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스터 셰프-9화 (9/219)

<-- 9 회: 1-9 -->

"뭐... 뭐하는 거니?"

동석과 혜미는 MT 오기 전부터 은근히 썸을 타던 사이였다.

다만 그 누구도 고백을 안 해서 어정쩡한 사이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별안간 혜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불과 몇 센티의 간격을 두고 혜미와 마주한 동석은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져서 말을 더듬었다.

"누가 그랬는데 사람의 진실을 보려면 눈을 보래요."

"봐! 내 눈을 보면 너도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을 거야."

"오빠, 어떡하죠? 봐도 모르겠어요."

"이래도!"

"어마! 후~웁."

다른 과도 비슷하겠지만 MT를 다녀오고 나면 종종 커플이 생긴다.

비근한 예로 지훈과 수아도 작년 MT를 계기로 확실한 커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새로운 커플이 탄생했다.

그런데 올해는 너무도 이상했다.

무슨 말이냐면 동석과 혜미처럼 새로 시작하는 커플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무려 열다섯 커플이 컴컴한 숲속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다.

이는 순전히 지훈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분출한 음양오행의 기운 때문이었다.

음양오행의 기운은 식재료가 갖고 있는 본래의 기운을 극대화시켰고 나아가 이를 서로 어울리게 해서 조화를 맞췄다.

지훈이 만든, 또는 플레이팅을 한 음식을 먹고 많은 이들이 즐거워하거나 활력이 넘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런 마당에 술까지 들어가게 되자 더욱 즐거워지고 활력이 넘치다 못해 없던 용기까지 생긴 이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숨김없이 털어놨고, 결국 커플이 되었다.

물론 당사자인 지훈도 알고 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사상 유래 없는 수많은 커플이 탄생한 그날 밤, 지훈은 수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일도 수아와 함께 떠오른 태양을 볼 수 있을까?'

지금의 상황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은 지훈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오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아직도 믿기지 않은 지훈은 자고 일어나면 20년 후의 미래로 돌아갈까 싶어서 두려웠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해?"

"내가 그랬니?"

"응. 조금 전부터 말도 없이 나만 봤잖아."

"너무 좋아서 그래."

"뭐가?"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또 새벽의 일을 생각한 거야? 그건 그만 잊어버려."

"그래. 그럴게. 참! 내가 말한 음식을 꾸준히 먹고 건강검진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특히 암 같은 불치병은 젊었을 때부터 체크해."

"또 그 얘기야? 알았어."

"그리고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 생기면 내 레시피 노트는 네가 가져."

"무슨 일? 오빠, 어디 가?"

"아냐."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까 두려운 지훈은 수아와의 작별을 준비했다.

그래서 수아의 건강과 함께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마음의 짐으로 여겼던 레시피 노트를 언급하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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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한 계곡에는 상큼한 산안개가 아스라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민박 집 마루 위에 앉은 상태로 연인의 부드러운 숨결처럼 살포시 다가선 안개에 몸을 맡긴 지훈은 다시 맞이하는 아침을 음미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제게 다시 기회를 주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절 과거로 보낸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1분1초도 허투루 살지 않겠습니다.'

다시금 지리산에서 아침을 맞이한 지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자각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이전에는 불의의 사고로 접어야 했던,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요리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산나물 샐러드가 맛도 좋지만 건강에도 좋은 만큼 좀 더 다듬어서 요리로 만들면 괜찮겠어.'

잃었던 꿈을 다시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이 넘친 지훈은 산나물 샐러드와 관련한 것을 레시피 노트에 기재할 생각에 방으로 들어가서 배낭을 뒤졌다.

하지만 배낭 어디에도 레시피 노트는 없었다.

'레시피 노트가 어디 갔지?'

분명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가방 안에 있었던 레시피 노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지훈은 다시 마루로 나와서 누가 그걸 갖고 갖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박현식이었다.

'수아는 어제 하루 종일 나와 붙어 있었어.'

이전의 시간에서 레시피 노트를 훔쳐간 이는 수아였다.

아니, 박현식으로부터 그랬다고 들었다.

그러나 수아는 자신과 계속 같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져 갈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어제 레시피 노트를 주겠다고 했을 때도 어떤 경우에도 자신만의 레시피를 사용하겠다며 거부했었다.

반면 암벽의 사고에서부터 시작해서 박현식은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설마 이전의 시간에서도 현식이가 훔쳤을까?'

레시피 노트를 훔쳐간 이가 누구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육감이란 것이 있었고, 지훈의 육감은 박현식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전의 시간에서도 레시피 노트를 훔쳐간 이는 박현식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수아를 원망하고 저주했다는 건데... , 맞아! 요리사로서 자긍심 높은 수아가 그런 짓을 했을 리는 없어. 아! 그때는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전의 시간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이제야 알게 된 지훈은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부족한 인간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이번만큼은 수아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박현식, 내가 틀려서 네가 범인이 아니기를 빈다. 그러나 네가 정말로 범인이라면 그때는 다른 시간에서 저지른 일까지 감안해서,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너의 모든 것을 빼앗고 말겠다.'

남들과는 달리 20년의 미래를 살다 온 지훈은 박현식이 얼마나 차갑고 위선적인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막말로 그가 나서서 사사건건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훨씬 빨리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는데, 그의 방해로 너무도 힘든 길을 어렵게 돌아가야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영화 작업도 동석의 소개로 일을 하게 되었지.'

요리사의 꿈을 포기하고 푸드 스타일리스트와 테라피스트의 일을 했을 때 모두가 방해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아준 이도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동석이도 있었는데 머리가 벗겨지고 뚱뚱한 아저씨가 된 동석은 40대 중반이 되었음에도 독신이었다.

'머리만 안 벗겨지고 체중 관리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탈모 예방에 좋은 백수오와 들깨 그리고 당근과 두유를 자주 먹으라고 해야겠어.'

지금과는 다른 시간대의 미래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동석에게 적잖은 신세를 졌던 지훈은 이번에는 자신이 은혜를 갚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지훈의 눈에 혜미의 손은 꼭 잡은 동석이가 민박집 바로 옆의 계곡에서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얼레, 저것 봐라!'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동석과 혜미는 지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건 밤사이에 둘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했다.

'잘 됐어! 둘을 팍팍 밀어야겠어. 그런데 이전의 시간에도 둘이 커플이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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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캠프파이어 때문에 오전 늦게야 일어난 조리학과 학생들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차비를 했다.

그런데 간밤에 새롭게 연인이 된 커플들 때문에 과 전체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라서 곳곳에서 핑크빛 하트가 터져 나왔다.

"동석아, 은연중에 분위기가 이상하더니 언제 그렇게 됐냐?"

"새벽에 내가 고백을 했어."

"둘이 너무 잘 어울리던데 잘했다. 그러고 보면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하는 법이야."

"말도 마라. 그때는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리던지 아예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자식, 그때의 감정을 절대 잊지 말고 앞으로도 잘해."

"당연하지."

"참! 여자들은 머리까지고 배나온 남자는 정말 싫어하니까지금부터 관리 잘해."

"헉!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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