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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세페가 뛰어난 DJ가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음악선곡은 별로였어. 하지만 미녀들은 넘쳐나더라고."
3월 초에 르꼬르동 블루에 등록한 지훈 일행은 요리사를 양성하는 반에서 세 달간의 기본 과정을 모두 마치고 현재는 중급 과정을 교육받고 있었다.
르꼬르동 블루의 교육과정은 기본 과정부터 중급과 고급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과정은 3개월씩이었고, 총 9달의 교육을 받으면 졸업증서와 함께 메달을 수여했다.
참고로 각 과정은 공히 3개의 반으로 이루어졌는데 한 개의 반은 정원이 25명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비율은 프랑스인보다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외국인의 비율이 살짝 높아서 학생들의 대화는 영어와 불어가 혼용되고 있었다.
덕분에 지훈 일행은 자연스럽게 불어만이 아니라 영어 실력도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무척 즐거웠었나 보네?"
"최고였지. 참! 한국 노래도 여러 곡 나오더라고. 한국 댄스곡은 경쾌해서 좋은 것 같아."
"따끈따끈한 최신 곡을 다운 해놨으니까 필요하면 말해?"
"OK! 그것 좋지. 아! 오늘은 금요일인데 다함께 클럽을 가는 게 어때?"
"오늘 또 가려고?"
"어제 만난 레이디들을 다시 만나기로 했거든. 가봐야 알겠지만 오늘은 자기 친구들도 여러 명 데려온다고 했어."
이탈리아 국적의 마크는 상당히 건장한 체구에 선 굵은 외모를 갖고 있어서 남자다운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프랑스 여자들과 염문을 많이 뿌렸는데 지훈 일행과는 무척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지훈아, 여기 온 뒤로 클럽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경험 삼아 가보자."
"클럽을 가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곳에도 가봐야지. 그리고 수아와 혜미도 좋아할 거야."
"그럴까?"
파리에 온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나면서 여러모로 익숙해진 탓인지 동석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지루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차에 클럽을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게 되자 벌써부터 몸을 들썩거렸다.
"지훈, 가자. 내가 레이디들에게 지하철 참사의 영웅이 내 친구라고 큰소리 쳤는데 널 안 데리고 가면 허풍쟁이가 될 거야."
"마크, 몇 시에 갈 건데?"
테러가 벌어진지 얼추 네 달이 지나면서 지훈에 대한 관심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지훈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해오거나 악수를 청하는 이가 종종 있었고, 함께 요리를 배우는 동료들은 지하철 참사의 영웅이 지훈임을 알고 함께 공부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아울러 그때의 일을 계기로 프랑스 전역에 퍼진 한국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여전해서 이제는 유럽 내 한류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것이 프랑스였다.
덕분에 이제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이 프랑스를 찾아서 공연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밤 10시 30분에 만나서 들어가면 어때?"
"그때가 피크야?"
"오늘은 주말이라 11시면 꽉 찰 거야."
"좋아, 어디서 만날까?"
"시네마테크 지하에 있는 렉스 클럽을 갈 거니까 시네마테크 앞에서 만나는 게 어때? 시네마테크는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그럼, 몇 번이나 가봤는데 잘 알지."
어느 순간부터 앞으로 나선 동석은 신이 나서 약속을 잡더니 혜미와 수아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다.
"혜미야, 오늘 저녁에 클럽으로 놀러가자."
"클럽?"
"그래. 파리의 클럽은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 경험해보는 것도 색다르지 않을까? 같이 갈 거지?"
"왜 하필 오늘이야?"
"왜?"
"안나가 자기 집으로 몇몇 여학생들을 초대했는데 우리도 초대받았어."
"거기 가서 뭐할 건데?"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타국 생활의 외로움도 해소하고, 또 안나가 스위스 요리를 알려준다고 했거든."
"스위스 요리를 알려준다고? 그러면 나와 지훈도 갈까?"
"오빠, 미안해. 오늘은 여자들끼리만 뭉치기로 했어."
뚱뚱한 체형을 자랑하는 안나는 지훈 일행처럼 스위스에서 요리를 전공하다가 르꼬르동 블루에 입학한 친구였는데 예전부터 한국의 아이돌을 무척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여학생 중에서는 가장 먼저 지훈 일행과 친해졌다.
"아쉽네. 그러면 그 모임 끝나고 만나서 같이 가자."
"안 돼, 오빠."
"왜?"
"밤새껏 수다를 떨기로 했어."
"설마 하룻밤을 거기서 보내겠다는 거야?"
"여자들끼리만 있는 거니까 상관없잖아?"
"그럼 나는 어쩌라고?"
"오늘은 지훈 선배하고 같이 다녀와. 대신 다음에 같이 가면 되잖아?"
"오늘도 같이 가고 싶으니까 그렇지."
"안나에게 이미 가겠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잖아."
"알았어."
"미안해. 잘 놀다와."
"몰라."
혜미와 함께 가고 싶은 동석은 같이 못 간다는 그녀의 말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기껏 잡은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고, 혜미 없이 혼자서 주말을 보내기도 싫어서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이 따로 어울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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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을 맞아 시네마테크 앞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깔끔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차려 입은 지훈은 동석과 함께 약속장소에서 마크와 쥬세페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4명의 여자와 동행한 마크와 쥬세페가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지훈, 먼저 와 있었네. 로리앙, 인사해. 이 친구가 내가 말한 그날의 영웅이야."
"반가워. 난 로리앙이야."
"난 이지훈이야. 그냥 지훈이라고 불러."
"나는 차동석,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차라고 불러."
"안녕. 나탈리야."
"나는 도미니끄. 잘 부탁해."
"TV에 나왔던 영웅을 실제로 만나게 되다니 영광인데, 내 이름은 쥬디라고 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4명의 여자와 인사를 나눈 지훈과 동석은 시네마테크 지하에 자리하고 있는 렉스 클럽으로 향했다.
프랑스 클럽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입구에서 일종의 물 관리를 했는데 한국처럼 심하지는 않아서 어지간하면 입장시켰다.
다만 아랍계 남자들은 간혹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이는 테러를 대비한 차원이었고, 입구에는 그것과 관련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남자들만 여러 명 왔을 때는 입장을 시키지 않는 것 같았다.
"마크, 저 남자들은 왜 못 들어가는 거야?"
"보다시피 남자들만 여러 명이라 클럽에 입장시키면 다른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릴 수 있잖아. 그래서 입장을 안 시키는 거야."
"그렇구나. 이탈리아도 그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해. 한국은 안 그래?"
"으... 응."
지훈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대답을 했는데 마크는 그 반대의 뜻으로 이해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사이 쥬디라는 여자가 지훈에게 바짝 붙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왔다.
서양 남성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백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쥬디는 서양인 치고는 키가 별로 안 큰 다른 프랑스인과는 달리 키가 커서 여자임에도 지훈과 눈높이가 얼추 비슷했다.
"지훈, 그때는 두렵지 않았어?"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때는 두려운 줄도 몰랐어."
"난 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보도에 깜작 놀라서 너의 쾌유를 기도했어."
"어디 다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
"아무튼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을 구하다니 대단해. 한국 남자들은 다들 그렇게 멋있는가봐?"
"한국사람, 아는 사람 있어?"
"아니, 실제로 만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하지만 드라마에서 많이 봤는데 한국 남자들은 프랑스 남자들과는 달리 진짜 남자들인 것 같아."
"한국 드라마를 자주 봐?"
"재미있어서 종종 봐. 나, 한국 노래도 많이 좋아해."
"쥬디, 한국 남자를 좋게 봐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데 현실은 드라마와 다를 수 있어."
"한국 남자는 나쁘다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