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회: 5-10 -->
검은 구름이 말끔하게 사라진 오후 하늘은 어찌나 맑고 촉촉한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푸른 물이 주르륵 새어 나올 것처럼 파랗기만 했다.
잠깐 내린 소나기로 아롱진 빗방울이 뜨르륵 흘러내리는 노란 꽃망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훈은 뒤에서 들려온 강민구의 음성에 몸을 돌렸다.
"사장님, 신입 사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집합 장소가 무궁화 홀이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강민구 씨, 신입 사원들에게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요?"
"사장님이 평소 강조하시는 의식동원과 한식의 세계화를 얘기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럴까 싶었는데, 다른 강사들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을 것 같은데 너무 식상한 것 아닐까요?"
"그래도 사장님이 직접 얘기하시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요?"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죠. 내 강의 이후의 일정은 뭐죠?"
"조별 토론이 잡혔습니다."
"계속 그런 식의 일정이라면 봄이 물드는 지리산까지 와서 바깥은 아예 나가 보지 못하겠네요."
"네?"
어느덧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면서 3월 말이 되었다.
특허권 침해로 고담을 고소한 지훈은 합의를 하고 받은 손해배상금 전액을 복지시설에 기부했고, 예정대로 별관을 오픈했다.
아울러 메르앙 호텔과 컨티넨털 호텔에 입점했을 뿐만 아니라 그 호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또 다른 세 개의 호텔에도 입점을 했다.
그리고 연초에는 회사를 공개해서 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서 지금은 서울과 수도권을 비롯해서 부산과 제주에 새로운 매장의 오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이곳에 내려와서 교육을 받고 있는 신입 사원들은 기존의 매장을 비롯해서 새로 오픈하는 여섯 곳의 매장에서 일하게 될 직원들이었다.
"봄이라 그런지 나부터서 춘곤증이 심하게 밀려오는데 강의를 해 봐야 효과가 있을까요?"
"사장님, 설마 강의를 안 하시겠다는 것은 아니죠?"
"강의보다는 다 함께 산이나 가볍게 오르면서 머리나 식히는 게 어떻습니까?"
"산을 오르자고요?"
"갑시다."
잠시 후, 140명의 신입 사원이 모여 있는 교육장에 들어선 지훈은 교재를 모두 덮게 하고는 편한 복장으로 리조트 앞 현관으로 모이라고 했다.
"사장님, 강의는 안 하십니까?"
"조미정 씨는 이렇게 좋은 날에 따분한 강의를 듣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산을 거니는 게 좋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산을 거니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바로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알겠습니다."
"끼야~호!"
처음에는 지훈의 의도를 몰라서 당황했던 신입 사원들은 강의를 하지 않고 산책이나 하자는 말에 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더니 재빨리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중에는 지난달부터 총무부장의 자격으로 가온누리로 출근한 조미정도 있었는데,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화사한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혹시 몰라서 등산복을 갖고 왔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나 봐요."
"조미정 씨는 등산을 좋아하나 봐요?"
"학교를 다닐 때에도 답답할 때면 종종 산을 찾았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가온누리를 시작한 이후로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산 좋아하시면 저와 종종 등산을 다니실래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지훈의 옆자리를 차지한 조미정은 그와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와 등산을 다니면 재미가 없을걸요."
"왜요?"
"난 산을 타다가도 나물이나 약초가 있으면 그냥 못 지나칠 때가 많거든요."
"그냥 못 지나치면 심마니처럼 그걸 캐세요?"
"나도 모르게 매번 그렇게 되더라고요."
"잘되었네요. 그러면 사장님과 같이 산을 다니면 저도 나물과 약초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겠네요? 그러다 보면 할아버지 건강에 좋은 만병초도 캘 수 있겠어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보다 조 회장님은 홍삼과 마가목 열매는 꾸준히 드시고 계시죠?"
"그럼요. 지금은 할아버지께서 알아서 꼬박꼬박 잘 챙겨 드세요."
조진산과 인연을 맺게 된 지훈은 만성 신부전증에 좋은 각종 식자재와 약초에 대해서 알려 줬을 뿐만 아니라 직접 끓인 홍삼차도 꾸준하게 보내 줬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던 홍삼은 콩팥에도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만성 신부전증에도 좋았다.
아무튼 예전에 비해서 병이 많이 좋아진 조진산은 지훈의 정성과 함께 병에 좋은 것들을 장복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훈이 알고 있는 다른 시간대의 조진산은 이맘때에 만성 신부전증이 악화되면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는데, 바뀐 그의 운명이 지훈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드실 수 있게 미정 씨가 잘 챙기세요."
"그럼요. 참, 청담동 매장은 오늘부터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홀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겠지만, 주방에도 신경을 많이 써 달라고 하세요."
"그 점은 미리 얘기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공사는 언제까지 하죠?"
"애초부터 외관을 많이 신경 써서 지은 건물이라 외관 공사는 지붕만 하고 내부 인테리어 공사에 집중하기로 해서 다음 주면 끝난다고 들었습니다."
청담동 매장은 원래 파밀시에테의 본점이었다.
3개월 전 특허권을 침해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가온누리의 비법을 훔치려고 했던 박현식은 예은과의 스폰 관계까지 알려지면서 어쩔 수 없이 경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통에 고객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고, 그 와중에 요리사들의 학력 위조까지 밝혀지면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게다가 법적 분쟁까지 갔던 TJ호텔과의 소송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했는데, 그게 원인이 되어서 끝내는 파산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경매로 나온 본점을 가온누리가 낙찰받은 것이다.
"시간에 쫓겨서 서두르지 말고 꼼꼼하게 공사를 하라고 하세요."
"총무부 직원들이 수시로 현장을 방문해서 확인하고 있는 만큼 공사는 꼼꼼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다니 역시 조미정 씨답네요."
"총무부장이면 당연히 챙겨야죠."
"나는 조미정 씨만 믿겠습니다. 참, 다음 달에는 14분기 부가세를 신고해야죠?"
"사장님 지론대로 성실 납부를 준비하고 있으니 그 점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고맙습니다."
"갑자기 뭐가요?"
"나는 무작정 회사를 키울 생각만 했지 막상 관리를 어떻게 할지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요즘은 조미정 씨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그 말은 제가 사장님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얘기죠?"
"그 정도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죠."
"사장님이 절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너무 기쁜데요."
지훈을 무척 좋아하고 있을 거라는 조진산의 추측과 달리 지훈에 대한 조미정의 감정은 가벼운 호감과 약간의 관심뿐이었다.
하지만 가온누리에서 함께 지내는 사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훈에 대한 관심과 호감이 급격히 팽창한 조미정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지훈의 말을 들은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아서 마냥 행복해하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미리 얘기하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날 도와주십시오."
"그럼요. 가온누리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진출해서 세계 최고의 외식 업체가 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죠."
"아! 해외 진출에 대비해서 직원들의 외국어 교육도 회사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실시했으면 하는데, 그것과 관련한 기획안을 준비해 주실 수 있겠어요?"
"그 정도는 일도 아니죠. 제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사장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참! 오늘 저녁에 서울로 올라가시나요?"
"내일이 성애원 가는 날이라 가 봐야 합니다."
"성애원이면 그때 말씀하셨던 고아원인가요?"
"맞습니다."
성애원은 키친 마스터 결선 참가자들이 3년 전부터 음식 봉사를 하고 있는 고아원으로, 지훈도 올해부터는 빠짐없이 봉사를 나가고 있었다.
"저도 가 보고 싶은데 따라가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노란 개나리가 담장을 대신하고 있는 공간 안쪽에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3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잘 닦인 농구장과 농구 골대가 있었다.
평소라면 아이들이 농구를 즐기고 있어야 할 농구장에 여러 개의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많은 이들이 맛있는 냄새를 피워 올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될까요?"
"미정 씨는 아이들의 배식을 맡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게요."
지훈과 미선 외에도 미정과 가온누리의 몇 명 직원을 비롯해서 많은 이가 기쁜 얼굴로 요리를 하고 있는 이곳은 성애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3년 전 키친 마스터 결선 진출자들을 비롯해서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성애원의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있었다.
"형, 아직 멀었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맛있는 냄새가 나서 못 견디겠어요."
"형, 나는 많이 먹을 생각에 아침도 굶었으니까, 무조건 많이 줘야 해요?"
"인석아, 그렇다고 아침을 굶으면 어떡해?"
"많이 먹으려고 그랬죠."
"자식, 배 많이 고파?"
"참을 수는 있어요."
"고기가 잘 익었는지 확인 좀 해 볼래?"
"정말요?"
"어떤지, 먹어 봐."
"오~! 너무 맛있어요."
다들 바쁘다 보니 음식 봉사는 한 달에 두 번밖에 못했다.
그동안 유학을 갔다 온 데다 가온누리를 비울 수 없어서 봉사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지훈은 올 1월부터는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그 와중에 많은 아이들과 친해졌다.
그래서 지금도 지훈 주위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어! 준상이 형이다."
"준상이 형, 여기야."
"형, 이쪽이에요."
"안녕하세요, 미선이 누나."
"어, 준상이 왔구나."
군침을 계속 흘리는 아이들에게 지훈이 맛을 보라며 스테이크를 주고 있을 무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다가왔다.
미선과 반갑게 인사를 한 그는 지훈을 살짝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형, 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너는 혹시?"
"네. 준상이에요."
"그렇구나. 몇 년 사이에 몰라보게 컸네."
"시간이 그만큼 흘렀는데 당연히 커야죠."
갑자기 나타난 젊은 사내는 3년 전까지 이곳 성애원에서 지내던 유준상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그는 성인이 되면 고아원을 떠나야 하는 규정상 성애원을 떠난 상태였는데, 지훈과는 오늘의 만남이 3년 만에 처음이었다.
"자식, 3년 전에는 아기였는데 이제는 어른이 되었네. 지금은 어디서 사니?"
"한동안 지방의 공사판을 계속 전전하다가 서울로 올라온 지 며칠 안 됐어요."
"준상아, 공사판을 돌아다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애써 요리를 배워 놓고 왜 공사판을 전전해?"
공사판을 전전했다는 말에 지훈의 바로 옆에서 요리를 하던 정미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을 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대로라면 유준상은 요리를 배운 것 같았다.
"누나, 준상이가 요리를 배웠어?"
"그래, 우리가 요리하는 것 보고 준상이도 요리사가 되고 싶다면서 요리 전문학교에 들어갔었어."
"저도 요리사가 되어 보려고 했었는데,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요리를 하면 행복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넌 요리에 소질이 있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요리를 다시 시작해."
"그건 다 옛날얘기죠."
"옛날얘기라니, 작년만 해도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랬는데 해 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지훈은 잘 모르고 있지만 그동안 꾸준히 봉사를 나왔던 정미선은 유준상이 요리사가 되기 위해서 요리 전문학교에 들어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울러 요리 학교를 다니는 동안 봉사가 있는 날이면 꾸준히 찾아와서 도움을 줬기에, 그가 요리에 재질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서 지금의 상황을 무척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