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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꿈이라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산신령처럼 긴 수염을 자랑하는 노인은 오색의 구슬이 대자연의 정화가 집약된 음양오행의 결정체라고 했다.
아울러 자신은 인연이 닿은 후인이 그걸 취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를 바라며 그걸 남겼는데 인연이 비틀리면서 참으로 어렵게 뜻을 이뤘다고 했다.
'아무튼 꿈에서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는데 계속 꿈이 이어지는 것이 내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좀처럼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무래도 자동차 사고로 크게 다친 것 같다는 생각에 지훈은 겁이 덜컥 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꿈에서 빨리 깨어나야 해!'
이 상태가 지속되었다가는 그때처럼 코마 상태에 빠져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난 지훈은 일단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이게 꿈이라면 내가 구조를 받아야 끝이 날거야. 그나저나 이 자식은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늦은 것 아냐?'
현실에서도 그랬지만 자신이 현식과 함께 취중에 산에 오른 것은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봐도 아침이 확실했다.
'썩을 놈, 꿈속에서도 밥맛인 것은 변함이 없구나.'
이 정도의 시간이면 구조대가 왔어도 몇 번은 왔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현식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얘기였고, 이것이 꿈속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휴대폰을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지만 않았다면 내가 신고하는 건데, 그나저나 현실에서도 그랬을까?'
이때의 현식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아니, 그런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 어렵게 새 출발을 했을 때 현식은 기회만 생기면 자신의 일을 방해하면서 헐뜯고 다녔다.
사담이지만 만약 녀석의 방해가 없었으면 자신은 더 빨리 자리를 잡았을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막상 이런 꿈을 꾸고 있자니, 과거의 현실에서도 현식이 자신의 조난을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날 발견했던 시각이 몇 시였다고 했지, 아침이었던가? 참나, 어차피 꿈인데 그게 무슨 의미야?"
몇 시간이 지났음에도 구조대가 나타나지 않은 사실에 현식을 의심했던 지훈은 지금이 꿈이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다가 절벽 밑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를 들었다.
"밑에 누구 없어요."
"뭔 소리지?"
"도와주세요."
"이게 어디서 난 소리야?"
"암벽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어! 저것, 휴대폰 아냐?"
"맞네."
"여기 사람이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어! 저쪽이야."
"저기 사람이 있어."
"아저씨, 도와주세요."
"젊은이 괜찮은가?"
"다친 곳은 없는데 혼자서는 못 내려가겠어요."
워낙 이름 높은 산이다 보니 지리산은 이른 새벽부터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그 덕에 용케 지나가는 등산객의 목소리를 들은 지훈은 소리를 질러서 자신의 조난 사실을 알렸다.
"구조대에 연락을 할 테니까 기다리게."
"저 친구 때문에 저 아래쪽에 구조대가 나타났었나봐."
"그런 것 같네. 그런데 왜 여기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아래쪽 암벽에 매달려 있는 거지?"
"신고자가 장소를 혼동한 것 아냐?"
"그랬을지도 모르지. 암튼 구조대는 내가 불러올 테니까 자네는 이곳에 남아있게."
"알았네."
'구조대가 아래쪽에 있다고?'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구조대가 오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지훈은 지금의 상황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조난당한 장소는 MT를 왔던 같은 과 학우들과 함께 어제 낮에 올라왔던 장소였던 만큼 헷갈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숙소인 민박집에서 곧장 위쪽으로 올라오면 나오는 곳이어서 더더욱 이상했다.
'박현식, 너 설마?'
갈수록 현식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사이 등산객의 연락을 받은 구조대와 과 동기들이 몰려왔다.
"저기에 지훈이가 있다."
"지훈아, 괜찮아?"
"난 괜찮아."
"구조대 아저씨들이 왔으니까 안심하고 있어."
"알았어."
"현식아, 저쪽이라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미안해. 내가 술에 취한 상태해서 너무 당황해서 장소를 헷갈렸나봐."
"야! 헷갈릴 것이 따로 있지, 그런 것을 헷갈리면 어떡해?"
"미안해. 나도 경황이 없어서 그만."
"으이그, 그나마 지훈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아!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어."
'박현식, 이게 실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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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에서 내려온 구조대는 지훈의 몸을 로프로 단단히 결박한 후에 위쪽으로 끌어 올렸다.
구조대를 따라서 제법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암벽 위로 올라온 과 동기들은 지훈이 안전한 곳에 올라서자 우르르 몰려들었다.
"지훈아."
"야!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미안하다."
"수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오빠, 괜찮은 거야?"
지훈을 비롯해서 남학생들의 태반은 군대를 갔다 온 예비역이었던 탓에 여학생들보다는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이때의 수아는 지훈을 오빠라고 불렀다.
"살짝 긁히기만 했어."
"어디 봐?"
"별거 아냐."
"피부가 다 까져서 피가 났잖아?"
"이 정도의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웃음이 나와?
"미... 미안해."
비록 꿈이지만 너무도 좋아했던 수아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지훈은 행복감에 젖어서 아까와는 달리 제발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사이 몇몇 동기들은 지훈의 가슴을 가볍게 때리는 수아를 바라보면서 짓궂은 농담을 해왔다.
"수아야, 널 과부로 만들 뻔 했는데 겨우 그 정도 선에서 응징을 끝내면 안 된다."
"수아야, 네가 가슴을 졸였던 것을 생각해서 주먹에 체중을 팍팍 실어서 때려."
"수아야, 우리가 널 대신해서 지훈을 혼내줄까?"
"싫어요. 선배들은 우리 오빠 몸에 손끝 하나도 대지 마세요."
"우~와!"
"쩝, 부럽다. 이래서 CC가 최고라니깐!"
'수아야, 너무 반갑다. 아! 꿈에서 깨어나면 널 못 보겠지.'
조금 전까지 눈물을 글썽거렸던 수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을 홀기며 동기들을 바라보다가 질문을 해왔다.
"어두워서 깜깜했을 텐데 이런 곳에는 왜 올라온 거야?"
"그냥."
'내가 왜 올라왔더라?'
너무도 오래된 과거의 일이기에 그동안은 그 시각에 왜 그런 곳을 올랐는지 잊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현석의 제안으로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새끼, 그래놓고 구조대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
미래의 현실이 반영되어서 그런지 20여 년 전의 과거와는 달리 현석을 좋지 않게 여긴 지훈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현석을 바라봤다.
그는 지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수아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저 새끼, 저때부터 수아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가만! 저놈이 일부러 날 밀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현석의 눈에 수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담겨 있음을 확인한 지훈은 그가 자신을 일부러 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이 밑으로 떨어진 이유는 발을 헛디딘 통에 중심을 잃은 현석이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자신과 충돌해서 그리 되었다.
'아냐, 저놈이 아무리 형편없는 놈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닐 거야.'
묘하게도 상황이 계속 겹치다 보니 현석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깊어갔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면 너무도 끔찍하다는 생각에, 그리고 지금이 꿈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무의식중에 이 모든 상황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게다가 비록 꿈이지만 수아를 다시 만난 이 기쁜 상황을 현석이 때문에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억눌렀다.
그사이 지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현석이가 머리를 긁으며 다가왔다.
"지... 지훈아, 괘... 괜찮아?"
"야, 어떻게 된 거야?"
"뭐... 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