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맛있는 버프를 만들어 드립니다-130화 (130/149)

< 역풍 (6) >

*

사장 해임 안건이 올라온 주주총회장은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만일 안건이 통과된다면 현재 오너인 ‘고장혁’은 해임되고, 새로운 사람이 사장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고 사장은 매서운 눈으로 총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을 쭈욱- 훑었다.

‘별다를 건 없네.’

여러 얼굴들이 있었지만, 전부 고 사장이 아는 사람이다.

이번 주총을 소집한 저 김강률이라는 놈만 빼면.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변동은 없다.

그럼, 자연스레 이번 안건은 물 건너간다.

51% 지분을 고 사장이 보유하고 있으니까.

물론,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48%의 지분은 모 母회사인 ‘플라톤푸드’가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어차피 그 회사의 주인도 자기 자신이니까.

호로로로--

얼음밖에 남지 않은 김 비서의 아메리카노에서, 공기소리가 흘러나왔다.

못내 거슬린다.

저 여유로움은 대체···

시계가 정각을 알리자, 진행요원이 단상 위로 올라가 주주총회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사장 해임 안건이 상정된, 주식회사 플라톤호텔그룹의 임시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번 임시주총을 소집한 2대 주주 YD금융투자의 주주발언이 있겠습니다. 대표님은 앞으로 나오시죠.”

진행요원이 호명하자, 김 비서가 옷매무새를 한번 가다듬고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YD금융투자의 CEO를 맡고 있는 김강률이라고 합니다.”

김 비서가 올라오자, 고 사장의 측근들이 야유를 내뱉었다.

“당신이 뭔데 우리 사장님을 끌어내라 마라야!”

“혼란을 틈타 2대 주주 됐다고 너무 나대는 거 아냐? 나서고 싶은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 심하지!”

“어차피 통과되지도 않을 걸 가지고 쯧쯧쯧···”

비난에도 불구하고, 김 비서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제가 맡고 있는 이 YD금융투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플라톤 호텔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지분도 무려 28%나 매입했죠. 플라톤 호텔을 사랑하는 투자자의 입장으로서, 이번 파렴치한 사건은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뭐, 뭐?! 파렴치?”

“유언비어라고 하지 않았소!”

“주가 폭락할 때 들어와 놓고선 뭐라?”

이사들은 김 비서의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이 사진들 한 번 보시죠.”

김 비서가 손짓하자, 빔프로젝터의 전원이 켜지며 슬라이드 사진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헙!”

“세, 세상에나···!”

방금까지만 해도, 김 비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주주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형 스크린에 떠오른 사진들은, 고 사장이 이 PD와 몰래 만나는 사진이었다.

돈을 건네는 장면까지 아주 1억 화소급 화질로 생생하게 찍혀 있었다.

“아니, 고 사장! 헛소문이라 하지 않았소!”

“고 사장님만 믿고 주가 떨어질 때도 안 던졌는데 이런 뒤통수를······.”

“하··· 그때 손절할 걸······.”

빠직-

주주들의 탄식에, 고 사장의 이마에 핏줄 하나가 솟아올랐다.

저놈이 저 사진들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이미 주주들한테 까발려졌다.

더 이상 저 자세로 나갈 이유가 없다.

고장혁이 소리쳤다.

“그래서? 그걸 명분으로 날 해임하시겠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이 호텔은 내 거야! 우리 아버지께서 맨손으로 일궈내신 거라고! 51% 지분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네까짓 놈들이 뭘 어쩔 건데? 어차피 저 사진들! 밖으로 새어나가봤자, 피해 보는 건 당신

들 아냐? 들고 있는 주식 휴지조각 될 테니까!”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맞는 말이다.

이 호텔은 고 사장 것이고, 저 사진이 유포되면 깡통 차는 것은 여기 있는 주주들이다.

고장혁의 얼굴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고 사장이 저런 식으로 나온다?

김 비서도 예의를 차릴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김 비서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맞대응했다.

“졸렬한 짓은 다 해놓고, 아주 막 나가시네? 뭐, 그럼 본론으로 바로 들어갑시다. 당신이 가지고 플라톤푸드의 48% 지분. 그거 믿고 막 나가는 거죠? 근데 어쩌나? 플라톤푸드 대주주 어제부로 넘어갔는데.”

“뭐?!”

고 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고 사장은 재빨리 보좌관을 불러 확인했다.

“빠, 빨리 확인해 봐!”

“자, 잠시만요··· 헙! 소피아자산운용이 29%로 최대주주로 등극했습니다.”

“어떻게! 계산은 철저하게 했잖아!”

며칠 전, 고 사장은 찌라시 언론사의 협박 아닌 협박에 소피아자산운용의 투자를 거의 반강제적으로 받아야 했다.

유상증자를 통한 투자였기에, 자연스레 그의 지분이 줄어들고 소피아 측의 지분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최대주주는 놓치지 않으려 계산을 완벽히 해놓았다.

기존 최대주주였던 또 다른 모회사의 지분이 28%.

자신의 명의로 가지고 있던 지분이 14%.

와이프의 지분이 12%.

친동생의 지분이 8%였다.

증자로 올라간 소피아자산운용의 지분은 21% 정도였다.

나머지는 이사진과 개미들의 자잘한 지분이었으니, 소피아가 대주주로 오른다는 것은 거의 힘들다고 봐야 했다.

김 비서가 단상 위의 마이크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건, 당신 동생한테 한번 물어보시고.”

“뭐라고?!”

휙-

고 사장이 고개를 거칠게 돌려, 동생을 노려보았다.

동생은 안절부절못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었다.

“소피아 측에서 저 사진 보여줬어··· 플라톤은 곧 망할 거라고, 주가 떨어지기 전에 사준다고 하길래······.”

“야 이 덜떨어진 새끼야! 나한테 물어나 봤어야지!”

“···형한테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리고··· 말하면 못 팔게 했을 거잖아! 나도 먹고살아야지! 아버지가 호텔은 전부 형한테 물려주고 나는 딸랑 저거 남았는데 어! 호텔 망하면 나보고 길바닥에 나앉으라고?!”

“어휴, 이 모지리 새끼···! 네가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호텔을 다 나한테 맡기신 거다! 그리고, 제주도 호텔! 너 바지사장 자리 않혀주고 떵떵거리며 살게 해준 게 누군데, 병신같이 형 뒤통수나 쳐!”

“뒤통수 아니야! 그냥 주식만 넘긴 거라고! 시세보다 비싸게 넘겼으니까 어차피 이득이야!”

“그게, 뒤통수다 이 빡대가리야!”

주주총회장은 어느덧, 형제의 싸움장으로 번졌다.

김 비서가 중재했다.

“집안싸움은 집에 가서들 하시고. 지금은 사장 자리를 더 걱정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라지만, 김 비서가 히죽 웃으며 저러니 고 사장은 더욱 열이 뻗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욕지거리까지 내뱉기 시작했다.

“하, 씨바! 그래서? 소피아자산운용 거기랑 좀 아는 사이인가 보지? 대주주 먹으면 뭐 어쩔 건데? 어차피 플라톤푸드 총 지분의 54%는 내 거야! 좀 귀찮아진 것뿐이지만, 내 거라고! 거기 대표도 나고! 난 이 자리에 플라톤푸드의 의결권까지 행사할 수 있

어! 달라질 건 없다고!”

최대주주가 바뀌었다지만, 말 그대로 그냥 최대주주만 바뀐 것뿐이다.

동생과는 다르게, 와이프 명의의 주식은 고장혁이 직접 관리한다.

그리고 와이프는 동생처럼 멍청하지도 않다.

모회사의 지분까지 도합 54%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플라톤푸드의 대표자리를 빼앗길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근데 그거 아시나? 소피아자산운용. 그거 외국 회산데.”

“그게 어째서! 외국 회사니까 오히려 투자받은 건··· 헉!”

고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장혁은 유능한 사업가다.

김 비서의 말에 내포된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커질 대로 커진 그의 눈동자는, 이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외국회사가 대주주로 있는 플라톤푸드는 어제부로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의결권이 반 토막 났습니다.”

웅성웅성-

김 비서의 친절한 설명에, 주주총회장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든지, 외국인의 투자는 내심 바라지만 자국 기업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보호하고 싶어 한다.

특히나, 기업사냥꾼이 득실거리는 외국투자회사들의 손에서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특별법을 만들어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투자는 자유롭게 허용하지만, 경영권은 그들로부터 보호시키겠다는 명목이다.

하여, 외국인이 대주주로 있는 플라톤푸드는 이제 의결권을 절반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48%에 달하는 투표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플라톤 푸드는, 이제 고작 24%도 안 되는 투표권밖에 행사할 수 없다.

그리고 고장혁의 개인지분 3%를 합치면 도합 27%.

김 비서가 가지고 있는 28%보다 낮아진다.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전문 기업사냥꾼이야?!!!”

고장혁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김 비서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뭐, 이렇게까지 됐는데 툭 까 놓고 얘기하죠. YD금융투자. Yellow Dragon의 약자입니다. 우리 말로 황룡. 황룡에서 나왔죠. 아, 급하게 짓느라 작명 센스 구린 것은 조금 양해 부탁드립니다.”

“화, 황룡!!!”

“맙소사!”

“그럼, 황룡이 M&A를 노리는 거야?”

주주총회장은 이제 거의 혼란의 도가니로 접어들었다.

고장혁은 억울했다.

대기업과는 척을 지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해왔거늘···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이 이런 치졸한 방법을 쓰리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고장혁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왜!!! 왜 황룡이 이런 더러운 짓까지 하면서!!! 너네는 이런 짓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잖아!”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뭘 그런 도덕적 잣대를 따지실까?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일을 진행합니다. 방송국에 뒷돈을 주면서까지 불법을 저지른 것은 고 사장 당신이지. 아니, 이제 사장이라 부르면 안 되겠

네.”

“왜 하필 플라톤이야! 다른 곳도 다 이렇게 하잖아! 우리만 이런 짓 하는 게 아니라고!”

“그건 인정하지만··· 당신은 아주 큰 실수를 하나 했습니다.”

“실수? 황룡에 연줄을 대려고는 했지, 눈 밖에 날 짓은 안 했다고!”

얼마나 억울했는지, 목에 핏대가 바짝바짝 섰다.

“우리 안 셰프 건들었잖아.”

“뭐?”

안 셰프?

설마 그 안왕호?

억울했던 고장혁의 얼굴이, 강한 어이없음으로 바뀌었다.

“그러게 착하게 장사 잘 하고 있는 우리 왕호 씨는 왜 건들었을까?”

“고작··· 그런 이유로···?”

“이해하려 들지 마요. 이쪽 세계 돌아가는 거는 당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이··· 이익!!! 아직 안 끝났어! 이사님들! 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플라톤 호텔을 굴지의 호텔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은 저 고장혁입니다!”

고장혁이 주주들 하나하나의 눈을 바라보며 읍소했다.

27% vs 28%

주주들이 나서준다면 충분히 경영권 방어가 가능하다.

하지만 주주들 대부분이 고장혁의 눈을 외면했다.

황룡이란 거인이 지금 눈앞에 있다.

“소용없을 겁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사진들. 밖으로 새어나가면 여기 계신 분들 주식 다 휴지조각 되거든요. 황룡 입장에선 어차피 푼돈이지만.”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안 셰프 안 건드릴 테니 제발···!”

풀썩-

고장혁은 이제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김 비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제가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정의구현하고 싶네요. 그러게, 순환출자 같은 꼼수는 함부로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플라톤 호텔이 어떻게 폭발적으로 성장했나 확인해보니, 아주 불법이란 불법은 다 저지르고 다니셨더라고요? 배임에, 횡령에,

뇌물수수에··· 금융법은 개나 주라는 소리입니까?”

“잘못했습니다! 이제 정직하게 장사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래도, 다 호텔 잘 되자고 한 일이니 마지막 기회는 드리겠습니다.”

“감사합···”

“검찰에 기소할 건데, 남은 시간 동안 지분 다 넘기고 필리핀 가서 숨어 살던지··· 아님, 경제사범으로 한 10년 푹 썩고 나올 건지 정하세요.”

기회를 줬다.

양자택일할 기회.

“그, 그렇게까지 하셔야···”

“사장 교체하는 명분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방송국에 뒷돈 줬다고 설명할까요? 그럼 플라톤 다 망하는데? 횡령 정도가 딱 적당하겠네요.”

“지분을 한 번에 넘기면 제값을 못 받을 텐데···”

“그럼 지분 꽁꽁 싸매고 경제사범?”

“크흑···!”

양자택일이지만, 사실상 선택권은 한 가지다.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지분을 넘길 수밖에 없다.

황룡 입장에서는 할인찬스 정도가 아니라, 무슨 핫딜 수준으로 호텔을 꿀꺽하는 셈이다.

고장혁의 입장에선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눈앞의 저 사람은 악귀다.

외국 회사인 소피아자산운용을 통해 슬금슬금 접근했다.

사건이 터지기도 전에, 이미 YD금융투자라는 회사를 설립해 플라톤을 노리고 있었다.

미리 찍어둔 사진으로, 찌라시 언론사를 움직이고 친동생까지 조종했다.

소름 돋는 치밀한 설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고작 요리사 하나를 건드린 것이라니!

정말 악마가 따로 없다.

그렇게 고장혁은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플라톤 호텔의 오너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시작은 작은 하마를 건드린 데서 시작됐다.

곧바로 새로운 사장이 선출됐다.

김강률이었다.

*

김강률은 이제 황룡그룹 비서실을 떠나, 플라톤 호텔의 운영을 맡았다.

학벌부터가 이미 깡패 수준이라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

그가 할 일은 이 호텔을 잘 굴리고 잘 불리는 일이다.

김 비서는 사장 자리에 앉자마자, 플라톤이 돌아가는 상황부터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 플라톤이 진행하려는 각종 사업을 확인했을 때,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빅픽처 프로젝트?”

에셰코 1등을 앞세운다라······.

김 비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는 굳이 덮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미 인프라까지 쫙 깔려있는 상태다.

그의 머릿속에 익숙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왕호였다.

< 역풍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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