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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들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늦은 오후, 강민구는 슬슬 눈치를 보며 식자재가 보관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식자재를 꺼내서 발 앞에 쌓아둔 강민구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피고는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휴대폰 액정화면에 나타난 문구는 장 마스터였다.
"여보세요."
-오늘은 왜 이렇게 연락이 늦었나?
"워낙 바쁜 통에 전화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전화할 겨를도 없이 바빴다면 많은 고객이 몰려왔나 보군?
"늘 그렇지만 오늘은 유난히 단체손님이 많이 몰려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법 유명하다고 하더니 장사는 잘 되는가 보군. 뭐, 그래봐야 매장이 하나뿐이니 그 한계는 뚜렷할 거야.
장사가 잘 된다는 말에 괜히 샘이 난 장철우는 매장의 숫자를 들먹이며 자위를 했다.
"아! 이 사장은 매장을 더 늘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어디에?
"지금은 가온누리 바로 옆집을 매입해서 별관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놈이 옆집을 매입해서 확장에 들어갔다고, 그런 얘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거야?
"요리와 관련이 없다는 생각에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요리와 관련이 없다고 해도 그놈과 관련된 얘기는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해.
"알겠습니다."
-어린놈이 돈 독이 올라서 매장을 확장하는가 보군. 하지만 나라면 확장 보다는 2호점을 열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을 텐데, 역시 어리석은 놈은 어쩔 수 없군.
"얘기하는 것으로 봤을 때는 매장을 늘릴 생각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놈의 자금력으로는 무리일 텐데 매장도 늘린다고 했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놈이 무슨 얘기를 했는데?
"각종 장류와 소스류 그리고 조미료와 향신료를 이곳에서 직접 만들어서 2호점을 비롯한 다른 매장에도 공급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직접 만들어서 공급하겠다고? 쓸데없는 일에 괜한 힘을 쏟는군. 아마 딴에는 매장이 늘어나도 고유의 맛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그런 짓을 하는 거겠지?
"마스터님 말대로입니다."
-하여간 촌스럽고 고리타분한 것은 여전하군. 그나저나 레시피를 알아내는 것은 어떻게 됐어?
"그 전에 약속한 금액은 확실히 주시는 것입니까?"
그동안 가온누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까지 요리비법을 알아낸 강민구는 모든 메뉴의 레시피와 조리법을 완벽하게 파악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알아낸 후에 한꺼번에 넘기겠다는 핑계로 지금껏 장철우에게 아무런 정보도 넘기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박현식과 장철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나름대로의 대비책이었다.
-물론이네. 확보한 레시피만 넘기면 약속한 금액을 바로 입금시켜 주겠네.
"그것 외에 또 다른 약속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문제는 복직을 한 이후에 처리할 생각이네. 아무렴 나와 사장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 같은가?
"저는 마스터만 믿고 오늘 밤에 마스터님 메일로 그것들을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금액은 언제 입금되는 것입니까?"
-확인해보고 정보가 정확하다면 내일 중으로 입금하겠네.
"틀림없겠지요?"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런데 가온누리의 메뉴는 전부 포함되어 있겠지?
"물론입니다."
-수고했네. 곧장 사장님께 보고해서 약속한 금액이 내일 입금될 수 있도록 처리하겠네. 그런데 복직은 언제 할 생각인가?
"내일이 제 휴무일이라 어머니를 뵙겠다는 핑계를 대고 그날 짐을 싸서 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면 내일 복귀를 할 생각인가?
"어머니를 한동안 뵙지 못해서 그날은 요양원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고생했는데 아예 주말까지 푹 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복귀를 하게.
"감사합니다."
-그 외 보고사항은 없는가?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아! 이 사장이 올해 안에 프랑스를 가겠다고 했습니다."
-프랑스는 왜?
"자세히는 모르는데 이 사장 애인이 프랑스에 혼자 있다는 것 같았습니다."
-수아가 프랑스에 있다고?
"마스터도 아는 여자입니까?"
-한때 인연이 있었지. 알았어, 끊어.
"월요일 날 뵙겠습니다."
-메일 보내는 것 잊지 말고?
"걱정 마십시오."
전화 통화를 끝낸 강민구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자재를 챙겨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장철우는 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박현식을 찾아갔다.
때마침 예은과 통화 중이던 박현식은 입이 근질거려서 막 얘기를 쏟아내려는 장철우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후에 달콤한 밀어를 한참이나 쏟아낸 후에 통화를 종료했다.
"장 마스터, 무슨 일이죠?"
"강민구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레시피를 확보했답니까?"
"모든 메뉴의 레시피를 확보했고 오늘 중으로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휴~! 이제야 안심이군요. 조만간 그 메뉴들을 우리 회사의 전 매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것과 관련해서 광고를 동반한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해야지 않겠습니까?"
"그건 기본이죠. 광고와 관련해서는 내가 준비를 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강민구씨는 다음 주 월요일에 복직을 하겠답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복직이야 문제는 안 되는데 약속한 사안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은 복직을 시키고 관련 증거를 모두 폐기한 후에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자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그자가 우리 회사에 남아 있으면 나중에 시끄러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저도 그 부분이 걱정되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걸 알고 있다면 그자가 우리에게 레시피를 보냈다는 증거를 반드시 없애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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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서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오늘이 휴무이기에 이른 아침에 일어났던 평소와는 달리 늦잠을 자고 있던 강민구는 머리맡에서 삑삑 거리는 휴대폰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 뭐야?"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기에 다른 이의 눈치도 안 보고 늘어지게 잠을 자려고 했던 강민구는 짜증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의 단잠을 깬 휴대폰을 매만졌다.
휴대폰 액정 화면에 나타난 시각은 지금이 9시 47분임을 알리고 있었다.
"젠장, 오늘은 11시까지 퍼지게 자려고 했는데 누가 전화질을 한 거야?"
삑삑 거리는 휴대폰의 소음은 부재중 전화와 확인하지 않은 문자 메시지에서 나는 소리였는데 그것들은 전부 장철우가 보낸 것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장철우는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무려 스무 번이 넘는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낸 상태였다.
'메일을 보냈으면 됐지, 또 뭔 일이야?'
발신인이 장철우임을 확인한 강민구는 그 와중에도 주위를 살핀 후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민구씨, 지금껏 뭐하느라고 전화를 안 받은 것인가?
"자고 있었습니다."
-아직 가온누리인가?
"맞습니다."
-혹시 그곳을 그만두겠다는 얘기는 했는가?
"아직 얘기 안했습니다."
통화 연결 음이 들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은 장철우의 음성에는 다급함이 진하게 배여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장철우의 음성에서 다급함을 느낀 강민구는 잔뜩 긴장해서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다행이군. 거길 그만둬서는 안 되네. 자네가 준 레시피는 반쪽자리이네.
"레시피가 반쪽자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 밤에 보내준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서 내가 오늘 아침에 직접 요리를 해봤네. 사용하는 식재료가 독특하다 보니 처음 맛보는 맛이 신선하기는 했네. 하지만 그것뿐이었어.
"그것뿐이라면 맛이 없었다는 얘기입니까?"
-맛이야 있었지. 하지만 그 정도 맛으로는 고객들의 입맛을 그토록 사로잡을 수 없네. 장담하지만 자네가 준 레시피 외에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네.
비록 지훈에게 밀려서 우승을 놓쳤지만 장철우는 TJ의 이재철이 사업 제안을 해오고 아드리안 셰프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요리사였다.
그러기에 레시피 대로 만든 요리를 먹어본 순간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반면 자신이 준 레시피가 정확하다고 믿고 있는 강민구는 장철우의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어서 반문을 했다.
"아닙니다. 이곳에서도 분명 제가 넘긴 레시피대로 요리가 나가고 있습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이지훈은 자신만의 비법을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니라고 단정하지 말고 차분하게 잘 생각해보게.
"뭘 생각해보라는 겁니까?"
-내 짐작대로라면 이지훈은 남들이 없을 때 혼자서 뭔가를 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때 자신만의 비법을 펼치는 게 틀림없어. 혹시 그가 혼자만 주방에서 일할 때는 없는가?
너무도 확신에 찬 장철우의 음성을 듣는 순간 강민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놓친 것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지훈만 주방에 있을 때도 있을 거라는 말을 듣는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들어간 이후에 뭔가를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아침에도 가장 빨리 일어나는 사람은 이 사장이었어.'
근무시간이 끝나면 자신과 하마는 주방에서 요리 연습을 했는데 그 자리에는 지훈도 항상 있었다.
하지만 잠이 많은 하마는 아무리 늦어도 새벽 1시 전에는 요리연습을 끝냈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지훈은 장류를 직접 만들겠다는 핑계로 그 이후에도 주방에 남아 있었고, 심지어 아침에도 주방에 내려가면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부터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설마 그때에?"
-어떤가? 내 말이 맞지 않은가?
"마스터님 말씀대로 매일 밤과 아침이면 이 사장 혼자만 주방에 있습니다."
-그럴 거라 여겼네. 아마 놈은 아무도 없는 그 시각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틀림없네.
"하지만 그때 뭔가를 했다면 어떤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만큼 보안유지를 철저히 해서 그러겠지. 긴말 않겠네. 놈이 그때 무슨 짓을 하는지 그걸 잘 살피게. 단언하건데 가온누리의 요리비법은 그 과정에 담겨 있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자신이 전해준 레시피가 별 쓸모없다는 말에 마음이 착잡해진 강민구는 세면을 대충 마치고는 1층의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지훈과 하마를 비롯한 많은 셰프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민구, 일어났냐?"
"하마형님, 아침부터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요?"
"짜샤, 오늘 어머니에게 가는 날이잖아?"
"그런데요?"
"명색이 가온누리의 셰프가 어머니를 찾아가는 날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그러면 이것들은 전부?"
"그래. 거의 다 끝나서 이제는 통에 담기만 하면 되니까 넌 얼른 아침이나 먹어."
"아이참, 필요 없다는데 왜 그랬어요?"
강민구도 사람이기에 요리 비법을 훔치고자 하는 자신의 행위에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지훈을 비롯한 가온누리의 셰프들이 오직 자신을 위해서 요리를 한 사실을 알게 되자 고맙기도 했지만 미안하고 염치가 없어서 툴툴거렸다.
"무조건 싸가라고 몇 번이나 얘기 했으면 알아들을 일이지. 진짜, 말 안 들어!"
"이 많은 것을 어떻게 혼자서 들고 가요?"
"운전할 줄 안다면서, 사장님 차를 이용하면 되지."
"사장님은 어쩌고요?"
"그게 맘에 걸리면 내 차를 타고 가."
"그냥 놔두세요."
"새꺄, 잔소리 말고 어머니를 위해서도 싸가지고 가."
강민구는 미안한 마음에 손사래를 쳤지만 하마는 다른 셰프들과 함께 통에 담긴 음식을 지훈의 차에 실었다.
그날 강민구는 어쩔 수 없이 음식이 실린 지훈의 차를 몰고 어머니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