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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력에 비해서 성과는 더디기만 해서 이제 막 중급반에 접어들었고 아직은 아주 기본적인 회화만 가능했다.
"오빠, 유나 언니에게 부탁해볼까? 언니라면 프랑스에서 오래 생활해서 불어가 유창하잖아?"
"누나는 호텔에 취직을 한데다가 이제는 방송 프로까지 맡은 통에 많이 바쁘지 않을까?"
대회가 끝난 직후, 방송국에서는 지훈에게 요리 프로를 진행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방송국에서 제법 두둑한 출연료를 제시했음에도 프랑스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지훈은 정중하게 사양했고, 대신 강유나를 추천했다.
그리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강유나가 요리 프로를 맡았다.
"그러겠지? 아! 언니가 가르쳐주면 좋을 텐데."
"그냥 수강을 하나 더 끊으면 어때?"
"정 방법이 없으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외국어를 익히는 방법은 왕도가 없어서 자고로 많이 듣고 많이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기에 지훈 일행은 고육지책으로 수강신청을 추가할 생각이었다.
휴게실 한쪽 구석에서 프랑스인 원어민 교사와 얘기를 나누던 젊은 여자가 미소를 그리며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요? 아니, 프랑스어를 많이 배우고 싶은가요?"
지훈 일행에게 다가온 여자는 2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한국어가 어눌했다.
"네."
"내가 배워줄 수 있어요."
"아! 우리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 줄 수 있다고요?"
"맞아요. 나는 프랑스에서 24년 2개월 지냈어요."
"혹시 교민이세요?"
"나는 프랑스 사람이에요. 하지만 원래는 한국 사람인데 3살에 프랑스로 입양 갔어요."
"아!"
"내 이름은 마리에드리안인데 다들 마리안이라고 불러요. 난 지금은 한국에 있고 내년에는 프랑스로 가요. 나는 떠나기 전에 우리나라 말, 그러니까 한국말 많이 알고 싶어요."
자신을 마리안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지훈 일행에게 불어를 가르쳐 줄 테니 대신 한국말을 가르쳐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마리안, 우리를 가르칠 시간이 있으세요?"
"약간 피곤하지만 가능해요."
"저녁에 시간을 내줄 수 있어요?"
"나도 일을 해서 저녁에만 가능해요."
"지훈아, 좋은 기회인데 하자."
"수업은 어디서 하지?"
"내 집에서 수업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많이 더러워서 실망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만 해주면 좋죠. 그런데 강의료는 얼마나 드릴까요?"
"돈은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나도 한국어 배우니까요. 하지만 지훈씨가 해주는 요리는 먹고 싶어요."
"어! 저를 아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봐요. 그러나 진짜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나는 당신이 유명한 요리사라는 사실도 알아요."
"지훈아, 광고 얘기하는가 봐."
"맞아요. 광고에서 봤어요."
우연찮게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구한 지훈 일행은 그길로 마리안과 함께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이미 삼겹살을 여러 차례 먹어본 적 있는 마리안은 소주까지 시키며 마냥 좋아했다.
"마리안, 소주도 먹을 줄 아세요?"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 마셔요. 한국 사람은 소주를 너무 많이 먹어요."
"소주까지 마실 정도면 한국에 오래 있었나 보네요?"
"1년 9개월 넘었어요. 나는 한국에 계속 있고 싶은데 파파가 날 너무 보고 싶어 해요."
"1년 9개월이면 그동안 어학당이나 대학을 다녔나요?"
"어학당은 바빠서 못 갔어요. 한국에는 야간에 배울 수 있는 어학당이 아직 없어요."
어눌하지만 마리안이 한국말을 곧잘 했기에 지훈은 그녀가 교환학생으로 온 유학생인줄 알았다.
그런데 어학당이나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고 하자 한국에는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봤다.
"나는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프랑스 외교관이에요."
"오! 정말요?"
"네. 내가 한국 근무를 많이 원했어요. 하지만 곧 한국을 떠나야 해서 슬퍼요."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프랑스에는 언제 돌아가세요."
"내년 2월에 가요."
"어! 우리는 12월에 프랑스로 가요."
"12월이면 두 달 남았네요. 그런데 프랑스 가는 이유는 혹시 르꼬르동 블루?"
"네."
"아! 프랑스에 있는 내 집도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아요. 우리 프랑스에서도 만나요. 파파도 여러분을 환영할 거예요."
"좋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삼겹살은 노릇노릇하게 잘 익었고, 식성대로 쌈을 싼 일행들은 마리안과 함께 건배를 했다.
"마리안, 친구들끼리는 건배하는 표현보다는 짠 이라는 말을 자주해요. 그런데 프랑스어로는 건배가 뭐죠?"
"아 보트르 쌍떼라고 해요. 그런데 간단히 쌍떼라고도 해요."
"마리안, 쌍떼는 건강을 뜻하죠?"
"맞아요."
"그러면 보트르가 당신을 뜻하니까 상대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가요?"
"그런 셈이죠."
"오 멋진데요. 다 같이 아 보트르 쌍떼!"
"아 보트르 쌍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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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실험기구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연구실에는 누군가가 머리를 쥐어 싼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며칠 째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고 수염까지 덥수룩한 그는 유영용이었다.
"왜 안 될까, 뭐가 문제일까?"
심장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겠다며 연구팀을 꾸린 것이 8월 중순이었다.
그때만 해도 기적의 원인을 밝힌 이상 넉넉잡고 두 달이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세 달이 넘은 지금까지도 치료제 개발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도대체 그때의 약효가 발휘되지 않은 이유가 뭘까?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어떤 점일까?'
달 마크니를 먹은 환자들만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건 달 마크니에만 심장병을 치료할 수 있는 어떤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당시의 요리사가 사용했던 식재료들을 철저히 조사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성분까지 분석했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그때의 치료효과는 재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그때처럼 아예 달 마크니를 요리해서 환자들에게 먹여봤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혹시 그때의 요리사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었을까?'
너무도 막막하다 보니 유영용은 식재료가 아닌 요리사에게 어떤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은 재료를 사용하고 정확히 계측된 양으로 요리를 했다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효과는 발휘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효과도 발휘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요리사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아냐, 그럴 리는 없어. 아직 내가 밝히지 못한 것이 있을 거야. 그래, 내가 생각했던 성분 말고 식자재 안의 다른 성분이 그런 치료효과를 가져 왔을지도 몰라.'
"유 선생님, 뭐하세요?"
"응, 왜?"
"원장님이 사무실로 와서 진행상황을 보고하래요."
"지금?"
"네."
"휴~후! 가야지."
연구가 시작된 지 두 달이 넘은 시점부터 병원 측의 압박이 거세지더니 지금은 툭하면 호출하기 일쑤였다.
주섬주섬 실험 자료를 챙긴 유영용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힘없는 걸음으로 느릿느릿 원장실로 향했다.
"원장님,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 유 선생."
"전무님, 이 친구가 연구를 총괄하고 있는 유영용 선생입니다."
"반갑습니다, 유 선생님. 기획총괄본부장 이재철 전무입니다."
"유 선생, 전무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뭐하고 있어?"
"아! 네. 유영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