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스가 다르다 3 (4) >
“캇뜨!!!”
감독의 우렁찬 목소리가 촬영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컷 싸인이다.
감독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한여름을 칭찬했다.
“좋아! 다음 씬은 좀 더 상큼하게 가자고. 사과가 톡톡톡 터지는 스파클링 느낌으로! 가능하지?”
“트로피칼 분위기로요?”
“그르치!”
류 감독이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류 감독은 여타 영화감독과 마찬가지로 잘할 땐 격한 칭찬을, 연기가 마음에 안 들 땐 호되게 호통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왕호네 밥차가 오기 전까지, 류 감독은 한여름에게 이 정도의 격한 칭찬을 퍼부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유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한여름의 행실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당연히 정이 생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호네 밥차가 들른 이후로 상황이 변했다.
그깟 밥 한 끼가 무슨 대수인가 싶겠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버프의 영향으로 최유나의 가식이 예전만큼 잘 통하지 않게 되었다.
방송가에는 최유나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있다.
왕호가 내식부 MC들에게 전해 들은 바로 그 소문이다.
주로 함께 촬영을 했던 보조출연자들이 내는 말인데, 류 감독도 당연히 이 소문을 접했다.
하지만 그다지 신빙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대부분 보조출연진이 내는 말이었고, 같이 촬영을 진행해보니 아주 싹싹하기 그지없었다.
질투심에 의해 부풀려진 말이라 생각했었다.
허나, 요즘은 그것도 아닌 듯 보였다.
왕호의 개인적인 부탁도 있고 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니 한여름처럼 사글사글하고 배려 넘치는 배우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한여름의 행실이 좋지 않다고 알려준 최유나의 말이 점점 의심쩍게 다가왔다.
“5분만 쉬었다 가자고!”
감독의 오더가 떨어지자, 스탭들은 찌뿌둥해진 몸을 풀기 시작했다.
“여름 씨 점점 능숙해지는데? 이제 조명빨도 제대로 받을 줄 알고.”
평소에 말을 잘 섞지 않았던 조명감독도 한여름에게 다가와 칭찬을 날렸다.
“다 감독님께서 제대로 쏴주신 덕분이에요. 조명은 여배우의 생명 아니겠어요?”
“하하, 그것도 다 본판이 괜찮아야지.”
감독들이 한여름에게 말을 건넸다는 것 자체가, 여름이의 발언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해졌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특히, 왕호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류 감독과 남주인 고훈정이 최유나 못지않게 여름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고훈정이 다가왔다.
“여름 씨! 다음 씬 짧게 합 한번 맞추고 가요.”
“네! 좋아요!”
“근데, 여름 씨는 신인답지 않게 연기파네요. 처음에 각성자로 들어왔다고 해서 조금 의심했거든요 발연기하진 않을까.”
“고맙습니다! 선배님들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배워야죠!”
“오, 자세 좋은데요?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 물어보세요!”
“왕호님이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고훈정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고훈정이 수백만의 팬덤을 거느린 탑배우긴 하지만, 그도 어엿한 하나의 인간이다.
그도 취미가 있으며, 그 취미는 바로 요리와 레이드 방송 시청.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전문가는 왕호가 유일하다시피 했고, 고훈정은 그런 왕호의 매력에 푹 빠진 열성 팬 중 하나였다.
“음··· 말하자면 복잡해요. 레벨 올리려고 파티 맺었는데 제 첫 파티원이 왕호 오빠였어요. 오빠 첫 파티원도 저였구요. 당연히 친해질 수밖에 없었죠.”
“와··· 그럼 왕호님 사냥 장면을 직접 목격했겠네요? 아니지··· 사냥을 아예 같이했겠네요?”
“그쵸.”
“어땠어요? 내 평생의 소원이 왕호님 레이드 장면을 맨눈으로 보는 건데··· 난 비각성자라 꿈도 못 꿀 일이죠······.”
갑자기 시무룩해진 고훈정이 고개를 팍 떨궜다.
‘뭐야 이 선배··· 이상해······.’
한여름은 살짝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사생팬에 하도 시달려서 이 사람도 극성팬이 된 걸까?
“···멋있죠. 프라이팬이랑 장미칼로 몬스터 잘도 잡잖아요. 그거 살 때도 같이 갔었는데··· 안 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이처럼 눈 휘둥그레져가지고··· 완전 재밌었는데 헤헤. 그때가 살짝 그립네요···”
“와, 그때도 같이 있었어요? 당연히 마도구겠죠?”
“마도구 아니면 벌써 박살 났죠. 근데 그것도 아마 저 레벨 50전에 산 거라···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닐 거예요. 좀 바꿨으면 좋겠는데 쩝. 이제는 최고레벨 몬스터들 레이드하면서 아직도 그걸··· 안전이 달린 문젠데··· 에스프레소 머신 들일 생각이나 하고··· 촬
영 끝나고 이따 한 번 뭐라 하든 해야지 원······.”
고훈정은 갑자기 혼잣말을 하다 추억에 잠기는 한여름의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냈다.
고훈정은 로맨스물을 한두 번 찍어본 사람이 아니다.
아직은 어리다고 할 수 있는 한여름의 반응이 무얼 뜻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셋이 밥 한 끼 먹어요. 여름 씨가 주선 좀 해주세요.”
“네? 셋이요?”
“전 왕호님이랑 아직 안 친하잖아요. 여름 씨가 저 밀어주는 거죠. 그럼 저도 팍팍 밀어드리죠.”
“엥? 뭘 밀어준다는··· 뭐, 한 번 얘기는 꺼내 볼게요.”
여름이는 고훈정의 정확한 의도를 캐치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최유나는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사나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거슬린다.
상당히 거슬린다.
“아, 진심 짜증나.”
요새 최유나는 신경이 잔뜩 날카롭게 서 있었다.
사나운 고양이마냥 발톱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스태프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예전처럼 스킨십에도 민감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말을 잘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아직까지 통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나 점점 바뀌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 맘대로 촬영장을 쥐락펴락 못 할 거야. 아직 3개월은 족히 남았는데······.’
어찌어찌 찍는다면 영화의 결과물이야 크게 차이 나지 않겠지만, 스트레스받을 게 자명했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벌써부터 촬영장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최유나 허언증 엄청 심하네··· 인스타에 죄다 거짓말뿐이더라?”
“허언증만 있음 다행이지, 사이 안 좋은 조연들한테는 유언비어까지 만들어서 퍼트린다는데?”
“그럼, 그 방송가 소문이 사실이었어? 대박······.”
소문은, 진실의 눈을 뜬 몇몇 스탭들과 엑스트라들 사이로 퍼지기 시작했다.
엑스트라들은 최유나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들에게 동조하는 스태프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지만 모두가 최유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왕호의 버프가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효과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아직까지 최유나의 얼굴과 몸매에 홀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서브 남주인 천관희다.
천관희가 최유나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유나야. 요새 피곤해 보이더라? 이거 마셔. 따뜻한 커피 좀 사 왔어.”
최유나는 입술이 대빨 튀어나온 상태로 커피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오빠.”
“저번에 그 일 때문에 그래? 잊어버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뒤에서 호박씨 까는 애들한테는 내가 뭐라 했으니까, 이제 별말 없을 거야.”
“하, 나도 억울해. 안왕호가 분명 온다고 했단 말이야. 한여름이랑 짜고 내 뒤통수 친 거지.”
“저런··· 네 말대로 진짜 불여시인가 보네 여름 씨······.”
솔직히 말하면 천관희한테는 그리 공을 들이지 않았다.
그냥 살짝 툭툭 건드니 알아서 홀딱 넘어왔다.
진짜 공은 고훈정에게 쏟았는데, 요새 한여름이랑 바짝 붙어먹는 꼬라지를 보니 이미 물 건너간 거 같다.
최유나는 천관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습관처럼 SNS의 동향을 살폈다.
빠직-
디스플레이를 응시하는 최유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이게 뭐야!’
왕호의 계정에 아주 잘 편집된 영상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한여름을 위한 서프라이즈 준비 과정.
완벽한 서프라이즈 깜짝파티.
스탭들의 환상에 겨워하는 리액션.
역대급 밥차와 커피차, 그리고 조공까지!
완벽할 정도로 짜임새 있게 편집되어 있었다.
이 영상은 스태프들이 밥차응원 당시에 올린 포스트와 어우러져, SNS를 마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몰래카메라 과정을 담은 영상은 언제나 재밌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개꿀잼몰카’라는 유행어까지 나올 정도겠는가.
영상이 팔로워의 팔로워들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바이럴 마케팅의 교과서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반응은 역시나 뜨거웠다.
[-조공계의 혁명인데? 역시 왕호네 밥차 클라스···]
[-저거 고훈정이 새로 찍는 로코맞죠?]
[-ㅋㅋㅋ스태프들 인스타 봤음? 반응 난리 났던데 진짜 부럽다.]
[-저도 카메라 기사인데 언젠간 저런 밥차 꼭 받고 싶네요.]
[-한여름이 누구임? 인성갑 빛왕호가 응원할 정돈데 완전 무명이네. 난 오늘 처음 들음.]
[-신인이에요. 찾아보니 완전 러블리하더라구요. 오늘부터 팬 환승했습니다.]
[-같은 소속사였네. 왕호님 의리 쩐다. 저기 소속사 배우들은 저런 밥차 한 번씩 받는 거임? 개꿀인데 완전?]
[-바리스타 훈훈함 그 자체··· 완전 내 스탈~]
[-근데 최유나는 어디 감? 코빼기도 안 보이네. 소통여신이라면서 이번엔 인스타에 글도 안 올렸네.]
[-제 친구가 저기 촬영팀인데 최유나 설레발 치다가 흑역사 하나 생겼답니다. SNS에 올리려고 했는데 그건 제작사 측에서 막았다던데요?ㅋㅋㅋ 궁금하신 분은 DM 주세요ㅋㅋㅋ 1:1로 얘기해드림ㅋ]
부들부들-
스마트폰을 쥔 최유나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너무 화가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참고 있자니 홧병으로 입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도저히 두 연놈을 가만둘 수 없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왕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어떻게 멕이지?’
“괜찮아?”
최유나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천관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놈은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하지만 그런 천관희의 모습을 보자, 최유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수백만의 팔로워들을 동원하는 것뿐.
“오빠··· 나 너무 힘든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죠?”
“그럼그럼!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절반이 된다잖아! 끝나고··· 술 한잔할까? 내가 자주 가는 바 있거든? 거기 사장님이랑 잘 알아서 절대 소문 안 날 거야!”
역시나 이놈도 흑심 가득한 늑대새끼였다.
더더욱 천관희를 이용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오빠, 인스타 팔로워 몇 명이에요?”
“나? 얼마 안 되지. 한 100만?”
“나쁘지 않네. 맞아요 오빠 말대로 한여름 완전 여시에요 여시. 나 물 멕인 거만 봐도 불여시잖아요.”
“겉으로는 완전 순해 보이는데 역시 겉만 보고는 사람 몰라 그치?”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억울해서 못 살 거 같아요.”
“그럼 안 되지! 이 오빠가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하긴요. 공개적으로 한여름 진실 까발려야죠.”
왕호는 지금 이미지가 너무 좋아서, 팬덤의 공격만으로 어떻게 요리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무명인 한여름은 이 바닥에서 매장시킬 수 있다.
천관희의 팔로워는 고작 100만 명뿐이지만, 그래도 지금 한여름과 같이 촬영하고 있는 서브 남주.
600만의 자신과 힘을 합친다면, 분명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거다.
‘오빠들 다 동원해야겠어······.’
최유나는 천관희 말고도, 자신의 어장에 갇힌 다른 연예인들도 모조리 동원할 생각이었다.
전작을 같이 찍거나,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작업을 해 놓은 사람들.
기본적으로 팔로워 숫자가 500만 1,000만을 넘어간다.
‘그러게 쥐 죽은 듯 있어야지 깝치긴 왜 깝쳐! 나 보다 못 생긴게······.’
최유나의 입가에 복수의 미소가 자리했다.
*
다음 날, 하반기의 로맨스코미디 최고 기대작의 한 서브 여주가 대마초 파문에 휩싸였다.
마약 사건이라면 민감하기 그지없는 연예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최유나와 그녀의 어장 속 물고기들이 퍼트린 유언비어였다.
이 자극적인 유언비어는 수백만 수천만 팔로워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한여름의 소속사 대표인 배우 박하진은 곧바로 허위 사실이라며, 최초 유포자에게 강력한 법적 대응을 할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그런 소속사의 발 빠른 대처에도 불구하고, 영화 제작사 내에서는 배우를 교체해야 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리스크를 안고 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직 촬영 초반이라 배우 교체의 타격도 그리 심하지 않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후후후, 꼬시다 이년아.’
순식간에 돌아가는 판을 보며, 최유나는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한여름은 하차하고 다시 촬영장은 자신의 뜻대로 돌아갈 거다.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유나가 왕호를 건드리지 않은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왕호가 대상이었다면, 근거 없는 헛소리라며 금방 묻혔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최유나는 한 가지 실수를 같이 저질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여름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유언비어는 자연스레 한 사람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한여름과 아주 가까운 사람.
그가 격노했다.
“어떤 새끼야!!! 장난질한 새끼 당장 찾아내!!!”
< 클래스가 다르다 3 (4) > 끝
ⓒ 신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