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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 지훈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기에 대중들은 리아에게 곡을 추천해준 이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이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리아의 노래를 들으면서 지훈은 마냥 흐뭇해했다.
옆에 앉아서 리아의 노래를 듣던 프랑스 커플이 서툰 영어로 한국 사람이냐고 먼저 질문을 해온 것은 그때였다.
"맞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오! 프랑스어를 잘하시네요?"
"저희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우리는 리아를 비롯해서 K-POP과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한국을 조만간 방문할 생각이고, 한국을 가게 되면 소주와 불고기 그리고 비빔밥 같은 한국 요리를 먹어보고 싶어요."
"소주 좋죠."
리아의 노래를 계기로 시작된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나중에는 주위의 다른 프랑스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K-POP과 한국 드라마 그리고 한국 음식에 대한 깊은 호감을 표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까지 드러냈다.
덕분에 지훈 일행은 아까의 불쾌함은 모두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까지 느꼈다.
그리고 지훈은 한국 음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반드시 한식을 세계화 시키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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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유학생들의 스터디 모임까지 끝낸 지훈 일행은 루피에르 부부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프랑스어를 공부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어서 숙소에서 메네사 부인과 또 다시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했다.
아프리카 이주민 2세인 메네사 부인은 지훈 일행이 마리안의 부모님으로 오해했던 흑인이었는데 지훈 일행을 위해서 매일 저녁이면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자청했다.
"오빠, 저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무슨 공연이 있는 것 아닐까?"
"가볼까?"
파리는 예술의 도시답게 거리 곳곳에서 소규모의 공연이 종종 벌어졌고, 이는 지하철역도 마찬가지였다.
두 달 정도 파리에서 지내면서 그런 공연을 종종 봐왔던 지훈 일행은 기대감을 안고 인파에 파묻혔는데 공연 내용은 놀랍게도 한국의 아이돌 그룹의 댄스를 따라하는 커버 댄스였다.
"오빠, 의상부터 시작해서 제법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은데."
"동작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연습도 꽤나 했나보다."
"그래도 우리 동석오빠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것 같아. 우리 오빠가 하면 저 사람들보다 훨씬 잘할 텐데."
"맞아! 동석이가 춤에는 일가견이 있지. 특히 걸 그룹 댄스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을 내가 알지."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K-POP에 맞춰서 춤을 추던 커버 댄스 그룹은 몇 곡을 연거푸 추더니 사회자로 보이는 이가 나와서 관객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핵심이 되는 동작을 알려주면서 따라하게 했는데 다들 제법 잘 따라 했다.
지훈 일행을 발견한 사회자가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온 것은 그때였다.
"맞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당신들이 나와서 제대로 된 댄스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오빠, 나가봐."
"나만?"
"우리는 노래를 불러줄게."
"여러분,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이번에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대에서 제대로 된 오리지널 댄스를 보여 줄 것입니다."
지훈 일행이 살짝 주춤하자 사회자는 능숙한 솜씨로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잠시 후, 일행과 함께 무대로 나간 지훈은 동석을 앞에 세우고 간략한 소개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노래를 부르고 동석은 춤을 추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관심을 보인 관객들이 눈을 반짝이고 있을 무렵 가사가 제거된 음악이 흘러나왔고 지훈 일행의 노래와 댄스가 시작되었다.
"오!"
"예~!"
"여러분, 같이 흔드세요."
"브라보~!"
다른 일행의 노래 실력도 제법이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동석의 댄스가 일품이었다.
특히 섹시한 동작을 할 때면 살짝 코믹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때마다 관객들은 박수와 함성을 보내며 열광했고, 많은 사람들은 지훈 일행의 즉석 공연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다.
그리고 함께 하자는 지훈의 제창에 커버 댄스 그룹이 다 같이 합류해서 동석과 함께 멋들어진 군무를 선보였다.
"와아아~!"
"꺄아~악!"
"짝짝짝~!"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는 노래가 끝났음에도 식을 줄 몰라서 박수와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적당한 타이밍에 앞으로 나선 사회자는 역시 한국 사람들은 확실히 대단하다면서 다시금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약 1초의 간격을 두고 두 번의 거대한 폭음이 지하철 역 내부에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꽝~!"
"캬아악~!"
"꽈~꽝!"
노래와 춤에 열광했던 관객들은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고 아래쪽에서 시커먼 연기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르자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승강장과 연결된 계단에서 피투성이의 사람들이 수없이 올라왔고, 겁에 질린 그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악을 질렀다.
"폭탄 테러다."
"아래 승강장에서 폭탄이 터졌어요."
"부상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불타는 지하철에 갇혀 있어요."
"누가 구조신고를 해주세요."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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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폭음과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승강장과 연결된 계단에서는 매캐한 유독 가스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공연을 보던 관객을 비롯해서 지하철 역 구내를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은 휴대 전화를 붙잡고 어딘가와 통화를 하다가 유독 가스를 피해서 지하철 역 밖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동석아, 혜미와 수아 데리고 올라가."
"넌 어디 가려고?"
"밑에 내려 가봐야겠어."
"구조대가 곧 도착할 건데 네가 왜 내려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구해야지."
"오빠, 같이 가."
"안 돼, 위험해."
"오빠는?"
"수아야, 나는 괜찮아. 동석아, 빨리 가."
"야!"
"동석아, 어서! 시간 없어."
"지훈아, 같이 가자."
"수아와 혜미는 어쩌고?"
"오빠!"
"수아야, 나도 금방 올라갈 테니까 빨리 올라가."
다른 일행의 등을 떠민 지훈은 겉옷을 벗어서 코와 입을 감싸고는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계단을 뚫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두 개의 지하철 선로가 교차하는 승강장에 당도한 지훈은 양철통처럼 찌그러진 채 불타오르고 있는 객차와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한쪽 귀퉁이가 통째로 날아간 벽면을 발견했다.
짐작이지만 폭발물은 지하철 객차 내부와 벽면에서 각각 터진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이방인인 지훈은 별 관심이 없어서 무심코 넘겼지만 프랑스 정부는 얼마 전에 오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말리에 군대를 파병했고, 전폭기를 출격시켜서 폭격을 강행했었다.
이는 내전에 휘말린 말리 정부군을 돕고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계속해서 도시를 공격하는 이슬람 반군의 군사행동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반군은 군사행동을 자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질로 억류하고 있던 프랑스 기자 8명을 처형했고 프랑스군의 즉각적인 철군을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는 자국의 기자들이 처형을 당하자 더욱 강도 높은 폭격을 강행했는데 오늘의 테러는 이에 대한 이슬람 반군의 보복이었다.
"우선 지하철 안의 사람부터 구해야겠어."
승강장 곳곳에도 시체처럼 쓰러진 사람이 즐비했지만 이는 지하철 객차 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활활 타오르고 있는 두 칸의 객차 안에는 아직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힘없이 유리창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