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스가 다르다 1 (1) >
“프렌차이즈 요식 사업이라··· 에셰코 1등을 하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네.”
김강률은 고 사장의 심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큰 그림을 못 그리게 됐으니, 보복하려는 것도 얼추 납득이 간다.
고 사장은 에셰코 1등을 놓쳤지만, 김 비서가 사장으로 올라간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에셰코 우승자인 왕호와 친하다면 친하다고 할 수 있다.
한번 제안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살짝만 손 봐서.”
고장혁이 구상한 건 일반 프랜차이즈 식당이지만, 왕호를 앞세운다면 좀 더 메리트 있는 분야로 진출할 수 있다.
이미 레드오션인 일반 요식업계가 아니라, 몬스터 요리를 주로 취급하는 새로운 요식업.
몬스터 요식 프랜차이즈.
“타이밍까지 좋네.”
사업은 타이밍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의 몬스터 요리에 대한 관심이 더더욱 끓어오른 상태.
김강률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김 비서는 고 사장보다 사업적 수완이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라지는 않았다.
그러니, 플라톤 호텔을 헐값에 꿀꺽한 것이 아니던가.
“일단, 안 셰프님 설득하는 게 우선이겠네.”
*
‘먹거리! 그것이 알고싶다’ 조작방송의 여파가 사그라질 때쯤, 새로운 소식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이번 내용은 파급력이 더 컸다.
‘사회’란 뿐만 아니라 ‘경제’란에도 기사가 잔뜩 실릴 정도였으니까.
플라톤 호텔의 사장 교체.
자체 조사 결과, 사장의 경영비리 혐의가 포착되어 임시주총을 통한 CEO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라고 신문에는 적혀 있었다.
그 신문을 읽는 왕호는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진짜 세상 돌아가는 일은 다 믿을 수 없구나.”
사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호텔 측은 곧바로 고장혁을 횡령 혐의로 검찰에 기소했다.
고장혁은 자신이 가진 모든 지분을 빠르게 정리하고 자취를 감췄다.
여권이 정지됐지만, 이미 대한민국을 떠났을지 그 누가 알겠나.
죽었다고 위장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경제사범들도 있지 않나.
얼마 전엔, 실종 2주 만에 백골로 나타난 시체도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이번 횡령사건으로 인해, 주주들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호텔을 변화시켰다.
새로이 최고경영자에 오른 사람은, 와튼 스쿨 출신의 김강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황룡의 사람이다.
그렇다는 것은 곧 플라톤 호텔이 황룡그룹에 인수합병 된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아니나 다를까.
주식회사 플라톤호텔그룹은 황룡의 지주회사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엄청난 사건이다.
호텔 요식업에는 진출하지 않고 있던 재계 순위 4위의 황룡이, 요식사업에 진출하겠다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진출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왕호 덕분에 어부지리로 진출하게 됐다.
당연하게도 플라톤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미리 정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김 비서님··· 도대체 얼마를 이득 본 거야?”
주식의 주자도 모르는 왕호였지만, 단순 계산을 해봐도 엄청난 수치였다.
일단 단위 자체가 백억, 천억대다.
이제 왕호도 돈을 어느 정도 만질 수 있게 됐지만, 그래도 피부로 와닿는 가격은 억대 까지다.
그 이상은 별나라 세계다.
“천 억이면··· 은행에다 예치만 해 놔도 이자로 연봉 20억이네······.”
돈이 돈을 낳는다는 것이 무슨 얘기인지 확실하게 다가온다.
일은 왕호와 김 비서가 다 했지만, 황 회장은 앉아서 수백억 원을 벌었다.
물론, 그가 인수자금을 전부 댔으니 할 말은 없다만, 자본의 부조리함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왕호는 김 비서와 약속을 잡고, 플라톤 호텔 안에 위치한 고급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안에는 VIP들이 이용하는 회의실이 따로 존재했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는 김 비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왕호는 그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실소를 터트렸다.
“오늘도 아아 드시네요?”
“아아?”
처음 듣는 용어에, 김 비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동생들이 그렇게 부르거든요.”
“아~ 아아! 하하하, 유학할 때는 그냥 아이스 커피였는데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노라고 부르더군요.”
“겨울인데 얼음이 넘어가세요?”
“한 번에 들이키는 걸 좋아합니다. 다 마시고 얼음 오도독 씹어 먹는 재미도 있죠.”
별나긴 하지만 취향은 존중한다.
민트초코 중독자 여름이도 이해했는데, 이것쯤이야 뭐······.
왕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카페 내부를 살폈다.
인테리어가 살벌하기 그지없다.
대형 상들리에 하나만 하더라도 무슨 3억은 족히 할 것 같았다.
“맨날 별다방에서만 보다가 이런 고급 카페는 처음이네요.”
“이제 여기 대표라서 맘껏 먹을 수 있습니다. 셰프님도 생각나면 들르세요. 법카로 대접하겠습니다. 참고로 법카는 법인카드의 줄임말입니다. 아아 같은 거죠 하하하. 이제 좀 신세대 같나요?”
“아, 예······.”
신세대라는 말 자체부터 아재 향기가 풍긴다.
“그럼 이제 김 비서님이 아니라 김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되나요?”
“아뇨. 어차피 저도 월급쟁이입니다. 그냥 계속 김 비서라고 불러주세요. 정감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게 더 익숙합니다.”
“예. 김 비서님.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월급쟁이라 해도 사장 아닙니까.”
“바지죠 바지. 그래도 설거지보다는 재밌습니다.”
“설거지요?”
“황룡가 아드님들 사고 치면 가서 수습하는 겁니다. 설거지랑 비슷하죠.”
“헐··· 제가 알던 비서 역할은 아니었네요. 아, 하긴 경영대 나오셨다고 하셨죠. 사장 일은 할 만하십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겁니다.”
말을 마친 김 비서가, 옆 의자 위에 올려진 서류 하나를 왕호에게 건넸다.
“플라톤에서 이런 걸 계획 중이었더라고요. 제가 조금 고쳐서 제안서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한 번 보시고 말씀 주세요.”
스르륵-
왕호는 받아든 제안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꼼꼼히 살폈다.
“이래서 저를 그렇게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었군요.”
“본의 아니게 깽판 쳐놓은 셈이니까요.”
“몬스터 요식 프랜차이즈라··· 저를 메인 모델 겸 레시피 연구 총책임자로 쓰시겠다구요?”
“예. 이제 막 출범할 거라서 조건은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겁니다.”
“매출액에 비례해서 게런티를 받는다니, 저야 좋긴 하지만······.”
확실히 구매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다.
만약 자신이 요리사가 아니라 장사치였다면, 단숨에 수락했을 정도다.
하지만, 확신이 서질 않는다.
“아직 셰프 칭호를 달기도 애매한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전국에 요리를 판다?
함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전국망이라, 모든 요리를 직접 만들 수 없다.
당연히 버프를 걸 수도 없으며, 그렇게 되면 맛의 퀄리티는 옵티머스에 직접 와서 먹는 것보다 확연히 떨어질 거다.
요리 대가나, 장인의 레시피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름을 걸고 떳떳이 판매할 수 있을까.
왕호가 크게 고민하자, 김 비서가 왕호를 다독였다.
“에이스 ‘셰프’ 코리아 우승하지 않으셨습니까. 충분히 셰프 자격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아마추어 대회이기도 하고, 케빈 오 셰프나 중식대가 이연걸 셰프에 비하면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겸손한 겁니까, 아님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시는 겁니까? 안 셰프님의 네임벨류는 이미 충분합니다. 고 사장은 에셰코 1등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대중에게 어필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차피 타겟은 몬스터 요리를 쉽게 접하기 힘
든 일반 대중들이니까요. 박리다매 형태로 갈 겁니다.”
“몬스터 고기가 비싼데, 박리다매가 가능할까요?”
“레드혼 카우같은 저레벨 고기를 주로 사용할 겁니다. 인프라만 잘 구축되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전문 힐러도 따로 고용해 도축 공장에 상주시킬 거고요. 저레벨 몬스터는 저레벨 힐러로도 해독 가능하니 충분히 가격 경쟁력 있죠. 대기업 유통
망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마세요.”
김 비서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뛰어난 사업적 재능뿐만 아니라, 사업가의 최고 덕목이라는 사람을 잘 다독일 줄 알았다.
김 비서가 말을 이었다.
“이참에, 안 셰프님도 셰프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해보시죠. 안 셰프님이 말한 그 대가들도 처음엔 셰프님처럼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더 낫다고도 볼 수 있죠. 입맛 까칠한 회장님들도 만족시켰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만약 제
가 도박사였다면, 안 셰프님이 대한민국 스타 셰프로 성장할 거에 전 재산 베팅했습니다. 이 승부사이자 전자두뇌 김강률이 보증한다는 말입니다.”
김 비서가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팡팡 치며 자신했다.
왕호는 김 비서의 자뻑아닌 자뻑에 웃음을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하,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는 사람은 김 비서님이 처음입니다. 저번에도 그러시던데···”
“팩트죠.”
결정했다.
문과 끝판왕 김 비서까지 보증하고 있지 않나.
“알겠습니다. 한번 해볼게요! 대신, 저도 제 이름 걸고 하는 만큼, 권한은 보장해주셔야 됩니다.”
“물론이죠. 어차피 안 셰프님 덕에 플라톤을 헐값에 꿀꺽했죠. 수익에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겁니다. 브랜드 이미지와 이름값만 올려도 이득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육 권한은 전부 일임하겠습니다.”
“좋아요! 여기 써진 대로 맞죠? 처음엔 전국에 10개 매장을 직영으로 열고, 그다음에 가맹점을 받는다.”
“일단 10개 지점은 확정이고, 반응이 좋으면 직영점을 더 늘릴 생각입니다. 물론, 가맹점은 직영점이 자리를 확실히 잡으면 그때 진행할 거구요. 반응이 좋지 않으면 기존 직영점만 유지하는 선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교육장은 강남에 지을 생각입니다.”
“기왕 하는 거, 인기 많았으면 좋겠네요.”
“충분히 그럴 겁니다. 저는 왕호 씨 믿으니까요! 나믿왕믿!”
“아니, 언제적 유행어를···”
“하하하, 혹시 압니까? 셰프님의 커리어가 쌓이면, 고급 브랜드까지 런칭될지? 5성급 레스토랑으로 말입니다. 아주, 유명한 셰프가 되시는 거죠.”
“김칫국을 거의 사발 채 드링킹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김 비서님 결혼하실 때 뷔페는 제가 다 맡겠습니다.”
“오! 대박!”
짝짝짝짝-
김 비서가 물개박수 치며 기쁨을 표했다.
“지금 좋아할 일 아닌데요? 장가 빨리 가시라는 말입니다. 제가 저 정도로 유명해지려면 한 20년은 더 흘러야 될 거 같은데, 그때까지 안 가실 작정이세요? 지금 벌써 마흔을 넘겼구만.”
“흠··· 말하는 게 꼭 저희 어머니 같군요. 저만큼 똑똑한 짝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평생 안 나타나겠네······. 일 좀 줄이세요. 워커홀릭도 김 비서님 정도는 진짜 처음 봅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주기적으로 검사받는데 아직까지 정자왕이랍니다. 혹시 몰라서 정자은행에도 보관 중입니다. 하하하! 아직 10년은 거뜬합니다!”
“그럴 정성으로 연애를 좀······.”
왕호는 장가 못난 삼촌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김 비서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그래도 자식은 갖고 싶나 보네.
김 비서를 바라보는 왕호의 눈빛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왕호가 무언가 떠오른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 직영점에서 일할 요리사들은 정해진 겁니까?”
“호텔 소속 요리사들을 뺄 수는 없으니, 새로 채용해야죠.”
“그럼, 제가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오! 좋은 요리사들 있습니까?”
“많죠. 조작방송 피해자들이요. 끝까지 버티신 분들 대부분이 요리사이신데, 실력도 있고 깡도 좋습니다.”
“또, 오지랖 발동하신 겁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 비서도 눈을 번뜩였다.
“오지랖이 아니라, 썩고 있는 인재 추천하는 거죠. 그리고 민사소송 배상금이 500만 원이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원래 법이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언론 플레이까지 하면 브랜드 이미지도 좋아지겠죠. 이거, 저도 생각 못 한 아주 좋은 전략이네요. 이젠 사업하셔도 되겠습니다?”
“사업적으로 접근했으면 생각 못 했을 거 같은데요?”
“하하, 인정합니다.”
“그럼, 언제쯤 시작하실 거예요?”
“인프라가 잘 깔려 있어서,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얼추 마무리되면, 제가 먼저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회의 같지 않은 회의가 마무리되자, 왕호는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노란색 종이로 포장된 무언가를 꺼내서는 김 비서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저 나가면 드세요. 양갱입니다.”
“양갱?”
김 비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양갱을?
아직 이빨은 멀쩡한데······.
“요새 소화 잘 안 되시죠? 딱 봐도 소화불량이네. 그거 고쳐주는 버프 음식이니까 남기지 말고 혼자 드세요.”
“그걸 어떻게···?”
김 비서의 눈이 동그랑땡처럼 커졌다.
어떻게 알긴.
아까 노총각 삼촌 느낌 받았을 때, 안쓰러워서 진찰 스킬을 사용했다.
역시나 일 중독자답게 만성 소화불량을 달고 있었다.
특히나, 플라톤 사장 자리에 앉게 된 만큼 더더욱 할 일이 쌓였을 테지.
“척 보면 압니다. 그러니까 일 좀 줄이고 잠을 많이 자세요. 아아를 그렇게나 많이 마시니 몸이 성할 리가 있나. 적당한 카페인은 업무에 도움이 되지만, 비서님처럼 막무가내면 나중에 진짜 큰일 납니다.”
“큰일이라면···?”
“괴수미식회 노인네들처럼 제 버프요리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정자왕 출신이라고 너무 자신하지 마세요. 송 사장꼴 나는 거 한순간입니다. 참고로 오지랖 아니라, 진짜 걱정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흠···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김 비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왕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평가를 조금 고쳐야 할 것 같았다.
‘사람 보는 눈 더 길러야겠네.’
< 클래스가 다르다 1 (1)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