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스가 다르다 3 (1) >
*
왕호는 여름이를 데려다 주고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박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주혁아!”
-오! 왕호형! 안 그래도 제가 먼저 전화하려고 했는데··· 방송 잘 봤어요! 반응 좋던데요?
“운이 좋았지. 대결에선 졌는데.”
-제가 볼 때는 실력적으로 진 것 같진 않아요. 시청자 반응도 비슷하구요. 아, 왜 전화하셨어요? 아직 뭐 특별한 스킬 배운 거는 없는데···
“그거 물어볼려고가 아니라, 영화 촬영장에 관해서 뭣 좀 알아보려고.”
-오, 뭔데요?
“그게···”
왕호는 박주혁에게 촬영장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촬영 시스템, 그리고 밥차에 대해서 이것저것 질문했다.
박주혁은 연극영화과 출신이며, 보조출연에 촬영 스태프까지 안 해본 것이 없기 때문에 영화 촬영 매커니즘에 아주 빠삭한 상태였다.
-형, 근데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
“여름이 때문인데 좀 복잡해. 여름이 기 살려주려고 생각 중인 게 있는데, 오히려 피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여름이한테 무슨 문제 생겼어요?
“음··· 얘기 길어질 거 같으니까 그냥 만나자. 카페로 올래? 양재역 별다방. 다희 단골 카페 알지?”
-옙!
왕호는 다이나믹 해치백을 끌고 카페로 향했다.
앉아서 기다리자, 박주혁도 회사차를 직접 끌고 도착했다.
“형!”
왕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박주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 안 탔네? 택시비 준다니까. 일단 앉아.”
“회사차 있는데 아깝게 택시를 왜 타요. 대표님이 일단은 저 보고 운전하라고 붙여준 거예요. 레벨 50 다 찍으면 매니저 붙여준다나? 이제 거의 다 찍었네요.”
“곧 캐스팅 되겠네? 스킬 잘 살려서 팍! 떠라.”
“걱정 마세요. 원래도 연기는 자신 있었는데 이제 날개 달았죠. 키야, 근데 별다방은 올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 해지네요. 예전에 알바해서 그런가?”
“너 여기 알바했었어?”
“미소지기 알바 할 때 같이 뛰었죠. 여기는 아니고 대학로점이요.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1년 정도?”
무슨 알바몬인가?
안 해본 알바가 대체 뭐야······.
뜨거운 청춘이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고, 지금이라도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되어 괜스레 왕호가 더 뿌듯해졌다.
박주혁은 카운터로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왔다.
알바몬이 아메리카노를 호호 불며 질문을 던졌다.
“여름이 지금 찍는 거 문제라도 생겼어요?”
“문제 까지는 아니고···”
왕호는 최유나와 녹화장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여름이에게 들은 촬영장 분위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역시나··· 박주혁의 표정도 잔뜩 일그러진다.
“와··· 진짜 미친년 소리가 절로 나오네요.”
“이런 애들 많아?”
“거의 없죠. 아! 저 예전에 보조출연 뛸 때, 촬영 도중에 감독이랑 싸우고 미국으로 도망간 여배우 있었어요. 탑급인데 그럴 줄 몰랐죠. 성격 진짜 쎄더라구요. 최유나 실제 성격은 오늘 처음 들었는데 거의 맞짱 뜨겠는데요?”
“여름이가 조금 힘들어하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도와줄까 하는데 이 방법은 어떨까? 원래는 최유나가 먼저 제안한 건데···”
왕호가 자신의 계획을 박주혁에게 털어놓았다.
밥차를 끌고가서 여름이를 응원한다.
이게 무슨 힘이 될까 싶지만, 최유나의 말에 비추어보면 어느정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 협박까지 해가며 와달라 한 것이 아니던가.
왕호의 계획을 들은 박주혁이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괜찮은데요?”
“괜찮아? 고작 밥 해주는 건데···”
“촬영이 힘들잖아요. 맛있는 식당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 진짜 맛있는 밥차가 딱! 오면 기분 째지죠.”
“째지기까지야···”
“괜히 팬클럽 애들이 우리 배우 기살리겠다고 비싼 밥차 보내는 게 아니라니까요? 예전에는 배우한테만 조공 보냈는데, 요새는 스태프 챙기는 게 더 효과적이에요.”
“조공?”
“팬까페 용어에요.”
“헐······.”
연예인 팬덤의 조공 문화를 몰랐던 왕호로써는, 박주혁의 말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조공이라니······.
거의 황제한테나 쓰는 단어가 아니던가.
그래, 효과 있다는 건 이제 알겠다.
허나,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
“근데, 최유나가 난리치지 않을까? 걔 성격상 100% 가만 있지 않을 거 같은데···”
보복이 문제였다.
나한테 하는 거는 크게 상관치 않는데, 여름이한테까지 피해갈까봐 그게 걱정되어 꺼려진다.
“보복할까봐요? 에이,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나? 가만히 있어도 여름이 스트레스 받을 거 같은데···”
“그렇지? 맨날 웃고 있어서 몰랐는데, 속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 거 같더라고.”
“최유나가 보복한다고 해도 어차피 촬영장에서 꼬리 치는 거나 SNS로 음해하는 걸 텐데, 밥차로 여름이 기 살려주면 촬영장 분위기야 바뀔 테고··· SNS는··· 우리도 이용하면 되죠. 형 팬 많잖아요. 정 문제 생길 것 같으면 대표님한테 도움 청하죠 뭐.”
“그래.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최유나의 팔로워가 몇 배는 많지만, 왕호에겐 진실이라는 무기가 있다.
거짓은 진실을 덮을 수 없으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필요한 거 다 말해줘.”
“일단, 응원 플랜카드는 필수고··· 밥차로 승부할 거니까 뷔페식으로··· 형 실력이면 맛이나 비주얼은 당연히 엄청날 거고··· 디저트까지 포장해서 나눠주면 끝장날 거 같은데요?”
역시, 전문가한테 물어보길 잘했다.
촬영장 짬밥이 쌓인 박주혁 답게, 필요한 것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기왕 할 거, 서프라이즈 식으로 가자.”
“좋죠. 깜짝파티.”
“주혁이 네가 내일 소속사 들어가서 촬영 스케쥴 좀 알아봐줘. 이왕이면 전 스태프 다 모이는 촬영날에 들어가게.”
“오케이! 완전 재밌겠네요.”
“제작사한테는 내가 따로 얘기해서 그날은 밥 준비하지 말라고 해야겠다. 물론, 감독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하고. 플랜카드도 깔쌈하게 준비해야겠네.”
“대박 기대되네요. 사진 꼭 찍어서 보내요!”
“직접 와서 봐.”
“네?”
깔깔대며 웃던 박주혁은 왕호의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다.
“너 어차피 아직 촬영 없잖아. 와서 일손 좀 더해라.”
“재미는 있겠는데··· 제가 도울 일이 뭐가 있다고···”
“없긴 왜 없어. 너 카페 알바 했었다며.”
“그건 왜··· 엥? 설마···”
박주혁의 입이 점점 벌어진다.
“커피 뽑을 줄 알지?”
“허, 당연하죠! 근데 복잡한 건 못해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카푸치노, 카페모카, 캬라멜 마끼야또, 프라푸치노, 과일스무디, 에이드, 또 뭐 있더라···”
“뭐야··· 그 정도면 거의 바리스타 아니야?”
“간단한 것들인데요 뭘. 기본적인 거는 다 알바생 시키잖아요.”
“그럼 막 라떼에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알바를 1년 밖에 안 해서 그건 좀··· 하트 정도는 그릴 수 있어요.”
“대박이네. 그럼 와서 바리스타 행세 좀 해라.”
“헐··· 그것도 에스프레소 머신이랑 재료가 있어야 하죠.”
“사면 되지.”
“네?”
박주혁이 당황했다.
왕호의 입에서 너무나도 쉽게 말이 튀어나왔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 그거 되게 비싸요··· 거의 커피포트 산다는 듯이 말하시네······.”
“나 돈 많다. 에스프레소 기계랑 또 뭐뭐 사놓으면 돼? 믹서기 같은 거는 옵티머스에 있으니까 그거 쓰고. 원두랑 재료랑··· 아니다, 그냥 너가 정리해서 카톡으로 알려줘.”
박주혁은 모른다.
왕호가 프랜차이즈 런칭과 도시락 모델 계약금으로 얼마를 땡겼는지······.
단순 계약금말이다.
런칭되면 지속적으로 로얄티가 들어올 거다.
“진심··· 이세요?”
“내가 말했잖아. 할 거면 제대로 하겠다고.”
“대박······. 여름이 놀라 까무러치겠네.”
“이거 잘 되면, 너 촬영할 때도 한 번 갈게.”
“오예. 약속했어요? 오랜만에 실력 발휘 해야겠네. 제 별명이 대학로 커피프린스였어요. 저 때문에 여자 손님 많아졌다고 사장님이 시급 올려줬었는데···”
박주혁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살랐다.
왕호도 그런 박주혁의 모습을 보고 미소지었다.
주혁이가 거든다면 임팩트를 더 강하게 줄 수 있을 거다.
일단, 잘 생겼잖나.
스탭들의 대부분이 남자라지만 여성 스탭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잘생긴 녀석이 커피까지 만들어준다?
아주 화룡점정이다.
---------
계획은 척척 진행됐다.
디데이 날자가 정해졌고, 왕호는 박주혁이 알려준 재료와 기계들을 전부 구입했다.
옵티머스 한 켠을 리모델링 해서 아예 카페를 차렸다.
“형··· 간단한 거 사면 되는데 무슨 업소용을··· 이거 진짜로 바리스타들이 사용하는 거잖아요······.”
“이런 거 말하는 거 아니었어?”
“한 50만 원 짜리 말한 건데 이건 뭐··· 3천은 족히 넘을 거 같네요······.”
“이태리 산이야. 3천 넘드라. 이번에만 쓰고 버릴 건 아니니 좋은 거 샀지. 앞으로 커피도 대접하게.”
재료도 사고, 메뉴도 다 정했고, 현수막도 의뢰를 맡겨놓았다.
옵티머스 직원들에게도 계획을 다 털어놨다.
-대박! 재밌겠다!!!
다들 신나했다.
다희, 상문이, 산이, 라이언 심, 그리고 예비 대학생 소녀들까지.
모두가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
다른 의자들 보다 화려하고 큼지막한 의자.
그 의자의 뒤에는 ‘최유나’ 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 의자에 최유나가 몸을 푹- 기댔다.
후다다닥-
그녀가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코디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각종 장비를 들고 다가왔다.
주물주물-
매니저는 의자 뒤에서 최유나의 어깨를 주무르고,
코디는 그녀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그녀의 화장을 고쳤다.
여왕 서비스!
그런 최유나의 모습을 몇몇 출연자들은 아니꼽게, 몇몇 출연자들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두 종류의 시선 모두, 최유나에게는 즐겁다.
그녀는 관심 자체를 즐기니까.
뒤에서 욕을 해도 상관없다.
스태프들은 이미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인터넷에 까발려도 팬클럽 규모 자체가 달라서 상대가 안 된다.
되려 욕만 먹을 거다.
최유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는 씨익 웃었다.
비중 있는 조연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최유나의 것에 비하면 거의 접이식 낚시의자나 마찬가지였다.
비중이 적거나, 아예 없는 출연자들은 의자에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촬영장 전체가 나오도록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인스타에 사진을 올렸다.
<오늘은 S#9 촬영 있는 날! 전 출연진 나오는 씬이라 이렇게 다들 모였어요~. 화기애애하죠? 오늘 촬영도 재밌게!
#영화촬영중 #NG는안돼요 #규모대박 #촬영팀힘내자 #배고파요>
소통을 가장한 자랑에 킥킥대고 있을 때, 감독이 최유나에게 다가왔다.
“유나 씨! 오늘도 깔끔하게 가자고! 롱테이크니까 긴장 좀 하고, 밥 먹기 전에 끝내는 걸로 오케이?”
“걱정마세요 감독니임~! 저 최유나에요~. 예쁘게 찍고 밥 편하게 먹어요~.”
최유나는 앉은 상태에서 감독의 팔뚝을 의도적으로 조물딱 대며 웃었다.
“하하하, 유나 씨는 척하면 척이네! 좋아, 그 여유 그대로 그림 잘 뽑아 봅시다!”
감독은 만족스런 웃음으로 주문을 마치고 제자리고 돌아갔다.
감독이 등을 돌리자, 최유나의 웃음이 싹 하고 사라졌다.
영업직 했으면 대성할 상이다.
그녀의 눈은 곧바로 잘생긴 남자 주연배우를 향했다.
빠직-
최유나의 이마에 힘줄 하나가 솟아올랐다.
‘어쭈? 저게 아직도 정신 못차렸네?’
서브 여주인 한여름이 남주와 웃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벌떡-!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여름에게 향했다.
“여름 씨! 감독님이 놀지말고 연기 연습 좀 하라는데? 오죽 했으면 나한테 대신 말해달라고 했겠어. 지금 감독님이 여름 씨 지켜보고 있으니까 연습하는 척이라도 해요.”
“아, 네······.”
최유나가 끼어들자 여름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본을 말아쥐고 자신의 의자로 향했다.
최유나는 한여름의 뒷모습을 비릿하게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주의 팔을 툭툭치며 웃었다.
“오빠! 쟤랑 무슨 얘기 했어요?”
“어? 별 얘기 안 했어. 다음 씬 합 한번 맞춰 본 거야.”
“혼자서 미리 연습해보고 올 것이지, 조금 민폐네요. 여름 씨 연기 좀 그렇지 않아요?”
“응? 난 잘 모르겠는데··· 저 정도면 괜찮지 않아?”
“감독님이 한여름 씨 때문에 맨날 골치 아프대잖아요. 저도 대신 전하는 거 조금 불편하구요. 왜 그런가 봤더니, 세상에 그거 알았어요?”
“뭔데?”
“밤 마다 클럽 가나봐요. 촬영 기간에는 좀 연기에 집중하면 덧나나? 그러니까 감독님이 혼내지. 에휴, 문란해라······.”
선동과 날조가 몸에 베였는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그래? 여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이따 내가 얘기 좀 해볼게. 우리 작품에 피해가면 안 되잖아.”
“에이, 아니라고 할 게 뻔하죠. 힘들게 오빠가 나서지 마세요. 제가 따로 얘기할게요. 여자끼리 여자 방식대로 해결할게요.”
“유나가 고생이 많네.”
“헤헤.”
최유나는 능숙한 배우답게 세상 착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최유나가 남주에게 꼬리치고 있을 때,
빵빵-
대형 트레일러를 매단 트럭 하나가, 촬영장에 나타났다.
길을 터달라는 경적소리에, 최유나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응?’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동그랑땡처럼 휘둥그레진 눈은 이내 반달을 그렸다.
자세히 보니 아는 트럭이다.
왕호네 밥차.
‘후후, 뺄 때는 언제고 인기는 얻고 싶었나 보네.’
최유나는 왕호가 생각을 바꿔 먹어 밥차를 끌고 온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남주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 저 차 뭔줄 알아요?”
“저거? 트럭 아니야? 멀어서 잘 안 보이네. 내가 눈이 좀 안 좋아서···”
“안왕호 셰프라고 알죠?”
“알지! 나 왕호님 팬이야. 요새 내식부 나와서 실력도 증명했잖아. 나는 레이드 방송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
“오! 잘 됐다. 저거 왕호네 밥차거든요.”
“진짜?!”
남주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근데, 왕호네 밥차가 여길 왜 와?”
“헤헤, 제가 불렀어요. 저번에 녹화 같이 해서 친하거든요. 오빠 맛있는 거 해주려고 특별히 부탁했죠.”
“정말? 와··· 유나 대단하네.”
이때 까지의 반응중 가장 격한 반응이다.
최유나의 미소도 그 어느 때보다 더 밝을 수밖에 없었다.
< 클래스가 다르다 3 (1)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