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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어학원부터 시작해서 안면이 있는 프랑스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지훈을 알아보고 악수를 청하거나 또는 사인을 요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보는 프랑스인의 시각이 매우 우호적으로 바뀌었고, 양국 관계가 무척 친밀해진 점이었다.
그 덕에 지지부진했던 문화재 반환 협상이 가볍게 마무리되었고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의 문화재가 수백 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갔다.
아울러 각 방송국들은 앞 다퉈 한국 드라마와 예능 프로를 수입했고 리아를 비롯한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도 이전보다 훨씬 많이 소개되었다.
또 한국의 온라인 게임도 대거 수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이미지가 좋아지면서 한국산 가전제품과 자동차의 판매량도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심지어 리그앙에 진출한 한국 축구 선수들은 한국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팬들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 변화의 중심에 선 지훈은 이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어학원을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었다.
"오빠, 어떤 메뉴를 할 거야?"
"한식을 하는 게 어떨까?"
"마리안은 그동안 계속해서 한식을 먹었을 텐데 좋아할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면 프랑스 음식과 한식을 함께 만들면 어떨까? 루피에르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그동안 한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잖아?"
"궁합이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아."
"궁합이야 우리가 맞추면 되지."
테러가 벌어진지 10여일이 지나면서 2월 20일이 되었고, 오늘은 마리안이 2년간의 한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주말이라 학원수업이 없는 지훈 일행은 마리안의 귀국을 환영하고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해준 루피에르 부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저녁만찬을 준비하기로 했다.
"한식은 뭐로 하지?"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고기류 두어 가지와 잡채에 비빔밥을 하는 게 가장 무난하지 않을까?"
"괜찮을 것 같은데."
"지훈아, 그러면 프랑스 요리는 뭐로 할 거냐?"
"마리안이 굴을 무척 좋아했었으니까 굴 카나페와 생선과 조개로 만드는 부이야베스 그리고 크레페를 하는 게 어때?"
"부이야베스가 있으면 따로 국물 요리를 할 필요는 없겠네?"
"그렇지."
"오빠, 마리안이 한국에 있을 때 달팽이 요리를 자주 얘기했는데 에스카르고도 하는 게 어떨까?"
"그래. 그것도 하자."
"그러면 시장부터 가자. 그런데 카르푸에 가면 한식 식재료를 살 수 있을까?"
"어쩔지 모르니까 두 명은 한국 식료품점을 가는 게 어떨까?"
"거긴 우리가 갈게."
역할을 분담한 지훈은 수아와 함께 라데팡스 지역에 있는 대형 매장인 카르푸로 이동했고 동석과 혜미는 한국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오빠, 고기류부터 사자."
"네가 사고 있어. 난 비빔밥과 크라페에 들어갈 야채를 구입할게."
"그러면 해산물 코너에서 만나."
"그래."
수아와 헤어진 지훈은 야채 코너에서 무와 양배추 그리고 마늘과 당근을 비롯해서 토마토와 생강까지 구입한 후에 청과 코너에서 사과와 배를 샀다.
그사이 고기를 구입한 수아는 싱싱한 생선과 조개 그리고 새우를 구입했다.
"오빠, 무는 왜 산 거야?"
"생채를 만들어서 비빔밥에 넣으려고."
"생채까지 만들려고?"
"이왕이면 제대로 만드는 게 좋지. 그리고 천식이 심한 루피에르 아저씨에게는 무가 아주 좋을 거야."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루피에르는 심한 천식 때문에 자꾸 쿨럭 거렸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지훈은 이번 기회에 폐와 기관지에 좋은 식재료들로 요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참고로 지훈이 구입한 모든 야채와 과일은 폐와 기관지에 좋은 효능을 보이는 성분들을 함유하고 있었다.
아울러 후식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홍삼을 달여서 벌꿀과 함께 홍삼차를 내올 생각이었는데, 홍삼도 기관지와 폐에 아주 좋은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오빠, 굴은 샀는데 달팽이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저쪽에 전용 코너가 있는 것 같던데."
달팽이까지 구입한 지훈은 동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혹시 구입하지 못한 식재료가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파리에는 교민을 비롯해서 유학생의 숫자가 상당해서 당면부터 고추장까지 필요한 모든 식자재를 구입했다고 했다.
"오빠, 무겁지?"
"괜찮아."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
"봉투가 터질 수도 있어서 이렇게 안고 가야 해."
이것저것 사다보니 종이로 만들어진 쇼핑 봉투가 가득 찼고, 지훈은 봉투가 터질까 무서워 품에 안았다.
그러다보니 수아는 지훈에게 모든 짐을 떠안긴 것이 미안해서 함께 들자고 했다.
미끄러지듯 나타난 한 대의 차가 지훈과 수아 앞에 멈춘 것은 그때였다.
"헤이, 어디 가는 거야?"
"어! 당신은?"
"그때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가서 미안해. 아니, 함께 사람을 구했어야 했는데 겁이 나서 그럴 수가 없었어."
"이봐, 그때는 정말 고마웠다. 아! 이름이 지훈이고, 한국인이라며? TV보고 알았어."
"그때 거기 있었던 거야?"
"네가 지하철 객차의 출입구를 열어줘서 탈출할 수 있었어."
"그랬구나. 몸은 괜찮아?"
"보시다시피."
갑작스레 나타난 승용차 안에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는데 그들은 지훈 일행에게 매번 인종차별의 뜻을 담고 있는 제스처를 취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당시의 지하철 안에 있었다니 묘한 인연이었다.
"건강에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다."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맞아."
"짐이 많은 것 같은데 탈래? 우리가 태워줄게."
"이봐, 친구. 은혜를 갚기 위함이니까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지 말아줘."
"그래줄 수 있겠어?"
"물론이지."
그들의 차에 올라탄 지훈과 수아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그 와중에 통성명을 했다.
금발에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에릭과 마찬가지로 건장한 체격에 머리를 빡빡 민 올리비에는 지훈처럼 자신들도 라데팡스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지훈, 그때의 일은 미안하다. 하지만 너와 네 친구들을 비하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장난이었어."
"사실이야. 우리는 너와 네 친구들의 황당해 하는 반응이 재미있어서 그랬어. 하지만 불쾌함을 준 것은 사실이니까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때는 정말 기분이 나빴어. 앞으로 우리를 포함해서 다른 아시아인들에게도 그런 장난을 안치겠다고 하면 사과를 받아주지."
"당연하지. 더 이상 그런 장난은 안칠 거야."
"나도 약속할게."
"좋아."
"오! 그러면 이제는 친구가 된 건가?"
"친구? 그래, 친구하자."
"예~! 반가워, 친구."
"나 역시 마찬가지야."
"지훈, 요리를 배우고 있다고?"
"맞아."
"TV를 보니까 한국에서는 네가 요리를 제일 잘해서 뽀이도퀴시 셰프의 초청으로 왔다면서?"
"제일 잘하는 것은 아니고 요리대회에서 1등 했어."
"그게 그거지."
"지훈, 한국 음식도 할 줄 알아?"
"그건 기본이지."
"정말? 우리도 언젠가 한국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있을까?"
"기회가 닿는다면 그렇게 하지."
"좋아. 기회는 우리가 만들지."
집에 당도할 때까지 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눈 지훈과 수아는 헤어지기 전에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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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무렵, 루피에르의 차가 저택에 들어섰다.
차가 멈추기 무섭게 밖으로 튀어나온 마리안은 메네사 부부와 포옹을 하며 상봉의 기쁨을 나누다가 기척을 듣고 뒤늦게 나온 지훈 일행과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