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회: 1-10(4. 넌 D플러스야!) -->
"왜?"
"우리 집은 대대로 대머리인데 나도 머리가 벗겨지면 혜미가 싫어할까?"
이때의 동석은 약간은 살집은 있지만 충분히 봐줄 만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짐작이지만 20대 후반부터 심한 탈모에 시달렸던 동석은 그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면서 비만에 이른 것 같았다.
"임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백수오와 들깨 그리고 당근과 두유를 자주 먹고 튀김요리는 멀리 해."
"그것들을 먹으면 탈모에 좋아?"
"그래. 그리고 소나 돼지의 간도 탈모예방에 좋아."
"확실하지?"
"내가 언제 허튼 소리 하는 것 봤어? 그러니 나만 믿고 그것들을 즐겨 먹어."
"알았어. 그런데 서울 가서 뭐하지? 오늘이 공식 첫날인데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잖아? 연애 선배로서 해줄 조언은 없냐?"
"오늘은 토요일인데 우리와 같이 영화 보는 게 어때? 그리고 내일은 놀이공원을 가고."
"그건 너무 흔한 레퍼토리 아니냐?"
"짜샤, 그게 정석이고 훌륭한 레시피야. 자고로 연애도 레시피대로 쭉 따라가면 돼."
이번이 동석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임을 잘 알고 있는 지훈은 그의 청춘사업을 팍팍 밀어줄 생각에 함께 영화를 보자는 제안을 했다.
반면 변변한 연애 경험이 없는 동석은 선뜻 결정을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혜미에게 물어볼게."
"야! 그런 것을 물어볼 필요가 어디 있어. 혜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남자는 때로는 박력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해. 경고하는데 남자가 질질 끌려 다니면 여자가 금방 싫증낸다."
"그... 그런가?"
"수아에게 얘기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어."
동석 커플과의 더블데이트를 추진한 지훈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박현식을 발견하고 쳐다봤다.
올 때부터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박현식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은연중에 지훈의 눈치를 살폈다.
'애가 왜 이래?'
단짝 친구로만 여겼던 이전에는 전혀 모르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를 눈여겨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지훈은 박현식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그가 무슨 꿍꿍이로 그리 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겼다.
그사이 수아를 음해할 기회만 노리던 박현식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레시피 노트를 언급했다.
"지훈아, 그 노트를 수아에게 줬니?"
"무슨 노트?"
"네가 항상 챙기고 다니는 작은 노트 있잖아?"
"무슨 노트를 말하지, 노트가 여러 개라 잘 모르겠는데."
"왜 있잖아? 네가 틈만 나면 뭔가를 메모하는 다이어리 형태의 노트, 그것 레시피를 적은 것 아니었어?"
"그게 왜?"
여러모로 의심스러웠음에도 박현식을 범인이라고 단정하지 못한 까닭은 레시피 노트의 정체를 그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랬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노트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았음에도 모른 척 했는데 짐작대로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역시 이 녀석도 레시피 노트를 알고 있었구나.'
"맞지? 아까 보니까 수아가 갖고 있던 데, 네가 준 것 아니었어?"
"그... 그래?"
"네가 준거야?"
"내가 준 것은 아니고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했었는데 갖고 갖나 보지."
"네가 준다고 했다고?"
"응."
'이놈, 대체 무슨 꿍꿍이냐?'
수아가 레시피 노트를 갖고 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얘기를 박현식이 언급한다는 것은 짐작대로 그가 노트를 훔쳐갔다는 의미였다.
다만 박현식이 무슨 의도로 그 일을 수아에게 덮어씌우려 하는지 의문스러워서 살살 미끼를 던졌다.
한편 수아를 노트 절도범으로 몰려고 했던 박현식은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 전개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획을 급히 변경해서 수아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수아가 그걸 몰래 훔친 줄만 알고, 괜히 고민했네. 수아가 워낙 요리에 욕심이 많은데다가 손버릇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어서......"
"뭐라고?"
"내가 친구라서 하는 얘기인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도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수아가 손버릇이 있나봐. 여자들, 그날이 되면 충동성 도벽이 생긴다고 하던데 그런 것 아닐까?"
"뭐! 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지훈아, 진정해. 그리고 네가 이렇게 나오면 어렵게 얘기한 내 입장은 어떻게 돼?"
"박현식, 수아는 그런 애가 아니니까 두 번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 마."
"알았어. 진정하고 내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줘."
'개자식, 나와 수아를 이간질 할 생각이었더냐? 예전에는 몰라서 당했겠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박현식의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었지만 그리 끝내기에는 지난날의 고통과 아픔이 너무도 컸기에 지훈은 솟구치는 분노를 꾹 억눌렀다.
대신 박현식의 모든 것을 철저히 부수고 빼앗겠다는 아까의 결심을 더욱 확고히 했다.
++++++
4. 넌 D플러스야!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올 때면 흐드러지게 피어난 모란이 가지째 흔들리며 고운 잎을 살그머니 떨어트렸다.
덕분에 화단가에 자리한 벤치 주변에는 바람에 휘날려온 모란 잎이 꽃종이마냥 쌓여 있었다.
'내일 이론 시험은 외식서비스 영어와 식품학인가?'
MT를 다녀 온 지 어느덧 3주가 되었다.
그사이 20여년 만에 젊어진 부모님을 다시 만난 지훈은 실습이라는 핑계로 종종 요리를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하면서 그분들의 건강을 챙겼다.
아울러 학교에서는 연애초보인 동석을 팍팍 밀어주고 있었고, 그 덕에 지훈 커플과 동석 커플은 무척 친해져서 중간고사도 함께 준비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직 안 끝났나. 뭐 이렇게 오래 걸려?'
5월이 되면서 대학은 중간고사라는 괴물이 온통 장악을 해서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는 조리학과도 마찬가지였는데 조리학과는 그 특성상 필기와 실습을 병행해서 시험을 치루다 보니 더더욱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 똑같은 경험을 한 지훈은 아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는 마지막 발악을 했었는데, 그리고 그 결과가 너무도 처참해서 학교를 떠났었는데.'
20여 년 전에는 사고로 미각을 잃은 사실을 부정했다.
아니, 미각을 잃었어도 요리사가 될 수 있다고 여겨서 더 독하게 시험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제법 잘 치른 필기와는 달리 실습에서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고 그게 계기가 되어 학교를 떠났었다.
"오빠."
"지훈 선배."
"지훈아, 거기 있었냐?"
처참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의 아픔을 곱씹고 있을 무렵 수아와 혜미 그리고 동석이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야! 30분 만에 시험 문제를 다 풀게, 우리가 너처럼 천재인 줄 알아?"
"우리가 예상했던 문제가 그대로 나왔는데 못 풀 것도 없지."
"징그러운 놈, 너 잘났다."
"지훈 선배, 오늘도 시험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정말 족집게가 따로 없던데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는 게 어때요?"
"그렇게 말하면 동석이가 예상한 문제가 더 많이 나왔으니까 나보다 동석이가 더한 족집게이지."
"어쨌든 선배랑 동석 오빠 덕분에 이번 중간시험은 너무 잘 본 것 같아요."
"혜미야, 장학금 받으면 한 턱 내야 한다."
"까짓것, 장학금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죠."
"휴~! 다들 시험을 잘 봤나 보네."
"왜, 넌 못 봤어?"
"뒷부분에서 답을 제대로 못 적었어."
"뒷부분이면 동석이 네가 예상했던 내용들이잖아?"
"진짜로 시험에 나올 줄은 몰랐지."
똑같은 시험을 치러본 경험이 있는 지훈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예상 출제 문제를 뽑았다.
다만 너무 정확하게 뽑아내면 이상하게 여길까봐 일부분은 동석이가 예상한 것처럼 적당히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