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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것도 매년! 아까는 미국의 CIA에서 똑같은 제안을 해왔는데, 지훈이 덕에 다른 학생들도 덕을 보겠구나."
셰프를 꿈꾸는 이라면 누구랄 것 없이 르꼬르동 블루나 CIA에서 요리를 배우고 싶어 했고, 이는 동석도 마찬가지여서 지훈과 함께 르꼬르동 블루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9개월간의 학비만 3,600만원이 넘게 드는데다가 파리의 살인적인 물가를 생각하면 엄두가 안 나서 포기했다.
하지만 학비가 면제되고 주거공간이 제공된다니 생각이 확 달라졌다.
"교수님, 르꼬르동 블루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년 이뤄지는 정기적인 프로그램인 만큼 올해에는 4학년을 보내야겠지. 1학기 성적을 토대로 희망자를 뽑을 생각이다."
"교수님, 저와 혜미도 르꼬르동 블루를 가고 싶습니다. 성적순이라면 저와 혜미도 자격 조건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수아를 비롯해서 너와 혜미는 지훈이가 이미 얘기를 했는지 그쪽에서도 너희들의 이름을 먼저 거론하더구나."
"그쪽에서 지훈과 수아만이 아니라 저와 혜미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고요?"
"지훈이가 뽀이도퀴시 셰프에게 우리학과 학생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면서 추천을 했다지 뭐냐?"
"짜식!"
르꼬르동 블루와 CIA의 제안은 동석에 의해서 그날 바로 알려졌고, 조리학과 학생회실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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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생들이 더위를 참아가며 학생회실에서 각종 응원도구를 만들고 있을 무렵 지훈은 기능성 음료 CF를 찍기 위해 촬영장을 찾았다.
며칠 전에 카레와 라면의 CF를 찍으면서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긴 탓인지, 지훈의 태도에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덕분에 스태프들도 편안하게 촬영을 준비했고 지훈은 상대역을 맡은 여자가 분장을 끝내고 나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콘티를 살폈다.
콘티에 의하면 지훈과 상대 여자는 다정한 연인사이였는데 끝부분에는 키스신도 있었다.
'키스를 진짜로 하는 것은 아니겠지?'
콘티를 보기 전까지는 여유가 넘쳤던 지훈도 막상 키스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괜히 긴장이 되어서 자꾸 마른 침을 삼켰다.
그사이 분장을 마친 상대역을 맡은 여자가 스태프들에게 연신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어! 저 여자는 리아잖아.'
콘티에는 상대역을 맡은 여자가 누구인지 안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훈은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왜냐하면 리아는 우리나라와 아시아를 넘어서 그야말로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가수이자 연기자였다.
특히 그녀의 첫 번째 발라드 곡은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는데 그 기간이 자그마치 14주나 되었다.
덕분에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그녀는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에 선정되어서 매년 최고의 시청률을 갱신한다는 슈퍼볼에 초대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녀가 주연을 맡은 영화나 드라마는 하나같이 대성공을 거두어서 나중에는 캐스팅만 확정되어도 세계 각국에서 앞 다퉈 판권을 사갈 정도였는데, 다른 시간대에서 지훈은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다.
'저런 슈퍼스타가 나와 함께 CF를 찍는다고?'
콘티에도 나와 있지만 이번 CF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지훈은 어떻게 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궁리했다.
'아! 아직은 리아가 인기를 끌기 전이구나.'
연예계 데뷔 3년 차인 리아는 지금까지 두 장의 앨범을 발표했는데 그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물론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어서 어느 정도 얼굴을 알리기는 했지만 완벽한 스타로 보기에는 어려웠다.
'맞아! 처음에는 댄스 가수로 섹시를 밀고 나왔다가 나중에 이미지를 청순 발랄함으로 바꾸고 발라드를 부르면서 스타덤에 올랐었어. 그게 언제였지? 아! 올 겨울이겠구나.'
지금은 아니지만 올 겨울을 기점으로 세계 최고의 스타로 성장하는 리아와 함께 CF를 하게 되다니 지훈은 이 순간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반면 자신이 세계 최고의 스타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리아는 지훈에게도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오세요, 리아씨"
"어머!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럼요. 예전부터 팬이었는데요."
"저도 이 셰프님의 팬이에요. 그래서 키친마스터는 매번 챙겨보면서 응원하고 있어요. 꼭 우승하세요!"
"리아씨가 응원을 해주니 힘이 나는데요. 꼭 우승해서 성원에 보답할게요."
"빈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리아씨 팬이에요. 그런데 한 가지가 너무 아쉬워요."
"뭐가요?"
"리아씨가 섹시함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보다는 청순 발랄함이 리아씨에게 여러모로 어울리는 것 같아요."
"청순 발랄함이요?"
"네. 리아씨는 음색이 너무 고아서 목소리 자체가 최고의 악기잖아요? 그리고 호소력이 짙은데다가 목소리에 감정까지 풍부한데 섹시함을 강조하다 보니 그런 장점들이 묻히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까워요."
지훈이 지금 하는 얘기들은 훗날 리아에 대한 평가로 하나같이 그녀를 슈퍼스타로 만들어주는 장점들이었다.
"이지훈 셰프님은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것 아니에요?"
"과대평가라니 천만에요. 장담하건데 리아씨는 이미지만 바꾸고 댄스곡이 아닌 발라드곡을 부르면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우리나라에서만이라도 떴으면 좋겠네요."
"제 말대로 그렇게 해보세요. 분명 세계를 누비는 슈퍼스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사실 발라드를 몇 곡 소개받기는 했는데 어찌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어요."
"어찌하기는요. 리아씨는 무조건 발라드를 불러야 해요. 특히 리아씨의 맑은 고음을 강조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셔야 해요."
"고음이요?"
"일부분만이라도 어떤 노래를 받았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지훈이 돕지 않는다고 해도 리아는 장차 슈퍼스타가 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를 너무도 좋아하는 지훈은 한 명의 팬으로써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고,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그래서 노래의 일부분을 들려주라고 했고, 지훈의 극찬에 힘과 용기를 얻은 리아는 두 곡의 발라드를 불렀다.
"방금 것도 괜찮기는 한데 살짝 부족한데 다른 노래는 더 없는가요?"
"방금 부른 두 곡 중에 한 곡을 고를 생각이었는데 마음에 안 드세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리아씨의 가창력에 노래가 한참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다른 노래는 더 없는가요?"
"한곡 더 있는데 그것도 불러볼까요?"
"불러주세요."
리아가 세 번째로 부른 노래는 그녀를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시킨 바로 그 곡이었다.
노래의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지금 듣는 곡이 장차 빌보드 정상을 장기간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훈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리아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며 극찬을 했다.
"방금 노래가 그렇게 좋은 가요?"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지금껏 들었던 그 누구의 노래보다 최고로 좋은데요."
"에이, 거짓말? 굳이 그런 거짓말은 안하셔도 되요."
"리아씨,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최고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노래의 전곡을 불러달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습니다."
"농담 아니시죠?"
"농담이라니요? 리아씨, 고민하지 마시고 이 노래를 밀고 나가세요. 제가 이 노래 나오면 주위 사람들에게 무조건 홍보하겠습니다."
"정말이죠. 약속하신 거예요? 저는 이지훈 셰프님만 믿고 이 곡으로 결정합니다."
"리아씨, 꼭 그렇게 하세요. 만약 이 노래가 히트하지 않으면 제가 상금을 털어서라도 시디며 음원을 몽땅 사들이겠습니다."
지훈과 리아의 대화는 촬영이 시작되면서 중단되었다.
그리고 5시간에 걸친 촬영이 끝났을 때는 오빠와 동생 사이가 되었다.
"오빠, 오늘 즐거웠어. 그리고 고마워."
"나도 즐거웠어. 그리고 미래의 슈퍼스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장차 세계 최고의 셰프와 함께 한 오늘의 촬영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너, 나중에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가 되었다고 나 모른 척 하면 안 된다?"
"오빠나 그러지 마?"
"나는 그런 일 절대 없을 거야."
"흥! 그 말을 어떻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