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스터 셰프-12화 (12/219)

<-- 12 회: 1-12 -->

"푸~하! 어이없다. 지훈이가 컨닝을 한다고? 누가 그래? 너희들도 비슷하겠지만 4학년은 영어만 단답형이고 다른 과목은 전부 논술형인데 컨닝을 어떻게 해?"

지훈이 부정행위를 한다는 말에 동석은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부정했다.

반면 지훈은 그런 소문이 돈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박현식을 떠올렸다.

'녀석이 또 수작을 부리나?'

과거에는 워낙 실습 시험을 망쳤기에 그런 소문이 돌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시험은 달랐는데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소문이 돈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런 소문을 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을 낼 사람은 겉으로는 친구인척 하지만 자신을 해코지 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박현식 밖에 없었다.

'이놈을 어떻게 한다?'

소문을 유포한 주범이 박현식임을 대번에 간파한 지훈은 야비하기 그지없는 그의 수작을 절대로 간과할 수가 없었다.

한편 지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목격한 동석은 또다시 지훈을 변호했다.

"지훈아, 네가 답안지를 워낙 빨리 제출해서 그런 소문이 도는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 솔직히 컨닝을 해서 답안을 작성했다면 그 시간 안에 그걸 다 쓰는 것도 불가능할걸. 막말로 감독을 한 교수님이 눈 뜬 장님도 아니고 그걸 모르겠어?"

"지훈 선배님이 답안지를 빨리 제출했다고요?"

"그래. 지훈이는 거의 모든 과목을 30분 안에 답안 작성을 끝냈는데 그 시간 안에 교수님 몰래 커닝을 해서 답안 작성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누구라도 어려울걸요."

"저도 컨닝을 몇 번 해봐서 알지만 교수님 눈치 보느라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리던데요."

"맞아! 대체 어떤 새끼가 그런 소문을 냈지?"

얼토당토않은 소문에 흥분한 동석이가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향해서 거친 말을 내뱉은 순간 지훈은 혼자말로 낮게 뇌까렸다.

"우리만 따로 공부하니까 현식이가 많이 섭섭했나 보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현식이 그 자식이 그런 소문을 냈다는 거야?"

"그때 현식이가 눈치를 보면서 다른 동기들에게 수군거린 것을 봤거든. 하지만 내 답안지를 보면 그게 헛소문이라는 것이 금방 밝혀질 거야."

"이 녀석을 당장!"

"됐어. 지 딴에는 섭섭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냥 모른 척 넘어가. 나중에 소주 한 잔 하면서 풀면 돼."

이에는 이, 주먹에는 주먹이라고 했다.

비슷한 방법으로 소문의 당사자가 박현식임을 밝힌 지훈은 후배들에게 커피를 사준 후에 커피 전문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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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커피 전문점에서의 일은 2학년 여학생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서 하루 만에 과의 모든 학생들이 알게 되면서 소문의 내용이 살짝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훈에게 쏠렸던 부정행위의 누명이 모두 벗겨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리과 학생들은 소문의 최초 유포자가 박현식임을 똑똑히 알게 되었고, 정황상 지훈의 부정행위가 헛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소문의 중심에 선 지훈은 마지막 두 과목을 제일 앞자리에서 봤고, 여느 과목과 마찬가지로 30분 만에 모든 답안 작성을 끝내고 나갔다.

"오빠, 이번에도 오빠가 예상했던 문제들이 나왔더라?"

"답안은 잘 작성했지?"

"만족스럽게 봤어. 그런데 실기가 걱정이야."

"충분히 준비했으니까 잘 볼 수 있을 거야."

"박휘순 교수님은 입맛이 까다로우셔서 맛을 잘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어."

"평소처럼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야. 특히 프랑스 요리는 네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거잖아"

마지막 남은 시험은 누벨퀴진으로 불리는 프랑스 현대 요리 실습이었는데 오늘의 주제는 라따뚜이였다.

프랑스 남부의 대표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라따뚜이는 프랑스 국민이 가장 즐겨먹는 가정식인데 간단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요리였다.

즉, 평범하기에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그만큼 조리 실력이 맛을 좌우하는 요리로 소스의 맛이 아주 중요했다.

"오빠, 다른 애들은 새우나 해산물을 넣은 소스를 만들 거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할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라따뚜이의 핵심은 토마토 소스와 야채의 조화를 살려내는 건데 해산물을 넣으면 라따뚜이의 본래 맛을 잃을 수도 있어."

"그래도 새우나 해산물이 들어가면 식감도 좋아지고 맛이 풍부해지지 않을까?"

"수아야, 누벨퀴진은 오뜨퀴진으로 표현되는 프랑스 부유층의 고급 요리에 반발해서 나온 새로운 개념의 대중적이고 간편한 요리야."

"그러니 누벨퀴진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한 것이 좋다는 거지?"

"맞아. 가장 평범한 요리가 가장 맛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라따뚜이야. 박 교수님이 누벨퀴진의 시험 요리를 라따뚜이로 선정한 것도 그것 때문일 거야."

"알았어."

지금 하는 얘기는 20여 년 전 박휘순 교수가 심사에 들어가기 직전에 직접 한 말이었다.

당시 미각을 잃었던 지훈은 맛을 낼 자신이 없어서 새우를 비롯한 해산물을 듬뿍 넣었다.

하지만 아까운 새우와 해산물만 버렸다는 핀잔과 함께 최악의 맛이라는 평가를 받고 음식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수모를 당했었다.

"노력한 만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니까 자신을 가져."

"고마워, 오빠.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요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너무 욕심을 냈나봐."

"우리 중에서 르꼬르동 블루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면 그건 네가 될 거야."

"오빠도 내가 르꼬르동 블루에 들어가고 싶은 걸 알고 있었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지."

"헤헤~! 오빠는 어쩔 거야?"

"고민 중이야."

"오빠라면 거기서도 최고가 될 수 있을 텐데 같이 가자."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 더 고민해볼래."

원래대로라면 프랑스 요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하는 수아는 현식과 함께 르꼬르동 블루에 입학하는데 르꼬르동 블루를 가고 싶은 것은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법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유학 생활을 감당하기에는 지훈의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유학비용을 조달한 방법이 없을까?'

늘 그렇지만 결국은 돈이 문제였고, 이 상태라면 수아가 박현식과 함께 프랑스로 가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절대 그렇게는 못해!"

"뭐가?"

"아냐. 그런데 토마토 페이스트는 어떻게 할 거야?"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을 내뱉은 지훈은 당황하며 급히 말을 돌렸다.

다행히 시험에만 몰두하고 있던 수아는 더 이상 그 얘기를 언급하지 않고 질문에 대답했다.

"이제부터 만들어야지. 오빠는?"

"난 집에서 만들어 왔는데 도와줄까?"

"아냐. 시험인데 내가 직접 만들어야지."

"우선 가자. 동석이와 혜미도 토마토 페이스트를 만든다고 했으니까 조리실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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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 가스레인지의 열기로 가득 찼던 조리실에는 안경을 쓴 마른 체구의 박휘순 교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4학년 학생들로 가득했다.

분명 가스레인지의 불은 모두 꺼졌지만 묘한 열기로 가득 찬 조리실을 바라보던 박 교수는 가장 앞쪽의 조리대를 차지하고 있는 여섯 명의 요리를 맛보며 평가에 들어갔다.

"쯧쯧, 이래가지고 요리로 밥 먹고 살겠니?"

"예?"

"새우의 비린내를 잡으려고 따로 익힌 후에 나중에 집어넣지?"

"그랬습니다."

"이건 새우 맛이 강하게 나는 것이 라따뚜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새우 찜도 아니고, 대체 무슨 요리를 한 거니?"

"라따뚜이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게 무슨 요리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걸. 그리고 이게 라따뚜이라고 하면 성난 목소리로 아니라고 할 거다."

"죄송합니다."

"쯧쯧, 다들 비싼 재료만 낭비했구나. 에구, 이걸 그냥 찜으로 먹었으면 얼마나 맛있었을까? 니들 여섯 명은 전부 C플러스야."

"교수님, 4학년인데 C뿔이라니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그것도 4학년인 것을 감안해서 후하게 준거야. 3학년만 됐어도 전부 낙제야."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첫 번째 열의 평가를 마친 박 교수는 두 번째 열로 이동해서 평가에 들어갔다.

모두 여섯 칸의 조리대가 있는 두 번째 열에는 지훈 커플과 동석 커플 그리고 박현식과 다른 학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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