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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차가운 바람을 어루만지며 지상에 내려앉았고 눈이 녹아 생긴 보도의 작은 물웅덩이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춤을 췄다.
어둠이 오히려 세상의 더러운 것을 뒤덮어 주는 저녁 무렵, 고담에 들어선 박현식은 저녁 시간임에도 손님이 거의 없는 휑한 홀을 둘러보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장 마스터는 어디 있어?"
"잠깐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아마 뒤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시는 것 같은데, 불러올까요?"
"됐어."
각서를 작성한 박현식은 하루하루 날이 지나갈 때마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장철우를 닦달할 생각에 고담을 찾았다가 텅 빈 가게를 보는 순간 더욱 화가 났다.
아울러 자신은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장철우가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열이 뻗쳐서 씩씩거리며 주방 뒤쪽으로 나갔다.
한편 강민구를 계속 재촉해도 더 이상의 비법이 없다는 말을 들은 장철우는 절망감에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강민구와 잦은 통화를 하면서 그의 심정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눈치채고 비밀리에 박현식과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민아, 형이 일할 만한 레스토랑이 있을까?"
-형,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아."
-한국은 어쩌고? 거기서 괜찮은 기업가를 만나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고 있다면서?
"그랬는데 이제 옮길 때가 된 것 같아."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여기 사장이 자기가 잘못 계약해 놓고 그 책임을 내게 미루고 있거든."
-무슨 계약?
"호텔 입점과 관련한 계약인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너는 틈틈이 내가 일할 만한 레스토랑을 알아봐."
-언제 올 건데.
"이번 달 안에 그만둘까 싶어."
장철우가 가장 걱정하는 건 강민구를 가온누리에 침투시킨 일이었다. 즉, 장철우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강민구가 그 사실을 지훈에게 발설이라도 했다가는 자신도 법적인 책임을 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은 한국을 뜰 생각이었다.
그런데 통화를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그 앞에 성난 표정의 박현식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 마스터,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요?"
"사……사장님, 오셨습니까."
"일은 일대로 저질러 놓고 혼자만 미국으로 도망가겠다는 거요?"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 것 아닙니다."
"내가 다 들었는데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겠다는 거요?"
"사장님, 오해이십니다."
"내가 뭔 오해를 했다는 거요? 방금 이번 달 안에 그만두겠다고 했잖소?"
"그건 다른 얘기입니다."
"듣기 싫소. 가온누리의 맛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사람은 장 마스터이니까, 갈 때 가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문제부터 해결하시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뭐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거요?"
"가온누리에 사람을 침투시켜서 비법을 빼 오자고 하신 분은 사장님이잖습니까?"
"그 전에 그런 얘기를 먼저 한 것은 당신이잖소? 그리고 그 말을 누가 먼저 했든 간에, 우선적으로 가온누리의 맛부터 재현하시오."
"강민구 씨가 정보를 넘기지 않는데 무슨 수로 맛을 재현할 수 있겠습니까?"
"강민구 씨 말로는 다 넘겼다고 하던데 왜 못한다는 것이오?"
"다 넘겼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일이 안 풀리다 보니 박현식과 장철우는 남의 탓만 하면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강민구의 심경에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고 있는 장철우는 박현식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은 지금의 상황부터 어떻게든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울러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박현식을 보면서 더 이상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준비가 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한국을 떠나겠다고 작정했다.
"그래서 그 맛을 낼 수 없다는 거요?"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번 달 말로 기한을 정해 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건 TJ 측에서 그런 요구를 해 온 통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얘기했잖소?"
"그렇다고 해도 그런 문제는 저하고 상의를 하셨어야죠."
"이미 각서를 써 버린 것을 어쩌란 거요?"
"어쨌든 지금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강민구 씨를 설득하는 것이 유일하니까, 사장님이 그 친구를 맡으십시오. 저는 어떻게든 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혹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 아니오?"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오해라고 했잖습니까? 제가 말한 것은 다른 후배의 얘기였습니다."
"알았소. 그 문제는 내가 힘을 써 볼 테니, 장 마스터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시오."
박현식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장철우가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러나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마당에 장철우를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기에 알고도 모른 척 이번 일을 넘어갔다.
박현식의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에서 최신 유행가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아이씨, 또 왜 전화한 거야?"
"사장님, 누구인데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TJ그룹의 이재철 전무요."
"이재철 전무라면 차라리 잘됐습니다. 사실상 이번 달 안에는 맛을 내기가 어려운 만큼 기한을 조금만 더 늦춰 달라는 얘기를 해 보십시오."
"알았으니 들어가시오."
장철우가 사라진 공간에 혼자 남은 박현식이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미……미친놈이 특허를 받았다고?"
조금 전 이재철과 통화를 했던 박현식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려치는 것을 경험했다.
참고로 이재철은 박현식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고성을 지르며 계약 파기를 부르짖더니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서 당황하기만 했던 박현식은 이재철에게 갖은 모욕을 당한 후에야 대략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고, 부랴부랴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한 고담의 특허권 침해 뉴스를 보고 나서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가온누리가 특허를 받은 이상 자신이 특허권을 침해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당연히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데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일로 언론에 함께 오르내리게 된 TJ그룹의 손해배상 청구였다.
이재철은 이번 일로 TJ그룹 전체의 이미지가 훼손되었다면서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금액이 어느 정도일지 전혀 짐작이 안 갔다.
'우선 아버지와 통화부터 해야겠어.'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박현식은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의 상황을 알렸다.
-어리석은 놈,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것이냐?
"요식업계는 비법의 유출을 우려해서라도 특허를 출원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놈도 당연히 특허를 등록하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이놈아, 그래도 대놓고 메뉴를 베낄 때에는 최소한 확인을 했어야지.
"설마 그 자식이 특허를 신청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도와주십시오."
-현식아, 지금은 방법이 없다. 무조건 그자를 만나서 잘못했다고 빌어라. 그러지 않으면 그자에게 돈을 물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TJ그룹으로부터 덤터기를 당할 수 있다.
"제가 걱정하는 것도 그 점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그자를 만나서 이번 일을 무마시켜라. 그러지 않으면 TJ호텔은 자신들이 면피를 하기 위해서라도 너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려고 할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느냐?
"아버지가 나서서 TJ그룹과 합의를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친놈, 기업에게 있어서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TJ그룹이 선뜻 합의를 해 줄 것 같으냐?
"그래도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잖습니까?"
-어리석은 놈, 그자들은 기업 이미지 때문에라도 자신들도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지훈을 만나서 무조건 설득해라. 지금은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휴~우! 그 자식에게 또 머리를 숙이라고요?"
-이놈아, 그래야만 나도 살 수 있다. 만약 이번 일이 커져서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때는 내 정치생명도 위험하다. 그러니 머뭇거리지 말고 당장 그자를 만나라.
"제가 만난다고 그놈이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답답한 놈,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한이 있더라도 그자를 설득해야만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늘 그렇지만 박현식은 이번에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믿었던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서라도 지훈을 설득하라고 하자 고작 그 정도의 일도 해결 못 해 주느냐며 원망을 하다가 되레 욕만 얻어먹었다.
-철딱서니 없는 놈, 네놈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이냐? 내가 어쩌자고 너처럼 어리석은 놈에게 사업체를 차려 줬는지 참으로 원망스럽구나.
"만나서 그놈을 설득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으셔도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두고 보십시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큰 박현식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큰소리를 쳤던 것과는 달리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절로 한숨만 나왔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말처럼 지훈을 찾아가서 사죄할 용기도 없어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문득 예은이 생각났다.
'맞아! 예은이가 나 대신 사과를 하고 눈물로 용서를 빌면 놈이 봐줄지도 몰라. 그래, 그럴 수도 있어.'
끝까지 비겁함을 버리지 못한 박현식은 그 길로 예은이에게 전화를 했고, 얼마 후에는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자기야,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만나자고 한 거야?"
"예은아, 네가 날 도와줘야겠다. 도와줄 수 있지?"
"당연하지. 뭔데?"
"너, 이지훈이란 놈을 알고 있지?"
"어!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알고 있어?"
"그건 됐고, 네가 나 대신 그놈을 좀 만나라."
"만나서 뭐 하라고?"
"실은 오늘 일이 생겼거든."
궁금해하는 예은이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알린 박현식은 지훈을 만나서 무조건 잘못을 빌고 이번 일을 무마하라고 했다.
그런데 예은의 반응이 이상했다.
"자기야, 내가 지훈 오빠를 알고는 있지만 그런 일을 부탁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냐."
"그게 무슨 소리야, 둘이 무척 친밀한 사이잖아?"
"아냐, 고작 두어 번 만난 것이 전부야.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부탁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동안 통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해?"
예은만 믿고 있던 박현식은 자기의 부탁이라면 그녀가 두말 않고 수락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자신이 예은에게 쏟은 돈이 엄청나기에 그녀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껏 지훈에게 부탁만 하는 처지였던 예은은 예전 클럽에서 있었던 일로 지훈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뜻 승낙할 수가 없었다.
"야, 내가 너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을 아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 둘이 날 만나기 전까지는 연인 사이였잖아?"
"자기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어."
"야, 끝까지 이럴래? 내가 너와 그 자식이 모텔 앞에서 얼쩡거리는 것을 똑똑히 봤는데 아니라고 할 거야?"
"언제, 그런 적 없어!"
당연히 부탁을 들어줄 것으로 예상했던 예은이의 거부에 화가 난 박현식은 자신만 알고 있던 사실을 발설했다.
반면 유혹하려고 했던 적은 있지만 사귀지는 않았던 예은은 박현식의 오해에 깜짝 놀라면서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