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풍 (2) >
*
‘이런 치졸한 방법까지 쓰다니······.’
내막을 확인한 왕호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플라톤 측에서 보복이 있을 거라고, 황 회장이 귀띔해줬다.
못 들었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다.
왕호는 미식회가 끝나고, 황 회장을 통해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김 비서가 따라붙었다.
요새 김강률은 황 회장을 보좌하는 시간보다, 왕호와 붙어있는 시간이 더 길다.
뭐, 회장님이야 보좌진이 한둘이 아니니 크게 상관없다.
더블버튼 수트를 쫙 빼입은 김강률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이 아재··· 아저씨긴 한데 동안에다가, 멀끔하게도 생겼다.
겉으로만 보면 30대 후반이다.
헤어 스타일도 포마드로 깔쌈하게 넘긴 것이, 그야말로 꽃중년의 표본이 따로 없다.
그리고 어째, 수트가 볼 때마다 바뀐다.
돈 진짜 많은 거 같다.
뭐, 재벌 회장님 직속 비서니 당연히 돈이야 많겠지.
“김 비서님 근데 이런 정보는 어떻게 구하셨어요?”
“처음에 왕호님 뒷조사하다 알게 된 겁니다. 확신은 없었는데, 플라톤 고 사장과 이인규 PD가 요새 자주 만나는 거 보고 확신했죠. 아이템도 확정됐고, 방송국 통에 의하면 이미 셰프님 식당에서 촬영까지 마친 듯하더군요.”
“아, 예. 이인규 PD 마주친 적 있습니다. 그때는 누군지 긴가민가했지만······.”
왕호 입장에서는 심각한 이야기였지만, 김 비서는 히죽히죽 웃으며 설명했다.
김 비서가 왜 이럴까?
“비서님 요새 재밌는 일 있으세요? 어째, 제가 고생하는 게 즐거우신 듯 보이네요?”
“하하하, 회장님 모실 때는 되게 심심하거든요. 안 셰프님이랑 있으면 아주 재밌습니다. 이렇게나 재밌는 에피소드가 마구마구 생겨나지 않습니까.”
“이게 재밌는 에피소드에요? 잘못하다간 사회에서 매장당하게 생겼는데?”
“뭐, 제가 미리 알았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비속어를 즐겨 쓰진 않지만, 저 양반 태도를 보아하니 안심은 되긴 한다.
존나 여유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근데, 이 방송이 조작방송이었다니 정말 몰랐어요······.”
“조작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자극적인 소재를 뽑아낼 순 없죠.”
“대기업의 의뢰까지 받는다구요?”
“이번에 동네 빵집 죽이는 것도,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부탁한 겁니다. 아, 물론 저희 황룡은 그런 비겁한 짓까진 하지 않습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럼, 르포 프로그램은 다 조작인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불만낫띵’ 같은 멀쩡한 프로그램도 있죠.”
김 비서에게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들은 왕호는,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선한 식당’까지 선정하는 그 프로그램이 설마 조작일 거라 누가 생각했겠나.
그동안 조작에 희생된 피해자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다.
“김 비서님 생각엔 어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흠···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셰프님께서 고르세요. 첫째! 방송이 나가기 전에 압박을 가한다! 황룡이 뒤에 있다고 하면, 당연히 전파도 타지 못할 거고 다시는 보복 같은 잡생각도 꾸지 못할 겁니다.”
“간단하네요······.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방송이 터지고 나서 대응하는 겁니다. 일명 ‘역풍’ 작전이죠.”
“역풍 작전?”
“방송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는 거죠. 역풍 한 방이면, 아마 방송 폐지될 겁니다. 고 사장도 타격이 크겠죠. 선거에서도 역풍을 가장 조심하라지 않습니까. 이건··· 제 입장에서야 더 좋은 방법이지만, 셰프님께 그리 추천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어쨌거나, 초
반에 셰프님 이미지가 깎일 테니까요.”
“어차피 조작이란 것이 밝혀지면 회복되지 않습니까.”
아마 더 좋아질 수도 있다.
“그거야 모르죠. 셰프님 입장에선 굳이 리스크를 안을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근데, 김 비서님 입장에서는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게···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하하하, 셰프님 부탁으로 도와드리고 있긴 한데. 잘 계산해보니 저희 황룡도 한몫 챙길 수 있겠더라고요.”
“예? 그게 무슨···”
왕호의 얼굴이 궁금함으로 물들었다.
김 비서는 꼬고 있던 다리의 위치를 바꾸더니, 여유로운 얼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역풍을 통해 황룡이 얻어낼 수 있는 최적의 이득!
김 비서는 그 이득까지 계산해두고 있었다.
김 비서의 대략적인 플랜을 들은 왕호는,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돋는 느낌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갑자기 추워지는 듯하여, 따뜻한 카페모카를 한번 홀짝였다.
후룹-
이 느낌··· 황 회장에게서도 받은 적이 있다.
그 회장에 그 비서인 건가?
“김 비서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가요?”
“대략적인 건 그렇죠. 회장님께 보고 드리긴 했지만, 어쨌든 우선은 셰프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셰프님이 첫 번째 방법을 고르시면, 저희도 시작하지 않을 겁니다.”
“와 김 비서님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똑똑하시네요?”
생긴 것만 보면, 어디 엔터테인먼트 로드 매니저 하게 생겼는데 의외다.
아니면 나이트클럽 실장님?
“학교에서 배운 것들인데 써먹어야죠. 비싼 등록금 내고 배운 건데.”
“오, 학교는 어디 나오셨는데요?”
“학부요? 학부는 하버드 경영대요.”
“헐······. 언제는 서민이라면서······.”
왕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나가던 진짜 서민들 땅 치고 통곡하겠다.
“서민이죠.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 외국 한 번을 안 나가봤거든요. 박사까지 황룡 장학재단에서 지원받고 간 겁니다. 저도 개천 출신입니다.”
“와 쥐뿔도 없는데, 회장님 최측근까지 꿰찬 거예요? 머리 하나로? 하긴, 하버드 붙을 정도면 비상하다고 봐야죠.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는데요?”
“민족사관고 나왔습니다.”
“······.”
왕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을 말자.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꽃중년 아재.
말로만 듣던 영재 출신인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김 비서는 자신의 학교 커리어를 세세하게 읊기 시작했다.
“제가 이래 보여도 영재교육원 출신입니다. 민사고 졸업하고, 황룡에서 지원받아서 하버드 들어갔습니다. 되게 힘들었는데 수석으로 졸업하고, 펜실베니아 MBA과정 밟았죠. 와튼 스쿨이라고 되게 유명한 곳입니다.”
“들어본 적은 없는데, 당연히 유명한 곳이겠죠······. 문과 끝판왕인가요? 하버드 수석만 들어도 딴 세계 사람 같네요. 뭐, 그러니 저런 기똥찬 작전까지 생각하셨겠죠.”
“하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셰프님 선택은 어떤 겁니까?”
“한가지 되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동안 저 방송으로 피해받은 사람들··· 제가 두 번째를 고르면 그 사람들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왕호가 진지한 투로 물었다.
왕호가 갑자기 진지해지자, 실실 웃고 있던 김 비서도 다시 원래의 엘리트 비서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꼬고 있던 다리도 풀었다.
“제자리로 돌아갈 순 없을 겁니다. 명예야 다시 찾을 수 있겠지만,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배상금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그럼 두 번째 거 할게요.”
“이건 머리 좋은 저도 예상 못 했네요. 이런 이유로 고르시다니······.”
“스스로 머리 좋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사실이니까요.”
후루룹-
김 비서는 남은 아메리카노를 전부 들이키고는 왕호를 향해 되려 질문을 건넸다.
“이번엔 제가 되묻고 싶습니다. 원래 성격이 착한 겁니까? 아니면 지금 이미지가 착한 이미지라 그러는 겁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오지랖이 넓은 겁니까?”
“저 김 비서님 생각처럼 착한 놈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비겁하게 눈 감고 지나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만, 같은 장사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억울함만큼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어차피 두 번째 방법도 저
한테 나쁠 건 없습니다. 김 비서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크, 알겠습니다. 셰프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럼, 제대로 준비하죠. 셰프님은 그 피해자들 한번 만나보세요. 그들이 가진 자료까지 들이부어버립시다.”
김 비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비릿한 미소를 내지었다.
내막을 아는 왕호가 볼 때 저 미소는 살인미소다.
다른 의미의 살인미소.
말 그대로의 살인미소.
고 사장이라는 사람···
아마 곧 죽을 것 같다.
*
‘먹거리! 그것이 알고싶다’의 희생자들은 멍하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뼈에 사무치는 이 억울함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소송을 진행했다.
혼자의 힘으로 대형 방송국을 상대로 소송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모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왕호는 인터넷 카페에서 그들의 모임을 찾을 수 있었다.
회원 수가 무려 1,000명에 육박했다.
‘많기도 해라······.’
왕호는 모임의 운영자와 가까스로 연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운영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고, 우직한 곰 같이 생긴 한 남자가 들어왔다.
왕호가 만나기로 한 운영자다.
눈은 초췌하고 짙은 다크서클은 거의 광대뼈까지 내려와 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지 얼굴만 봐도 알겠다.
그리고, 이 얼굴은 왕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이언 셰프님.”
라이언 심.
한때 유명했던 스타 셰프.
그가 바로 피해자 모임의 운영자였다.
왕호도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깜짝 놀랐다.
그도 조작 방송의 희생자였을 줄이야······.
“반갑습니다······. 요새 잘나가시는 안 셰프님이 연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라이언이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테이블 위에는 라이언이 가져온 두툼한 서류 더미가 올려져 있었다.
“그게 다 누명이셨다니··· 정말 억울하셨겠습니다······.”
“후··· 하루아침에 인생이 뒤바뀔 거라고 어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라이언의 팔자는 기구하기 그지없었다.
영국 유명 셰프의 밑에서 요리를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독창적인 레시피와 곰돌이 같은 후덕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인기를 많이 얻었다.
시간이 흐르자, 라이언은 자연스레 스타 셰프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독창적인 메뉴는 그의 강력한 무기였다.
라이언은 ‘벌집 디저트’ 메뉴를 새로이 개발했고, 사람들의 관심 또한 엄청났다.
호불호는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호우! 를 외쳤다.
‘이건 키워야 해!’
사업적으로 날카롭게 각이 섰다.
라이언은 투자자를 모으고, 자신의 레스토랑을 담보로 해서까지 돈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프렌차이즈 디저트 가게를 창업했다.
일명 ‘벌집 아이스크림’ 가게.
가맹점은 마치 눈덩이 굴러가듯 급증했고, 라이언의 입가에 웃음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 방송이 나가기 전까진······.
“방송이 나가자 순식간에 파렴치한, 쓰레기, 비양심··· 이런 수식어가 붙덥니다. 아무리··· 아무리! 해명을 해도, 들어주질 않았습니다. 억울해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더군요··· 마포대교 다리 위에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아이스크림 위에 올라가는 벌집.
그 벌집을 만드는 데 ‘소초’라는 재료가 들어간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이것을 양초를 만들 때 사용하는 ‘파라핀’이라고 오보했다.
소비자들은 당연히 경악했고,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듯이 그도 대중들의 돌에 맞아 피를 철철 흘렸다.
왕호도 라이언이 정말로 사기꾼인 줄 알았다.
진실을 알기 전까진 말이다.
“이 소초는 파라핀이 아닌 ‘밀’로 만드는 겁니다!”
라이언의 목소리에서 순도 100%의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프랜차이즈는 망했고, 빚만 잔뜩 쌓였다.
채권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고, 담보로 잡아놓았던 레스토랑도 빼앗기고 말았다.
다른 레스토랑에 취직해서 남은 빚이라도 갚아보려 했지만, 먹을 거 가지고 장난쳤다고 누명 쓴 그를 어느 식당에서 받아주겠는가.
결국, 남은 명예라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
질질 끌리는 소송 때문에, 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여기, 부탁하신 자료 모조리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회원님들의 모든 해명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곧, 누명 벗겨지실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헌데, 아무 관련도 없는 저희를 왜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잘못하면 안 셰프님 이미지만 나빠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 관련 없지 않습니다.”
“예? 그게 무슨···”
라이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덥석-
왕호는 푸석푸석해진 라이언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다음 방송 희생양이 바로 저거든요. 같이 정의구현 합시다!”
< 역풍 (2)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