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회: 3-1(1. 지금 그런 말이 나와?) -->
추석음식을 해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 탓인지, 아파트에 들어선 지훈 일행의 표정은 밝고 유쾌하기만 했다.
"지훈아, 저번 주 TV 예능프로 다운 해놨는데 볼래?"
"뭐?"
"이것저것, 주말 예능은 몽땅 다운 했어."
"오빠, 불후의 가수도 다운했어? 우리 경민 오빠가 지금 3연승중인데, 이번 특집은 오빠가 우승해야 하는데?"
"그건 오전에 다운 끝났어."
"그렇다면 나도 볼래. 수아야, 같이 보자."
외국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한국의 평범한 일상이 무척 그리워지는 법이어서 동석은 주말 예능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봤다.
"난, 먼저 씻을래."
"그러면 30분 후에 보는 게 어때?"
"그럴게."
"다들, 오늘 수고했어."
"지훈 선배도 수고했어요."
"지훈아, 빨래가 밀려서 오늘은 세탁기 돌려야 하니까 문 잠그지 마라."
"알았어."
30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한 일행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지훈도 계단 옆에 자리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동석이 올 것을 생각해서 문을 잠그지 않았다.
참고로 지훈의 방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구입한 세탁기가 있어서 다른 일행들도 그것을 함께 사용했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부르르 떨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여보세요."
-지훈씨, 안녕하세요. 비서실의 소피에요.
"안녕하세요, 소피 비서관님."
-지훈씨, 잘 지네고 계시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소피 비서관님은 어떠세요?"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전화를 걸어온 이가 친분이 있는 엘리제궁의 비서관임을 알아차린 지훈은 반가운 음성으로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다음 주에 UN 사무총장님이 프랑스를 방문하시는데 알고 계시나요?
"뉴스에서 봤어요."
-사무총장님이 한국분인 것은 알고 계시죠?
"그럼요, 당연히 알고 있죠."
-실은 그분의 방문과 관련해서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제게요?"
-네. 각하께서는 엘리제궁에서 열리는 만찬에서 사무총장님께 한국음식을 대접해드리고 싶어 해요.
"한국음식이요? 그것 좋은 생각인데요."
-그렇죠? 그런데 각하께서는 지훈 셰프가 요리를 해주기를 바라고 계세요. 혹시 다음 주에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어요?
"정확히 언제인데요?"
-토요일이에요.
"만찬이면 정확히 몇 시에 시작하는 거죠?"
-7시로 예정되어 있어요.
"재료들만 준비된다면 3시까지 가도 충분하겠네요."
-OK하는 거죠? 필요한 재료는 주중에 이메일로 보내주면 이쪽에서 알아서 준비할게요.
지훈이 소피와 통화하고 있던 그 시각, 네 명의 사내가 아파트 입구로 다가 왔다.
"사냐, 너는 여기서 대기해."
"왜요?"
"누군가는 망을 봐야지."
"망을 보는 것은 레미가 해도 되잖아요?"
"레미는 눈치가 없어서 안 돼."
한 명의 부하를 입구에 남겨둔 카벨라는 다른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팔뚝을 비롯해서 목에 문신을 한 카벨라는 포그바의 친 형이었는데 그는 파리 외곽에서 활동하는 작은 갱단의 두목으로, 교도소에서 2년의 수감생활을 하다가 오늘 막 출소를 한 상태였다.
"201호라고 했지?"
"맞습니다."
"두목, 한 방에 보내버릴 생각입니까?"
"그래서는 재미없지."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사람의 몸에서 피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확인시켜 줄 테니까 잘들 지켜봐."
"칼을 사용하시려고요?"
"이거면 충분할거야."
카벨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리송으로 불리는 날카로운 비수를 커내서 꽤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살살 돌리기 시작했다.
"두목, 그놈은 꽤나 유명한 놈인데 나중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지하철에서 사람을 끄집어 낸 것 말해?"
"맞습니다. 그래서 그놈을 영웅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죽여도 괜찮을까요?"
"흥! 그딴 놈이 영웅이라고? 까는 소리 말라고 해."
"어쨌든 이번 일로 경찰들이 요란을 떨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들 이미 죽은 놈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지훈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는 레미는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뒷일을 걱정했다.
그사이 201호 문 앞으로 다가간 요리스가 문고리를 살짝 돌렸는데 스르륵 문이 열렸다.
"두목, 문이 안 잠겼나 봅니다."
"조짐이 좋은데."
"들어가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문은 잠가라."
"알겠습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 카벨라 일당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침대 앞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지훈을 발견했다.
반면 소피와 통화중이던 지훈은 정면의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집안으로 들어오는 낯선 사내들을 발견하고 깜작 놀라서 그들의 정체를 물으려다가 카벨라의 손에 들린 흉기를 발견했다.
'이자들은, 강도!'
사내들을 강도라고 판단한 지훈은 여전히 통화중임에도 마치 통화를 끝낸 것 마냥 핸드폰을 바로 옆의 탁자에 올려놓고는 천연덕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내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 누구요? 경찰을 부르기 전에 내 집에서 나가시오."
-지훈, 왜 그래요?
"돈이 필요하면 돈을 줄 것이니 날 죽이지는 마시오."
-지훈, 무슨 일이죠?
"건방진 새끼, 그깟 돈 때문에 우리가 왔을 것 같아?"
"살려주세요."
-이런!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지훈의 음성을 들은 소피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는 다른 비서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지훈이 위기에 빠졌음을 알게 된 비서관들은 경찰서 상황실에 이 사실을 알리며 출동을 독촉함과 동시에 의료진을 지훈의 아파트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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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그 시각, 총을 꺼내 든 요리스와 레미가 지훈을 위협하는 사이 카벨라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질문을 했다.
"이봐, 친구. 몸에 구멍 나기 싫으면 두 손을 번쩍 올리는 게 좋을 거야."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줄 테니 날 헤치지는 마시오."
"원하는 것은 전부 들어주겠다고? 간단하네. 우리는 네 놈의 목숨을 원해."
"나와 당신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도 날 죽이겠다는 겁니까?"
"우리 사이에 원한이 없다고, 정말 그럴까?"
"건방진 새끼, 우리 두목은 네놈 때문에 감옥에 수감된 포그바의 형님이시다."
"포그바라면 예전 클럽에서?"
"맞아! 그러니 네놈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제는 알겠지."
처음에는 이들을 강도라고 판단했기에 갖고 있는 현금을 넘기는 선에서 끝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이 복수라면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상대는 세 명이나 되었고 더군다나 총까지 갖고 있어서 섣불리 달려들었다가는 정말 큰일 날 수 있었다.
'아! 소피가 경찰을 빨리 보내줘야 할 텐데.'
휴대폰에서 아무런 음성이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소피도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나 경찰들이 올 때까지 이들이 얌전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빨래를 가지고 오기로 한 동석까지 사건에 휘말릴까봐 걱정스러웠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지훈을 죽이겠다고 했던 카벨라가 권총을 들고 있는 레미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그때였다.
"레미, 저놈을 묶어라."
"똑똑."
"지훈아, 문 열어."
"뭐지?"
"치... 친구입니다."
"야! 문 잠그지 말라고 했던 것 잊었어?"
"두목, 어떻게 할까요?"
"친구라, 두 놈을 함께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요리스, 넌 저놈을 안으로 데리고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