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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겨울은 한국보다 조금 빨라서 9월 중순부터 거리의 나무들이 노랗게 또는 울긋불긋하게 물들었고, 모든 마트에는 잘 익은 사과들이 수북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매년 가을이면 프랑스 사람들은 사과를 잔뜩 사서 창고에 쌓아놓고 잼을 만들거나 겨울 내내 파이를 만들어 먹는데, 그 덕에 사과들은 쌓아놓기 무섭게 팔려 나갔다.
"오빠, 우리도 사과를 사서 파이를 만들까?"
"좋지."
"아! 나는 사과파이보다 산적과 갈비찜 그리고 송편이 먹고 싶다. 한국은 다음 주가 추석이라고 벌써부터 선물세트가 오간다고 하던데 괜히 그리워진다."
9월이 되면서 고급 과정으로 승급한 지훈 일행은 매주 한번씩은 B반과 C반의 학생들과 함께 뽀이도퀴시의 특강을 받고 있었다.
참고로 고급 과정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쏨과 장쉬엔을 통해서 지훈이 나서준 덕분에 자신들도 뽀이도퀴시의 특강을 함께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들 지훈을 고맙게 여겼고, 그 덕에 지훈 일행은 B반과 C반의 학생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한편 그날의 일을 계기로 지훈 일행과 친해진 쏨과 장쉬엔은 마크와 쥬세페와 함께 매주 주말이면 서로에게 자국의 요리를 알려주고 있었고 이제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동석아, 오늘은 친구들에게 한국요리를 알려주는 날인데 계획을 변경해서 추석음식을 만들까?"
"그럴까? 쏨과 장쉬엔 그리고 마크와 쥬세페에게 한국의 명절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괜찮을 것 같은데."
"수아와 혜미 생각은 어때?"
"우리도 찬성."
"좋아. 그러면 메뉴는 뭐로 할까?"
"다른 것은 몰라도 산적과 갈비찜은 꼭 하자."
"송편은 힘들겠지?"
"지훈 선배, 한국 식료품 가게에서 맵쌀 가루와 속 재료를 판매한다고 하던데 그걸로 준비하면 어떨까요?"
"추석에 송편이 빠져서는 안 되지. 하자."
"오빠, 프랑스도 밤이 많이 나던데 밤단자도 같이 하는 게 어때?"
"맞다. 송편 속 재료를 구할 수 있으면 깨도 구할 수 있을 거니까 밤단자도 하자."
"지훈아, 양을 넉넉하게 만들어서 마리안에게도 갖다 주면 어떨까?"
"오! 우리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기특한데."
"혜미야, 넌 가금씩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것 같더라."
"서방님, 하늘같은 지아비를 제가 어찌 무시하겠습니까? 저는 단지 서방님의 마음씀씀이가 너무 속 깊어서 순수하게 감탄을 했을 뿐입니다."
"어~험! 내가 부인의 뜻을 오해했는가 보오."
"놀고들 있네."
"아~후! 닭살, 그만 좀 하지?"
"수아야, 우리 먼저 가자."
"응."
외국 생활이 9개월을 넘어서면서 더욱 정이 깊어진 동석과 혜미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가 되어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애정행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건 지훈과 수아도 마찬가지여서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다녔다.
얼마 후, 장을 다본 지훈 일행은 시간 맞춰 마트로 마중 나온 쏨의 차를 타고 그녀의 저택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추석음식을 만들었다.
"다들 어때?"
"송편도 그렇지만 밤단자는 너무 예쁘다."
"맛은 어때?"
"아주 좋아. 특히 지훈이가 만든 갈비찜은 아주 환상적이야."
"고마워, 쏨."
"지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국만이 아니라 태국에도 한국식당을 오픈해봐. 네 실력이라면 분명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거야. 내가 많이 도와줄게."
"쏨이 도와준다면 적극 고려해봐야지."
"농담 아니니까 진짜 차려야 해. 태국 사람들은 한국 거라면 뭐든 좋아한데다가 먹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만큼 전 세계인을 상대로 홍보를 할 수 있어."
"지훈아, 그건 쏨 얘기가 맞아. 나도 태국을 가봤지만 관광대국답게 외국인들이 아주 넘쳐나더라."
"그렇다면 당연히 진출해야지. 쏨, 그때 가서 나 몰라라 하면 안 돼."
한국 음식을 기본으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서 빕스나 프라이데이 같은 다국적인 프랜차이즈를 만들겠다는 것이 지훈의 목표였다.
그러기에 지훈은 자신의 태국진출을 돕겠다는 쏨에게 오늘의 약속을 잊지 말라는 말을 농담처럼 건네다가 마크의 질문을 받았다.
"지훈, 산적은 계란을 꼭 입혀야 해?"
"왜?"
"처음에는 색감이 너무 좋은데 계란 옷 때문에 색감도 안 살고 살짝 난잡한 느낌이 나는 것이 아쉬워."
"난잡한 느낌?"
"계란의 단면이 반듯하지 못하니까 싸구려 음식처럼 보여."
"쥬세페, 생각도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솔직히 내가 이 요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쉽게 손이 가지는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먹어보니까 맛은 너무 좋아."
"맞아! 그래서 더 아쉬워. 방금 쥬세페도 얘기했지만 산적은 계란으로 감싼 겉모습이 다른 식재료만이 아니라 맛까지 감추는 것 같아서 아쉬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한국 요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특히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먹거리에 있어서는 우리 것이 최고라고 여긴다.
하지만 외국 생활을 제법하다 보니 그게 꼭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폐가 있고 많은 한국인이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간의 외국 생활을 토대로 되돌아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때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는 같은 동양권이라고 해도 이미 세계 곳곳으로 널리 퍼져나간 일본 음식이나 중국 음식 또는 태국 음식과 비교했을 때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한 한식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어떤 점이 가장 세계적인지, 반대로 어떤 점이 세계화를 막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했는데 외국인 친구들의 솔직한 반응은 그러한 점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다른 식재료를 싸고 있는 계란의 모양이 반듯하고 단면이 고르면 시각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마치 눌러 붙은 것 같은 느낌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난 계란의 노란색이 식재료의 색감을 죽이는 것 같아서 그게 더 안타까워."
"알았어, 고마워."
마크와 쥬세페의 의견을 수첩에 적은 지훈은 그 옆에 계란의 흰자만을 이용해서 계란 옷을 입혀보자는 문구를 추가로 기재했다.
가만 보니 수첩에는 그동안 지훈이 고민했던 내용과 함께 마크와 쥬세페를 비롯해서 쏨과 장쉬엔이 지적했던 내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흰자만 사용하면 훨씬 깔끔해 보이고 색감도 더 살려낼 수 있을지 몰라.'
같은 시각, 지훈의 아파트 입구에는 몇 명의 사내가 서성이고 있었다.
"여기가 그놈의 집이냐?"
"맞습니다. 2층 201호입니다."
"놈은 안에 있겠지?"
"지금은 없습니다."
"어디 갔는데?"
"친구들과 같이 나갔습니다."
"기다렸다가 들어오면 처리한다."
"오늘 바로 처리하는 것입니까?"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출소만 하면 제일 먼저 그놈부터 처리해서 동생의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종의 출소기념 신고식입니까?"
"그런 셈이지. 그리고 그놈을 처리한 후에는 클럽의 경비들을 처리할 생각이다."
"화끈한 밤이 되겠군요."
"기대들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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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런 분위기가 물씬 피어나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엘리제궁의 2층에 마련된 아담한 살롱에는 홀란드 대통령을 비롯해서 내각의 여러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외무부 장관, 반기문 총장의 방문과 관련한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의장과 영접을 비롯해서 만전을 다하고 있습니다."
"UN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야 하는 만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하시오."
"수없이 확인하고 검토하고 있는 만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 주에는 프랑스 대통령의 초청으로 반기문 UN사무총장이 프랑스를 방문한다.
올란도 대통령이 반기문 사무총장을 프랑스로 초청한 이유는 좀처럼 해결기미가 안 보이는 말리의 내전과 관련해서 UN의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현재 프랑스는 두 번의 증파를 통해서 약 3만 명의 병력을 말리에 주둔시키고 있음에도 반군의 군사준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여러 여건상 더 이상의 추가파병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말리 내전 문제를 UN에 정식으로 상정해서 UN소속의 평화유지군을 주둔케 한다는 것이 프랑스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말리의 상황을 충분히 알리고 평화유지군 파병의 정당성을 역설해서 그의 충분한 협조를 끌어내야 했다.
"숙소 및 경호는 어떻게 되었소?"
"호텔 측과는 미리 의견조율이 끝난 상태로 방문 4일 전에 모든 보안점검을 마칠 생각입니다. 그리고 경호는 그간의 관례대로 경호처에서 총괄을 하기로 했습니다."
"난민 보호시설을 방문하는 일정과 관련해서는 만약의 사태에 충분히 대비하시오."
"알겠습니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방문과 관련된 회의는 장시간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복지부 장관이 엘리제궁에서 예정된 만찬에 한국 음식을 대접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각하, 반기문 총장에게 그의 모국인 한국의 음식을 대접한다면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게다가 엘리제 궁의 셰프들이 한국 요리를 배운 이상 현실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찬성이오. 그런데 엘리제궁의 셰프들에게 한국 요리를 맡기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아닌 것 같소."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한국 요리는 한국 셰프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내가 그동안 종종 먹어봤지만 이곳의 셰프들이 만든 한국 요리는 솔직히 한국 셰프가 만든 것에 비해서 많이 떨어졌소."
"각하, 이지훈 셰프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그리고 한국의 요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음식마다 고유의 의미와 유래가 담겨있는데 이곳의 셰프들은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이지훈 셰프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며칠 전에 정기 검진을 받은 홀란드 대통령은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 그리고 혈당이 다시 상승했다는 결과를 받았다.
물론 좋아지기 전에 비하면 며칠 전의 수치도 많이 낮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간의 검사결과를 살펴보면서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그건 지훈이 엘리제궁을 방문하지 않은 이후부터 각종 수치가 조금씩 계속 상승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홀란드 대통령은 자신의 건강이 좋아진 배경에는 지훈의 요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가졌다.
'이곳의 셰프가 끓여준 홍삼차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을 보면 지훈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을 거야.'
루피에르의 파티에서 홍삼차를 처음 마신 날, 홀란드는 불끈거리는 자신의 상징을 보면서 젊음이 되돌아왔음을 확실하게 느꼈다.
하지만 이곳 셰프가 끓여주는 홍삼차는 아무리 많이 마셔도 그때처럼 힘이 불끈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오면 그 비법을 확실하게 알려달라고 해야겠어.'
홀란드 대통령이 지훈을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시각, 지훈은 일행들과 함께 아파트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아까부터 서성이던 몇 명의 사내가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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