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스터 셰프-122화 (122/219)

<-- 122 회: 4-11 -->

북악산 자락에 위치해서인지 가온누리의 아침은 11월 초인데도 짙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싸늘했다.

평소와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난 강민구는 세면을 마치기 무섭게 1층의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그 누구보다 아침을 빨리 시작하는 지훈이가 불린 콩을 삶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강민구씨,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오늘도 메주를 만드실 생각이세요?"

"메주를 빨리 만들어야 간장과 고추장 그리고 된장도 만들죠."

"같이 할까요?"

"다 끝나서 식히기만 하면 되니까 강민구씨는 아침 먹게 하마연씨를 깨우세요."

"제가 내려올 때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우리네 장은 많은 정성과 함께 시간을 요구하기에 지훈은 모든 장의 기본이 되는 메주부터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모든 장류를 만들고 나면 그 이후에는 소스를 만들 생각이었다.

참고로 어제 철거가 끝난 옆집에는 주방과 연결된 가온누리 신관과 함께 소스 및 향신료를 제작하는 작업장도 함께 건설될 예정이었다.

다만 메주 건조 시간이 필요한 만큼 올해 안에 프랑스를 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강민구씨 어머니는 어떠세요?"

"변함없습니다."

"어서 좋아지셔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참! 이번 주 휴무에는 어머니에게 가봐야지 않아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운전할 줄 알아요?"

"운전 관련 아르바이트를 해봐서 운전은 잘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 드실 음식을 싸줄 테니, 내 차를 사용하세요."

"괜찮습니다. 사장님."

"똥차니까 어려워하지 말고 사용하세요. 보험도 누구나 운전할 수 있게 해놨으니까 상관없어요."

강민구는 박현식의 지시를 받고 가온누리의 요리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위장 침투한 스파이였다.

그래서 지금도 틈만 나면 가온누리의 요리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었고 각 메뉴에 들어가는 식자재의 구성과 사용량도 파악하면서 임무를 거의 완수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정을 모르는 가온누리의 다른 식구들과 지훈이가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너무 죄스럽고 부담스러웠다.

"얼마 안 멀어서 버스타고 가도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음식을 싸가지고 가야하니까 내 말대로 하세요."

"사장님, 바쁘실 텐데 그러지 마세요."

그동안 가온누리에서 숙식을 하면서 요리비법을 파악했던 강민구는 이번 주 휴무일에 가온누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 마당에 지훈의 차를 사용할 수는 없어서 한사코 거절하다가 갑작스레 들려온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무슨 음식을 싸가지고 간다는 겁니까?"

"하마연씨, 일어났어요."

언제 내려왔는지 주방에 당도한 하마는 들어오기 무섭게 불쑥 질문을 해왔고, 지훈은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사장님, 제가 고향에 내려갈 때도 음식을 싸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마연씨 고향은 어디죠?"

"전라도 목포입니다."

"거리가 멀어서 하루에 갖다 오기는 힘들겠네요?"

"그래서 근무 끝나면 그날 밤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언제쯤 갈 생각이죠?"

"한동안은 다른 일이 있어서 내려가기 힘들 것 같고 이달 말일에 내려갈 생각입니다."

"음식을 싸줄 테니까 가기 전에 미리 얘기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사장님이 요리해준 음식을 싸 가면 안 될까요? 저희 어머니도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계시는데 사장님이 요리한 음식을 먹으면 무척 행복해하실 것입니다."

가온누리의 서비스 파트에는 범석 패거리가 일하고 있다.

그들은 유병만과 노영필을 비롯해서 신성 OB파의 간부가 가온누리를 찾으면 그 사실을 매번 하마에게 알렸다.

이는 자신들도 그 기회에 안면을 트고 눈도장을 받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 하마는 신성 OB파의 간부가 찾아오면잠깐 짬을 내서라도 홀에 나와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노영필과 제법 인연이 쌓인 덕에, 하마는 그의 어머니가 지훈의 음식을 먹고 신경통이 많이 좋아졌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또 유병만과 지훈 사이에 있었던 내막도 알게 되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하마가 끼어들면서 강민구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고 지훈은 아직 김이 나는 콩을 걷어내서 절구통에 옮겼다.

그사이 하마는 강민구와 함께 아침상을 차리기 시작했는데 넌지시 한마디 했다.

"민구야, 사장님이 음식 싸주면 무조건 감사하다고 얘기하고 갖고 가."

"미안해서 그렇죠."

"미안해도 네 어머니를 생각해서 꼭 그렇게 해."

"어머니는 원래부터 입이 짧은데다가 늘 누워만 계셔서 식욕이 없어서도 많이 못 드세요."

"그래도 무조건 싸가! 그게 어머니께 효도하는 길이야."

"네?"

"내말 알아들었지?"

노영필을 통해서 지훈의 특별한 능력을 어렴풋이 알게 된 하마는 친 동생 같은 강민구와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 애정 어린 충고를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훈의 신비한 능력을 얘기해서 그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노영필이 어떤 경우에도 입 조심을 하라고 했기에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봐서요."

"보긴 뭘 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머니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

"무슨 후회요?"

"진짜, 말 안 듣네. 무조건 그렇게 하라니까!"

+++++++

6. 진짜, 말 안 들어!

불그스름한 빛이 어둠을 희미하게 밀어내는 공간에는 벌거벗은 두 남녀가 침대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두 손과 입을 놀리며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던 두 남녀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빠르게 하나가 되었다.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사내의 괴성이 별안간 터져 나온 순간 방안을 가득 메웠던 여인의 들뜬 신음도 빠르게 사그라졌다.

"오빠, 방금도 너무 좋았어."

"출근해야 하니까 얼른 씻어라."

"같이 씻을까? 내가 비누칠 해줄게."

"시간 없어서 가봐야 해."

"알았어. 비누칠만 해줄 테니까 오빠도 그렇게 해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침대에 누운 사내를 억지로 잡아 일으키는 여자는 예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이끌려서 침대에서 일어난 사내는 박현식이었다.

"오빠, 다음에는 언제 만날까?"

"왜, 미리 일정을 알아서 애인하고 겹치지 않게 하려고?"

"나, 애인 없다니까."

"칫,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내가 핸드폰 보여줘, 통화기록을 보면 알 수 있잖아?"

"됐어! 구질구질하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정말이야. 나는 애인 없어. 그래서 오빠의 진짜 애인이 되고 싶은데 그러면 안 돼?"

"내 진짜 애인이 되겠다고?"

"응."

불러주는 곳이 별로 없어서 벌이가 시원찮았던 예은은 스폰서를 연결해주겠다는 유지원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바로 수락했다.

더군다나 그가 제법 잘나가는 외식 기업의 사장이자 수천억대의 재산을 보유한 현역 국회의원의 아들임을 알게 된 순간 그에게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박현식을 만났고, 그와 간단한 술자리를 가진 후에는 바로 호텔로 직행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모든 남자관계를 정리해. 그러면 나도 적극적으로 고민해볼게."

"남자가 있어야 정리를 하지."

"어쨌든 싹 정리해."

"정리할 남자가 없다니까."

예은은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박현식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태연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진짜로 휴대폰을 확인하면 어떡하지? 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밀어붙이는데 안하겠지.'

박현식은 모르고 있지만 예은은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했다.

어떻게든 인기를 얻고 싶었던 그녀는 가수든 연기자든 가리지 않고 잘나가는 남자가 있으면 무조건 접근했다.

이는 그 남자와 핑크빛 스캔들을 터트려서 자신도 세간의 주목을 받을 생각에 그리했는데, 막상 그때만 반짝했고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연예계 내에서도 그런 소문이 떠돌아서 지금은 들이대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연결된 몇몇 남자하고는 지금도 비밀스런 만남을 지속하고 있었다.

'아차! 지훈 오빠에게 전화를 수없이 걸었는데 그걸 오해하면 어떡하지? 만약 꼬치꼬치 캐물으면 매니저라고 둘러대야겠어.'

예은은 박현식을 만나기 직전까지도 지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처음 몇 번은 전화를 잘 받아주던 지훈은 어느 순간부터 근무시간에는 전화 받기가 어렵다며 잘 안 받더니 얼마 전부터는 신 메뉴를 개발한다는 핑계로 아예 전화를 안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박현식이 핸드폰을 확인한다면 무수히 찍혀져 있는 지훈의 번호를 보는 순간 자신과 지훈의 관계를 오해할 수도 있었다.

'여기를 나가면 지훈 오빠를 제외하고는 다른 남자들 번호는 전부 수신거절을 해야겠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예은과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남자들은 거품과도 같았던 한때의 인기가 사라지면서 팬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남자들이었다.

그러니 그들과 관계를 끝낸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예은은 박현식을 사로잡기 위해서도 그들을 과감하게 쳐내겠다고 다짐했다.

"좋아. 속는 셈치고 믿어주지. 대신 내가 부르면 아무 때라도 올 수있어?"

"오빠가 부를 때만 가야 해? 오빠가 안 불러도 내가 알아서 먼저 가면 안 돼?"

"네가 알아서 오겠다고?"

"난 오빠가 맘에 드는데 오빠는 내가 별로인가 봐?"

'얼레, 애가 날 정말로 좋아하나?'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걸 그룹으로 데뷔할 정도로 예은의 미모는 상당했다.

그러나 박현식이 예은의 스폰서가 된 결정적인 원인은 미모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지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

그런 마당에 예은이가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내자 묘한 승리감이 느껴지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지훈이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박현식의 예상처럼 분해 날뛰기 보다는 오히려 귀찮은 혹을 정리해줘서 고마워 할 것이 분명했다.

"나도 싫지는 않아."

"오빠, 오늘 저녁은 어때?"

"오늘 저녁?"

"왜, 약속 있어?"

"그건 아닌데 왜?"

"저녁 먹고 어제 가려단 만 양수리 별장 가자."

"양수리까지 가자고?"

"오빠가 술만 안 마셨으면 날 거기 데려간다고 했잖아? 거기가 경치가 좋다면서, 내일은 토요일인데 설마 일하는 거야?"

"그건 아냐."

"그럼 6시까지 오빠 회사 앞으로 갈게."

"으... 응."

"아! 그러고 보니까 아직 오빠 전화번호도 모른다. 오빠 몇 번이야?"

그동안 많은 남자를 유혹해봐서인지 예은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약속시간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번호를 박현식의 전화에 저장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단축번호 0번으로 저장했다.

"오빠, 내가 싫어지면 언제라도 단축번호를 해제해. 그러면 내가 쿨 하게 떠나줄게."

'넌 내 로또니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알았으니까 씻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