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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야."
"그러면 지훈은 좋은 남자?"
"그냥 평범한 남자?"
"풋~! 프랑스에서는 영웅인 남자가 평범하다니, 더욱 관심이 생기는데?"
"쥬디, 뭐해? 한잔 해야지."
"다 같이 아 보트르 쌍떼!"
"쌍떼."
렉스 클럽은 춤을 추는 스테이지가 따로 있고 벽을 따라서 원형의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금요일임에도 테이블 곳곳이 비워 있었고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일행은 샴페인을 추가로 시켜서 두어 잔씩 더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한참동안 나누었다.
처음 보는 두 명의 낯선 남자가 건들거리며 쥬디에게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안녕, 아가씨들. 우리는 둘 뿐인데 같이 어울리는 게 어때?"
"미안. 오늘은 어울리고 싶지 않아."
"왜 그래? 우리가 합류하면 숫자도 맞고 좋잖아."
"무슨 소리지?"
"옆에 있는 냄새나는 노란 원숭이들은 쫒아내는 게 어떨까? 술은 비싼 걸로 내가 사지. 내가 제법 잘나가는 사람이거든."
"뭐라고? 얼간아, 좋게 말로 할 때 사라져!"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귀에다 입을 대고 얘기해야 했다.
그 때문에 지훈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낯선 남자와 쥬디가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대화 도중에 쥬디가 버럭 화를 내면서 남자들을 쫓아냈기에 좋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고만 여겼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명의 남자가 쥬디에게 작업을 걸었다가 실패한 것으로 여겼다.
한편 쥬디는 다른 친구들과 지훈이 왜 그러냐고 물어오자 별거 아니라면서 그냥 넘겼다.
이는 자세한 내막을 말하면 지훈과 동석이 불쾌하게 여길 것을 우려한 그녀의 배려였다.
"마크, 사람들이 제법 찼는데 안 나갈래?"
"나가야지."
"쥬세페는?"
"원하던 바야."
어제 뜨거운 밤을 보낸 탓인지 마크와 쥬세페는 로리앙과 도미니끄라는 여자와 딱 붙어 다녔다.
그렇게 4명의 남녀가 자리를 비우자 테이블에는 지훈과 동석 그리고 쥬디와 나탈리만 남았는데, 쥬디가 지훈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훈, 우리도 춤추자."
"그럴까. 동석아, 안 나갈래?"
"여기까지 와서 술만 마실 일 있냐? 나가야지."
지훈과 쥬디에 이어서 동석까지 일어나자 나탈리도 따라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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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가 다른 일행과 합류한 지훈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을 무렵 반대편에서는 쥬디에게 작업을 걸었다가 퇴짜를 맞은 두 명의 사내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포그바, 저 여자 죽이지 않냐?"
"말도 마라. 클럽에 있는 많은 여자 중에 저 여자만 눈에 들어온다."
"저런 미녀가 왜 천한 노란 원숭이와 어울리는 걸까?"
"내 말이 그 말이야. 지루, 저 꼴을 그냥 두고만 볼 거야?"
"그럴 수는 없지."
"무슨 방법이 있어?"
"먼저 노란 원숭이부터 떼어 내야지."
"어떻게?"
"포그바, 약 갖고 있지?"
"약은 왜?"
"줘봐. 약을 이용하면 건방진 원숭이들을 간단히 혼내줄 수 있을 거야."
"지루, 어떻게 하려고?"
"나만 믿어."
두 명의 사내가 음모를 꾸미고 있을 무렵 지훈 일행은 여전히 몸을 흔들며 즐거운 한 때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동석은 물 만난 고기처럼 멋들어진 춤 솜씨를 선보이며 분위기를 이끌어갔는데, 그가 실력발휘를 하자 지금껏 시무룩한 반응을 보였던 나탈리가 가장 열광했다.
반면 춤이 능숙하지 못한 지훈은 리듬에 맞춰서 몸을 가볍게 흔들기만 했다.
제법 능숙한 춤 솜씨를 선보이던 쥬디가 지훈에게 바짝 붙어서 일종의 부비부비를 시도해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흡."
"풋~! 지훈, 긴장하지 마."
"으... 응."
지훈은 군 입대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클럽을 안 가봤다.
그러니 클럽을 와본 것이 몇 년 만이었는데 쥬디가 부비부비를 해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반면 쥬디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지훈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더욱 노골적인 접촉을 해왔다.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맞이하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한 지훈은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봤다.
가만 보니 마크와 쥬세페는 물론이고 동석도 나탈리와 부비부비를 하고 있었고 어느새 스테이지를 가득 메운 다른 이들 중에서도 부비부비를 하는 이가 제법 있었다.
'유럽 애들도 이렇게 노는가 보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부비부비를 하는 커플이 제법 있음을 확인한 지훈은 처음과는 달리 좀 더 여유로워졌다.
"지훈, 운동 했어? 몸이 탄탄한 것 같아."
"딱히 운동을 따로 하는 것은 아닌데 요리가 몸을 써서 하는 거라 그럴 거야."
지훈의 몸은 제법 틀이 잡힌 상태였다.
이는 지훈의 말처럼 요리가 제법 노동 강도가 있어서 그러는 점도 있지만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매일 하고 몸 안에 음양오행의 기운을 품고 있어서 그랬다.
"여기서 나가면 뭐할 거야?"
"집으로 돌아가야지."
"집이 어딘데?"
"보쥐하흐 거리에 있어."
"나는 오늘 집에 안 갈 건데?"
"왜?"
"몰라서 물어?"
대답을 하느라 지훈의 귀에다 자신의 입을 바짝 붙였던 쥬디는 뜨거운 입김을 훅 불더니 뱀처럼 몸을 비틀며 지훈의 몸을 살살 더듬었다.
동시에 지훈의 손을 끌어서 자신의 허리와 히프에 올려놓고는 이마를 맞댔다.
쥬디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밀착을 하게 되자 지훈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것 또한 부비부비라고만 여기고 가만히 있었다.
"쭙."
"헙."
이마를 맞댄 상태에서 지훈의 몸을 더듬던 쥬디가 키스를 시도해온 것은 그때였다.
'이... 이런!'
졸지에 입술을 도둑맞은 지훈은 당황스러웠지만 쥬디의 입장을 감안해서 입안을 파고든 그녀의 혀를 살짝 밀어낸 후에 고개를 떼어냈다.
"아! 달콤해."
"쥬디, 미안해."
"뭐가?"
"난 여자 친구가 있어."
"어디, 한국에? 아님 파리에?"
"파리에, 그녀는 나와 함께 요리를 배우고 있어."
"어쩐지, 그랬구나. 같은 한국 사람이야?"
"응."
"많이 사랑해? 사귄지 오래됐어?"
"그녀는 나의 전부야. 우리는 사귄지 이미 몇 년 됐어."
"지훈, 그것 알아? 프랑스에서는 사랑과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공정하다는 말이 있어. 그리고 새것이 들어오면 옛것은 밀려 난다는 말도 있어."
쥬디의 말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내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 지훈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쥬디, 동양에는 약속은 천금과도 같아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있어."
"지훈,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지훈의 입에서 거절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 튀어나오자 쥬디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재차 물어왔다.
쥬디의 귀엽고 커다란 눈동자에 살짝 맺히는 눈물을 목격한 지훈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리안에게 배운 프랑스 격언을 떠올렸다.
"쥬디,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이 아냐. 프랑스 말에 두 마리를 동시에 사냥하려가는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말이 있잖아?"
"풋~! 그 말도 알아?"
"친구에게 배웠어. 그리고 그 말과 매우 유사한 말이 한국에도 있거든."
"아무튼 거절이네."
"만약 내게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없었다면 내가 먼저 너에게 호감을 드러냈을 거야. 넌 그만큼 충분히 아름다워."
"역시 한국 남자는 다르네. 드라마에 나온 대로야. 나, 한국에 꼭 가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