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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왜 안 오는 거야?
지난 십일을 바쁘게 보낸 것은 박현식도 마찬가지였다.
가온누리를 겨냥해서 새로운 브랜드 고담을 만든 박현식은 광고 회사 관계자들을 만나서 CF 계약까지 체결하고 주요 컨셉과 모델까지 직접 결정했다.
물론 예은이가 CF 모델로 선정된 것은 당연해서, 그녀로부터 밤새껏 특별하고 화끈한 선물을 받은 박현식은 핼쑥한 얼굴로 이재철을 만나서 입점과 관련한 계약을 마쳤다.
그렇게 급한 일을 모두 해치운 박현식이 향한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그렇게 와보고 싶었던 파리를 이제야 오네.'
조리학과 재학 시절 르꼬르동 블루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지만 음주사고로 미각을 잃은 탓에 셰프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박현식은 감회가 새로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따위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녁도 먹을 겸 라트니엘 드 뽀이도퀴시부터 가야겠어.'
늦은 오후에 당도한 탓에 곧 저녁시간이기에 세느강변에 자리한 라트니엘 드 뽀이도퀴시를 찾은 박현식은 식사와 와인을 주문하면서 수아를 찾았다.
"누구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한국에서 온 친구라고 전해주십시오."
"지금은 피크 타임이라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이해합니다."
어설픈 영어로 어렵사리 의사를 전달한 박현식은 음식을 먹으면서 수아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사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가 한국에서 친구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수아는 지훈이 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훈이가 아니라 생각도 하기 싫은 박현식이었다.
"다... 당신이 여기는 어떻게?"
"수아야, 안녕. 훨씬 더 예뻐졌다."
"날 왜 부른 거죠?"
"널 보기 위해서 파리까지 왔는데 당연히 봐야지."
"우리가 웃는 낯으로 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해가 안 가는 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물으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아야, 잠깐만!"
"이 손, 놓으시죠."
"잠깐이면 돼. 꼭 할 얘기가 있어, 제발!"
과거의 불쾌한 기억 때문에도 더 이상 박현식을 보고 싶지 않은 수아는 주방으로 돌아가려다가 그만 한 팔이 잡히고 말았다.
한편 홱 돌아서는 수아를 붙잡은 박현식은 절박한 표정으로 매달렸고, 그 광경을 본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을 주목하며 수군거렸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거죠?"
"왜 이렇게 화부터 내? 우선 앉아."
"죄송하지만 근무 중에 고객의 테이블에는 앉을 수가 없습니다."
"근무는 언제 끝나?"
"꼭 하겠다는 얘기가 그거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네요. 이번에도 날 붙잡으면 그때는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수아가 그 자리에 계속 남았던 이유는 주위의 고객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수군거리는 점도 있지만 어쩌면 박현식이 그날의 일을 사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다.
그런데 사과를 하기는커녕 이상한 소리만 해대는 통에 짜증이 난 수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박현식의 말을 듣는 순간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수아야,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좋아했어. 내게 있어서 너는 내 존재의 이유야. 너만 좋다면 난 널 호강시켜 줄 수 있어."
"박현식씨, 정말 어이가 없네요. 내게 그런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내가 언제 너에게 추악한 짓을 했다고 그런 말을 해?"
"난 호프집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당신은 뻔뻔하게도 잊으셨나 보네요?"
"그... 그건 오해야. 지훈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너에게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어."
수아를 만나면 그때의 일이 언급될 수도 있음을 예상했던 박현식은 자신이 준비한 그럴듯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박현식에게 볼 일이 없는 수아는 그가 미처 손을 벌리기도 전에 자리를 벗어나서 주방으로 돌아갔다.
"수아, 한국에서 친구가 왔다는데 얼굴 표정이 왜 그래?"
"친구가 아니라 스토커야."
"스토커? 경찰 불러야 하는 것 아냐?"
"나 때문에 이곳에 피해가 생기는 것은 싫어."
환한 표정으로 뛸 듯이 나갔던 수아가 씩씩거리며 돌아오자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시시콜콜한 사정을 설명하기가 귀찮았던 수아는 스토커라는 말로 박현식을 설명했고, 동료들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수아,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갔다가 공항으로 함께 가자."
"에밀, 고마워. 하지만 비행기 시간 때문에 근무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가봐야 해."
"그러면 공항까지 같이 가. 내가 태워줄게."
"에밀, 피곤할 텐데 그럴 필요 없어."
"수아, 내 말대로 해. 너만 보내면 걱정되어서 내가 잠을 못 이룰 거야."
"수아, 에밀이 하자는 대로 해. 프랑스까지 쫒아올 정도라면 저자도 지독한 사람인 것 같은데 조심해야지."
"다들 고마워."
"당연한 일인데 고마워할게 뭐가 있어."
"수아, 한국 가거든 지훈에게도 안부 전해줘."
"그럴게. 지훈도 소식 들으면 무척 기뻐할 거야."
박현식은 모르고 있지만 수아는 내일부터 2주간의 휴가였고, 한국 가는 밤 비행기를 예약한 상태에서 애초부터 짐을 싸서 출근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사정을 알고 있는 동료들은 스토커로부터 수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서 라트니엘 드 뽀이도퀴시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들은 박현식이 스토커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박현식은 그날의 일을 더 그럴싸하게 꾸미기 위해서 궁리에 궁리를 했고, 그러는 사이 어느덧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손님, 곧 문을 닫아야 하는데 계산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러죠."
계산을 하고 나온 박현식은 수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가게 밖을 서성였다.
그러나 동료들의 걱정 속에 평소보다 빨리 퇴근한 수아는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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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은 지훈의 생일이었다.
가족들의 성화에 전날 집으로 들어갔던 지훈은 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과 함께 생일상을 받았다.
"아들, 생일 축하한다."
"고마워요."
"오빠, 축하해."
"선물은 없냐?"
"학생이 돈이 어디 있다고 선물을 사? 케이크도 없는 형편에 정말 어렵게 산거야."
"짜샤, 얼마 전에 가게 와서 용돈 챙겨 갔잖아?"
"그건 입을 옷이 마땅찮아서 그날 바로 질렀어."
"그 돈을 전부 옷 샀다고?"
"오빠, 요즘 여자들 옷값이 얼마나 비싼데 그런 소리를 해?"
"두고 보자."
장사가 잘 되면서 지훈은 매월 적지 않은 금액을 생활비로 보탰을 뿐만 아니라 여동생에게도 두둑한 용돈을 줬다.
그런데 그 돈을 쓰지 않고 따로 모아두는 어머니와는 달리 동생은 틈만 나면 용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이 학생의 분수에 맞지 않게 씀씀이가 커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어머니의 타박이 이어졌는데 어머니는 얘기 말미에 수아의 일을 물었다.
"지훈아, 수아는 아직도 프랑스에 있냐?"
"네."
"거기서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라니?"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에 몇 년은 더 있을 것 같아요."
"요리는 한국에서도 하면 될 것을, 어지간하면 들어와서 식부터 올리라고 해."
지훈과 수아의 관계를 알고 있는 부모님은 예비 며느리인 수아가 혼자서 프랑스에 남아 있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훈의 가게가 번창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요즘은 은연중에 결혼과 관련한 부담을 많이 줬다.
"엄마는, 아직 서른도 안 되었는데 무슨 결혼이에요?"
"그런 소리 마라. 요즘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예전에는 서른이 넘으면 남자도 노총각이라는 소리 들었어."
"그건 옛날 얘기죠.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할머니가 빨리 되고 싶어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난 할머니 소리를 빨리 듣고 싶으니까 어서 손주나 데리고 와."
"벌써 애를 낳으면 애는 누가 보고요? 나도 그렇지만 수아도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애는 내가 길러줄 테니까 그런 걱정 말고 어서 식이나 올려."
"엄마, 천천히 할 생각이니까 벌써부터 서두르지 마세요."
"오빠, 결혼은 천천히 한다고 해도 수아 언니 혼자만 외국에 있는 것은 그렇지 않아?"
"뭐가?"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사이여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애정도 식는 법인데 괜찮겠어?"
"난 아무렇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누가 오빠 얘기 해? 오빠는 벌써부터 팔불출 조짐이 강하게 보여서 아무 일 없겠지만 수아 언니는 프랑스에 혼자 있잖아."
"그게 어때서?"
"여자는 외롭고 힘들면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리게 되어 있어. 게다가 프랑스 남자들 잘 생겼잖아?"
"수아는 그런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
어머니의 성화에 이에 여동생 은주까지 끼어들어서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자주 들으면 귀찮은 법인데 동생까지 나서서 싫은 소리를 해대니 짜증이 난 지훈은 툴툴거렸다.
"그건 오빠 생각이지. 오늘 오빠 생일인데 아직 연락도 없잖아?"
"야! 프랑스는 지금 새벽 1시야."
"새벽 1시면 충분히 전화해줄 수 있잖아? 남자 친구 생일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 아냐?"
"생일 축하 전화를 꼭 아침에만 하란 법 있냐? 아마 오늘 저녁에는 할 거야."
수아가 휴가를 이 시기로 잡은 것은 지훈의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사실을 모르는 여동생은 계속해서 지훈의 신경을 긁었고, 짜증이 치솟은 지훈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일어나?"
"엄마와 은주가 계속 잔소리를 하는데 밥이 넘어가겠어?"
"그래도 미역국은 비워야지."
"됐어!"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집을 나선 지훈은 출근하는 도중에 변리사의 연락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이 사장님, 오늘 특허가 나왔습니다.
"아! 정말요?"
-특허 증서를 수령해야 하는데 어쩌시겠습니까?
"특허 증서를 제가 안 갖고 있다고 해서 특허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한동안 보관을 해주시면 제가 나중에 사무실로 가서 찾아 갈게요."
-그렇게 하십시오.
가온누리의 메뉴와 관련해서 특허를 받은 지훈은 기분이 좋아진 탓에 집에서의 일은 까마득하게 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오늘은 동석과 혜미가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이기에 자신이 나서서 그 두 사람을 모두에게 소개시켜줘야 했다.
같은 시각, 파리에 있는 박현식은 수아의 아파트 앞을 계속해서 서성이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는데 왜 안 오는 거야?'
박현식은 먼저 나간 수아가 공항으로 간 줄도 모르고 가게 앞에서 꽤나 오랫동안 버티고 섰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모습이 끝까지 보이지 않자 그때서야 다른 출입구로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아파트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녀가 아파트로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혹시 아파트를 옮겼을까? 아냐, 관리인이 동양인 여자가 살고 있다고 했으니까 여기가 맞을 거야. 그러면 어디를 갔지? 아! 지훈과 깨져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아냐?'
수아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추측을 하던 박현식은 지훈과 수아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이가 다른 여자와 모텔 앞을 기웃거리는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도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점이 너무 이상했다.
'맞아! 둘이 깨진 것이 틀림없어. 그랬구나! 그렇다면 내게는 더더욱 잘된 일이야.'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탓에 상황을 완벽하게 오해한 박현식은 자신이 프랑스에 오기를 잘했다고 여기며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