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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황이라는게 있잖아요."
"혜미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궁금하니까 빨리 얘기해줘."
"수아야, 내 말 잘 들어."
얘기를 시작한 혜미는 MT때 지훈의 조난과 관련한 의문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혜미의 얘기를 다 들은 수아는 깜짝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로 지훈과 동석을 바라봤다.
"오빠, 정말이야?"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현식이가 날 일부러 밀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녀석이 아무리 내게 감정이 있었다고 해도 고의로 그러지는 안 했을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러면 구조대를 늦게 부르고 의도적으로 엉뚱한 곳으로 데려간 것은 사실이라는 거야?"
"그건 오직 현식이만 알고 있겠지. 그러나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야. 내가 절벽에 고립되어 있던 시간이 자그마치 몇 시간이나 되었거든."
"수아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지훈이가 조난당한 곳은 그날 낮에 우리 모두가 올랐던 곳이야. 그러니 거길 두 번이나 가본 사람이 장소를 혼동하는게 말이 돼? 게다가 방향도 정반대잖아?"
"박현식 선배가 왜 그런 짓을......?"
"그 자식이 널 짝사랑한다잖아."
"뭐?"
"동석아, 그만해. 수아야, 유쾌하지 않은 일인데 신경 쓰지 마."
"아!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빠가 현식 선배와 안 어울리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솔직히 그 일만 생각하면 껄끄러워서 녀석과 같이 다니기 싫었어. 그리고 중간고사 때의 일도 있었고."
동석의 연애를 지원한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다른 시간에서 박현식의 비열함을 여실히 느낀 지훈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를 멀리했다.
반면 수아는 이제야 그 사정을 알고 지훈을 이해했다.
하지만 사정을 뒤늦게 깨달은 만큼 박현식에 대한 분노가 커져서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씩씩 거렸다.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그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인 줄 몰랐어."
"수아야, 클럽에서 부킹이나 하면서 약물을 먹는 사람인데 오죽하겠어?"
"유쾌하지 않은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우리 얘기나 하자. 동석아, 너는 방학 때 뭐할 거냐?"
더 이상 박현식을 화제에 올리고 싶지 않은 지훈은 분위기를 급히 수습하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박현식에게 크게 실망한 수아는 언제고 그를 만나면 따지고 들어가서 반드시 지훈에게 사과를 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사흘 후에 바로 배낭여행을 갈 생각이야."
"그리 빨리 간다고, 그래서 키친 마스터에 안 나간다고 했구나?"
"나가봐야 입상하기도 어렵고, 이번이 사실상 학창 시절의 마지막 방학인데 둘만의 추억을 만들기로 했어."
조리과의 특성 상 겨울 방학 때는 이미 취직을 해서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니 이번 여름방학이 학창 시절의 마지막 방학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데?"
"동남아를 돌기로 했어."
"동남아면 태국?"
"태국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를 돌 생각이야."
"3개국이면 시간이 꽤나 걸리겠네?"
"30일 일정이라 너와 수아가 결선 무대에 진출하면 응원할 수 있어."
"너희들 응원 받으려면 반드시 결선무대에 진출해야겠네."
"당연하지. 설마 그럴 자신도 없으면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예선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겠지?"
"예선탈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승 상금 받아서 멋들어지게 쏠 테니까 걱정마라."
"꼭 그래야 한다. 그리고 우승하면 마지막 인사 때 나와 혜미도 언급해라."
"한국 들어올 때 선물 사가지고 오는 거지?"
"짜샤, 돈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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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도 했겠다, 그동안 늘 붙어 다녔던 동석 커플과도 한동안 이별을 해야 했기에 지훈은 자신들만의 쫑파티를 했다.
"동석아, 잘 갔다 와."
"혜미야, 좋은 시간 보내."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우리만 가서 미안하다."
"수아야, 종종 SNS에 소식 올릴게. 그리고 거기 가서도 너와 지훈 오빠가 꼭 결선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기원할게."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오로지 여행을 즐겨. 그리고 동석 오빠와도 예쁜 추억을 많이 쌓고."
"히힛, 알았어."
"지훈아, 우리 갈게."
"건강 조심하고, 출발 전에 전화하고."
"우리 배웅을 못해주는 만큼 최종 예선 잘 봐서 꼭 결선에 진출해야 한다."
"알았으니까, 들어가."
동석 커플이 출발하는 월요일에는 본선 진출자 100명을 뽑는 최종 예선이 벌어지기에 배웅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키친 마스터는 100명을 선발하는 최종 예선부터 방송에 나간다.
"오빠, 내일 몇 시까지 실습실로 나올 거야?"
"장을 보려면 마트에서 만나는게 좋지 않을까? 학교에서 가까운 하나로 마트에서 9시30분에 보는게 어때?"
"그때까지 갈게요."
최종 예선에 대비해서 지훈과 연습을 함께 하기로 한 수아는 내일 만날 시간을 정하고 집으로 향하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박현식이 꼭 할 얘기가 있다면서 만나자는 채팅 문자를 보내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선배, 어딘데요?
-네가 편한 장소로 내가 갈게.
-성북역 근처에서 볼까요?
-좋아! 거기서 보자.
안 그래도 박현식을 만나서 따지고 싶었던 수아는 잘 됐다 싶어서 약속을 잡았다.
얼마 후, 약속장소인 호프에 당도한 수아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박현식과 마주했다.
"잘 있었지?"
"몸은 어때요?"
"괘... 괜찮아."
아무에게도 말 안했지만 교통사고로 신경을 다친 박현식은 후각을 상실하면서 빠르게 미각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부정하면서 다시금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미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건강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내가 여기 나온 이유는 선배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예요."
"그 전에 내말부터 들어볼래. 너 르꼬르동 블루에 들어가고 싶지 않니?"
"그걸 선배가 왜 묻죠?"
"학비부터 생활비까지 적지 않은 돈이 들 텐데 경비는 마련했니? 그리고 지금부터는 불어 학원도 다니면서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지 않을까?"
"불어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있어요."
"외국어는 발음 때문에도 독학으로 배우기가 힘들어서 원어민에게 배워야 해."
"그게 선배와 무슨 상관이죠?"
"학원비는 물론이고 항공료와 학비 그리고 프랑스 현지 생활비까지 내가 부담을 할 테니까 나와 함께 프랑스로 갈래?"
자신과 관련한 소문을 비롯해서 따돌림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박현식은 르꼬르동 블루에 들어갈 생각으로 휴학을 했다.
아울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자신이 미각을 되찾을 수도 있다고 여겼고, 설령 미각을 못 찾는다고 해도 르꼬르동 블루의 졸업장만 획득하면 외식업체를 설립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한 학기만 다니면 졸업이라 지금 휴학을 하는 것이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그 문제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복학을 하면 해결되는 문제라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졸업보다 더 마음에 걸린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수아였다.
"선배가 왜 그런 얘기를 내게 하죠? 그리고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요."
"수아야, 무슨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줘. 난 단지 네 실력이 너무 아까워서 그래."
"그 문제는 제 나름대로 해결책이 있으니까 선배가 신경을 안 썼으면 좋겠네요."
"적지 않은 돈이 들 텐데 네가 무슨 수로 해결해? 그리고 르꼬르동 블루만 졸업하면 내가 설립하는 외식 업체의 마스터 셰프 자리를 너에게 줄게."
박현식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재력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서 전국적인 외식업체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밝히며 마스터 셰프 자리로 수아를 유혹했다.
하지만 수아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무슨 수를 써서도 수아를 유혹할 생각이었던 박현식은 최음제를 준비해온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