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회: 3-38(3권끝) -->
세제와 화장품 산업에 뛰어들자면서 열변을 토하는 이는 이재철의 친형인 이재만 상무였다.
그는 마치 의류매장 같은 깔끔한 분위기의 화장품 전문 매장을 오픈해서 10대와 20대를 공략하고, 한류를 이용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자고 했다.
"회장님, 이 상무의 제안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화장품은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일단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지금의 악재를 충분히 덮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들 생각이 같은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관련한 보도 자료를 속히 배포하고 그룹 내에 신사업 전략부를 신설하고 이 상무가 전권을 맡게."
"알겠습니다."
그날의 회의는 사실상 결정 난 것으로 생각했던 후계자 다툼이 다시금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자리가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했던 이재만의 화려한 등장과 함께 상대적으로 이재철이 밀리는 형국으로 마무리 되었다.
덕분에 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이재철은 한동안 악을 지르며 분노를 온몸으로 표출했다.
"빌어먹을, 내가 어쩌다가......"
거의 차지했던 차기 총수자리를 눈앞에서 놓치게 된 이재철은 치솟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간 원인을 찾기 시작했고, 엉뚱하게도 지훈을 범인으로 단정했다.
"이게 다, 순전히 그놈 때문이야! 그놈이 그런 짓만 하지 않았어도......!"
따지고 보면 신약 개발의 시작은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번 실험에서 밝혀진 것처럼 그때의 일은 우연의 일치로 드러났고 끝내는 신약개발이 실패하고 말았다.
'죽일 놈, 날 이렇게 만들다니 용서 못해!'
꼭 신약개발이 아니더라도 뚜랑주르와 관련해서 자신의 제안을 거부한 일로 자존심이 상했던 이재철은 지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이번 일까지 터지자 그 모든 것을 지훈의 탓으로 돌렸고, 이제는 복수를 부르짖었다.
###
TJ 그룹이 발칵 뒤집어진 그 시각, 박현식과 장철우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대고 있었다.
"사장님, 그런 방법을 생각하시다니 대단합니다."
"장 마스터, 놈이 운 좋게 구청의 단속은 피해갔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을 것이오."
"어찌 안 그러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크게 당황할 놈의 얼굴을 떠올리면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장 마스터는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대처하겠소?"
"이 상황에서 대처할 방법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방법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오?"
"막말로 가온누리를 찾는 고객이 한두 명도 아닐 것인데, 아무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이번 일을 무슨 수로 대처하겠습니까? 아마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큭큭큭, 내친 김에 오늘의 일도 기사를 쓰라고 해야겠소."
"그러셔야죠. 그리고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가온누리를 비방하는 기사는 앞으로도 종종 나오게 하십시오. 참! 그 일은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그 일이라면 놈의 레시피를 뽑아내는 것을 말하는 거요?"
"맞습니다. 프랑스에서 뽀이도퀴시 셰프에게 많은 것을 배워온 것 같은데 그걸 우리도 얻어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고민을 계속 해봤는데 우리 측 셰프를 가온누리에 위장 침투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지훈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박현식과 장철우였다.
때문에 둘은 장안에 큰 화제를 몰고 온 가온누리의 맛을 훔치고자 했다.
쉽게 말해서 가온누리의 레시피를 뽑아내면 자신들도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여겼고, 그걸 바탕으로 가온누리와 똑같은 메뉴를 서비스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믿을만한 자가 있다면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믿을만한 자는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 일을 맡는 셰프에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럴 생각이오. 그러니 장 마스터가 적당한 셰프를 골라보시오."
"적당한 셰프라면 국내출신으로 비교적 젊고 야망이 있는 자를 고르면 되겠군요."
"떠오르는 자가 있소?"
"몇 명 있는데 제가 며칠 고민해보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비밀유지가 매우 중요한 만큼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고민하시오."
"물론입니다."
박현식과 장철우가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을 무렵 지훈은 신문에 난 불쾌한 기사는 애써 지워버린 채, 서비스 파트장을 맡고 있는 김유경 과장과 함께 예약자 현황을 살피고 있었다.
"사장님, 점심 예약자는 모두 100개 테이블 388명이고 저녁 예약자도 100개 테이블 398명입니다."
"특별한 주문이 들어온 것 있나요?"
"프랑스 대사님과 내무부 유 차관님 그리고 대현 그룹의 정 회장님을 비롯해서 모두 38개 테이블입니다."
가온누리는 1층과 2층 그리고 야외 테이블까지 총 140개의 테이블을 보유하고 있었고, 점심과 저녁 시간에는 딱 100개의 테이블만 예약을 받았다.
이는 미처 예약을 하지 못하고 오는 고객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고, 평균적으로 1개의 테이블은 하루에 3.4회전을 했다.
즉, 하나의 테이블은 매일 같이 3.4번의 고객을 받았고, 매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서너 명에서 많게는 여섯 명 이상씩 오는 것을 합산하면 매일같이 2,000명 이상의 고객을 유치했다.
덕분에 하루 매출이 7,400만원을 초과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특별 주문은 리스트를 뽑아서 주방에 보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도 시작해볼까요."
"수고하십시오."
"김 과장님도 수고 하십시오."
예약자 현황을 살피고 주방으로 들어온 지훈은 평소와는 달리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셰프들을 발견하고 의아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마스터, 식자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식자재가 도착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안 그래도 두 분 부 셰프님이 그 문제로 거래처와 통화중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식자재가 뭐죠? 오늘은 금요일이라 일반 손님도 많이 오실 텐데 우선 도착한 식자재부터 정리를 합시다."
"야채와 청과는 물론이고 해산물과 정육까지 아무 것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이 2천명의 고객이 찾아오다 보니 가온누리에서 소모하는 식자재의 양도 엄청나서 매일 아침이면 산더미 같은 식자재가 들어왔다.
그런데 한 가지도 아니고 모든 식자재가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다니 뭔가가 이상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성훈이 주방에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마스터,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죠?"
"우리 가게에 식자재를 공급해주던 모든 거래처가 거래를 중단하겠답니다."
"뭐라고요, 예고도 없이 갑자기 거래를 중단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저도 어이가 없어서 따지고 들었는데 더 이상 거래를 할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예약을 받는다는 것은 고객과의 약속인데 이를 어길 수는 없습니다."
"지훈아, 큰일 났어. 의리 없는 새끼들, 하루아침에 배신을 때려!"
박성훈과 얘기를 하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크게 흥분한 표정의 정미선이 들어왔다.
그녀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지훈을 마스터라 칭하지 않고 이름을 불렀는데 거친 목소리로 거래처를 원망했다.
"정 부 셰프님, 무슨 일이죠?"
"마스터, 거래처가 파밀시에테와 공급계약을 체결했다면서 우리와는 더 이상 거래할 수 없답니다."
"파밀시에테요?"
"네. 그자들은 무슨 억하심정인지 사사건건 우리를 방해하는지 모르겠네요. 아! 그나저나 조금 있으면 손님들이 몰려올 텐데 어떡하죠?"
거래처가 파밀시에테와 거래를 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지훈은 이번 일도 박현식의 농간임을 간파하고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대안을 찾기 시작했는데 자그마치 2천명 분의 식자재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해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거래처의 일방적인 공급 중단으로 큰 위기에 빠진 지훈이 암담해하고 있을 무렵 청와대에서는 다음 달로 예정된 오바나 대통령의 방한과 관련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은 보안문제부터 시작해서 의전까지 체크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담당자들은 골머리를 싸맸는데 그중에는 환영 만찬도 있었다.
"환영 만찬은 전례대로 청와대에서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노파심에서 얘기하지만 국격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청와대의 셰프들도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는 만큼 걱정 안하셔도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