?”
학생들은 잔뜩 흥분한 채, 퀄리티 오지는 급식을 걸신 들린 것마냥 마구마구 해치웠다.
한창 클 고등학생들 든든하게 먹으라고 양까지 넉넉하게 만들으나, 두 번씩 먹는 친구들이 속출했다.
청주의 한 고등학교 급식실에서, 전설로 남을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급식의 모든 메뉴가 탈탈 털렸다.
그럼에도 잔반통은··· 마치 새로 설치해둔 것마냥 깨끗하기 그지 없다.
잔반 없는 날인 수요일도 아니건만, 잔반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역대급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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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SNS력은 장난 아니다.
페북과 인스타, 그리고 각종 커뮤니티에 유행처럼 사진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요즘 급식 클라스(feat. 킹갓왕호)>
전국 급식 배틀에서,
모든 공립, 사립, 자사고, 특목고를 제치고 1등으로 등극한 그 급식의 사진이었다.
[댓글]
[-와, 급식 퀄리티 실화냐?]
[-ㄷㄷㄷ 고오오오오급이네.]
[-이세상 급식이 아니다ㅋㅋㅋㅋ]
[-저희 학교도 와주세요! 저희 학교 급식 개노답이에요ㅠㅠ]
[-헐 전학각 나왔다.]
[-갓갓갓 당신은 대체······.]
[-근데 안왕호 저 학교는 왜 간 거임?]
[-몰라, 새로 하는 요리 프로그램인가 보지. “내급식을 부탁해?” 이런 거 아닐까?]
유행에 민감한 방송국 PD들도 역병마냥 번지는 이 사실을 곧바로 확인했다.
“김 작가! 저 급식 바꿔주는 아이템 찍고 있는 방송국 있어?”
“그런 소식은 못 들었는데요?”
“그치?! 이야~ 아이템 쥑인다! 우리 방송국에서 먼저 선수쳐야겠다. 안왕호 연락처 어딘지 빨리 알아 봐!”
“PJ쪽 문 PD님이 먼저 선수치지 않을까요? 안왕호가 거기 에셰코 출신이니까······.”
“얌마! 연락해보지도 않고 벌써 포기하리? 빨리 알아봐!”
“넵! ···어? 소속사 있는데요?”
“어디?”
“박하진 쪽이요!”
“나이쓰! 내가 박하진 직통 전화번호 아니까 당장 전화해볼게!”
그날, 소속사의 전화기로 PD들의 섭외 문의가 빗발쳤다.
< 고오급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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