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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입에서 상황을 짐작할 만한 얘기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아줌마, 준상이 형은 요리사가 될 수 없어요."
"왜?"
"고아라서 안 된대요."
"요리사와 고아가 무슨 상관인데?"
"아무 데서도 형을 안 받아 줘요."
"그것 때문에 원장 할머니가 많이 울었어요."
"이런! 어쩌면 좋아……."
이제야 유준상의 상황을 대충 알게 된 미선은 안타까워하며 자기도 모르게 지훈을 바라봤고, 그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지훈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향긋한 커피향이 물씬 피어나는 작은 사무실 안에는 은테 안경을 쓴 인자한 표정의 나이 지긋한 수녀가 자리하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지훈이 앉아 있었다.
"원장님, 준상이의 일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준상이가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듣기로 준상이가 요리 학교를 나왔다던데 어찌해서 공사 현장을 따라다니는 것입니까?"
"아! 그 얘기이군요. 나도 우리 준상이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게 준상이의 얘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쁜 뜻으로 묻는 것은 아닙니다."
"지훈 씨가 얘기를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준상이는 정말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해요."
"미선이 누나 말로는 그 녀석이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충분한 소질도 있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자기도 요리사가 되겠다면서 무척 열심이었는데……. 말은 안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과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세상을 많이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아이들 말로는 고아여서 취직을 못 한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취직을 못한다는 것이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그것도 있지만 준상이는 원래 소년원에서 지내다가 출소 후 이곳으로 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어요."
"준상이가 소년원에 있었다고요?"
"고아인 데다 화교 출신이다 보니 또래 아이들이 그걸로 많이 놀리고 종종 폭행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루는 못 견디고 아이들과 대판 싸웠는데, 오히려 학교에서는 준상이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웠다고 하더군요."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의 심각성은 지훈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준상이가 화교 출신이라면 같은 또래들이 뭐라고 놀렸을지 훤히 짐작이 갔고, 그런 상황에서 고아인 준상이가 덤터기를 쓴 것 같았다.
"그랬군요. 그런데 화교 출신이라면 부모님은 살아 계시는 것입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생활고를 비관하며 자살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준상이도 중태였는데 용케 생명을 구했고, 그 이후에는 충청도의 고아원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원장님,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지훈 씨도 준상이를 채용해 줄 수 없나요? 어릴 적 순간의 실수로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심성만큼은 착하고 바른 아이입니다."
"그것 때문에 원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하나님. 지훈 씨, 고맙습니다. 그 아이라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원장으로부터 준상의 사정을 들은 지훈은 그를 채용할 테니 앞으로는 근심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얘기를 마쳤다.
그사이 지훈의 빈자리를 차지한 준상은 정미선과 호흡을 맞춰 가며 요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배식까지 하고 있었다.
'녀석, 좋아 보이네.'
스스로가 요리사라 그런지는 모르지만 요리하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였다.
지금 스테이크를 만드는 준상의 얼굴에는 뜨거운 열정과 함께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는 표정이 넘쳐 났다.
그것만 봐도 준상이가 얼마나 요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지훈은 자신이 좋은 선택을 했다고 여기며 그에게 다가갔다.
"누나, 허브 살트는 어디 있어요?"
"바로 옆에 있을 텐데, 없어?"
"그건 다 떨어졌어요."
"그래? 그러면 조리대 밑의 선반 안에 재료가 전부 있으니까 그걸 이용해서 새로 만들어."
"네, 그럴게요."
스테이크는 육류의 비린내를 없애고 풍미와 맛을 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허브와 소금을 섞은 허브 살트를 살짝 뿌려 먹는다.
잠시 후, 선반 안에서 재료를 찾은 준상은 잘게 빻은 여섯 가지의 허브를 소금 통에 집어넣기 시작했는데, 망설임이 전혀 없는 것이 마치 처음부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훈이 그 자리에 당도한 것은 그때였다.
"준상아, 로즈마리를 적게 넣은 대신에 파인애플 세이지를 너무 많이 넣는 것 같은데?"
"소금 때문에 그랬어요."
"소금이 왜?"
"이건 국산 천일염을 가공한 꽃소금이잖아요."
"그게 어때서?"
"이상하게 국산 소금은 쓴맛이 강하더라고요. 그래서 쓴맛을 중화시키기 위해서 쓴맛이 나는 로즈마리를 줄이고 파인애플 세이지를 많이 넣었어요."
"국산 소금이 쓴맛이 강하다고?"
"저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요리 학교 다닐 때 프랑스와 일본의 소금을 한번 찍어 먹어 봤는데 거기 소금은 우리 소금에 비해서 쓴맛이 훨씬 약하더라고요."
"아!"
준상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지훈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프랑스 유학 시절, 뽀이도퀴시가 자신에게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당시 뽀이도퀴시는 프랑스의 소금은 분명 세계 최고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소금이 다른 나라의 소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이유는 요리를 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세계 최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금에 함유된 미네랄의 양이 10%가 넘으면 쓴맛이 강해지는데 소금 본연의 맛을 가장 잘 살리면서 쓰지도 않고 다른 맛을 침범하지도 않는 적당한 미네랄의 농도는 5~7%라고 했다.
그런데 프랑스의 소금은 딱 그 정도의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는 것에 반해 다른 나라의 소금은 미네랄이 거의 없거나 아니면 너무 많다고 했다.
즉, 미네랄이 많으면 몸에 좋을지는 몰라도 쓴맛이 강해지는데, 한국의 소금은 미네랄 함유량이 20%에 육박하는 만큼 프랑스 소금과 비교하면 쓴맛이 강했다.
"준상아, 프랑스와 일본의 소금을 찍어 먹어 봤다고 했니?"
"처음 보는 소금이 있기에 호기심에 살짝 찍어 먹어 봤어요."
"그랬는데도 쓴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고?"
"차이가 워낙 심한 만큼 다들 대번에 아는 것 아닌가요?"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났다고?"
"네, 형은 안 그래요?"
"으……응."
소금을 대표하는 맛은 당연히 짠맛이다.
그렇다 보니 강한 짠맛 때문에 직접 맛을 봐서는 쓴맛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뛰어난 미각을 자랑하는 미식가나 평론가도 소금 그 자체를 먹어서는 쓴맛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음식에 뿌려진 소금을 먹었을 때만 어렴풋이 그 차이를 알아내는 정도였다.
그런데 소금을 직접 찍어 먹고도 쓴맛의 차이를 바로 알아냈다면 준상이의 미각은 상상 이상의 경지였다.
"그래요? 내가 이상한가?"
"준상아, 바빠 죽겠는데 뭐 하고 있어. 애들, 줄 서 있는 것 안 보여?"
"허브 살트 다 만들었으니까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이 녀석, 엄청난데!'
*6. 다 똑같아요!
일요일을 맞아 성애원을 찾은 지훈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여의도에 위치한 새나라당 중앙 당사에서는 당의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비공식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당의 대표를 비롯한 핵심 고위 인사 외에도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는 김기철 비서실장도 함께하고 있었다.
"이번 지자체 선거는 충청권과 경기도에서 승패가 갈리는 것이 확실한 만큼 그 지역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충청권과 경기도에서 우리 당이 승리하려면 최우선적으로 혁신적인 인사를 기용해야지 않겠습니까?"
"혁신적인 인사도 좋지만 당선을 위해서는 지명도가 높은 인물을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게 좋다고 생각입니다."
"지자체 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는 또 달라서 참신함과 성실함이 의외의 변수 역할을 하는 만큼 그 부분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모임은 5월 16일로 예정된, 이제 46일 남은 지자체 선거와 관련해서 후보자 결정과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각 계파의 이해와 요구가 다른 만큼 결국은 후보자 선정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김기철 비서실장은 얘기를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는 입장이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광역단체장에 나설 사람은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는 비중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뭐로 판단하겠다는 것입니까?"
"여론조사가 있잖습니까? 각종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 당의 서울시장 후보 중에서는 정명준 후보가 가장 지명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명도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선거가 첨예한 대립 국면임을 고려하면 야당의 후보에 대한 상대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경은 의원을 후보자로 내세우자는 겁니까? 나 의원은 다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몇 차례의 구설수에 오른 만큼 선거에 나가면 필히 낙선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가 계속될수록 자기 계파의 인물을 공천하기 위한 암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그 상황에서 여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기철 비서실장이 나섰다.
그는 대통령의 뜻이라면서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당내 경선을 통해서 후보자를 결정하자고 했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회의의 주된 내용은 경선 방식을 결정하는 문제로 옮겨 갔다.
"당의 대의원들만 투표를 해서는 민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뢰할 수도 없는 전화 투표나 인터넷 투표를 시행했다가는 왜곡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야당도 하는데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제2당에 불과한 야당의 방식을 무조건 따르자는 것은 무슨 논리입니까?"
"민의를 담자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정치 논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들 진정하시지요. 이렇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다가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어떤 성과를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당내 경선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서로에게 유리한 방식을 주장하다 보니 암투가 진행되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결국 김기철 비서실장이 나섰다.
그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대립을 하고 있는 회의 참가자들을 진정시키고 비교적 원만하게 합의를 할 수 있는 기초 단체장 후보들부터 교통정리를 하자고 했다.
"강남을 비롯해서 강동과 강서 지역은 정리가 되었고, 이제는 강북을 시작하죠."
"강북 지역은 특별히 문제되는 것이 뭐가 있죠?"
"강북 지역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성북구가 문제입니다."
"성북구라면 박철웅 때문인가요?"
"맞습니다. 그자가 출당을 당하고도 뻔뻔하게 공천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박철웅이 걱정했던 것처럼 박현식과 박철웅의 부자 관계가 알려지면서 여론의 비난에 시달린 박철웅은 당에서 출당 조치를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렇게 해서 의도치 않게 무소속이 된 박철웅은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핑계로 구청장 출마를 공식 선언했고 당에 공천을 신청했다.
그런데 그가 구청장 출마를 결심한 배경에는 2년 후 있을 총선에서 자신이 공천을 다시 받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선 데다 폭등하는 비난 여론을 의식한 당의 지도부에서 의원직 사퇴를 계속 종용해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당 지도부는 그의 의원직 사퇴만 받아들이고 구청장 공천 신청서는 접수도 않고 돌려보냈다.
결국 이용만 당하고 버림을 받은 박철웅은 이에 격분해서 무소속으로 구청장 선거에 출마했고, 기필코 당선해서 자신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하겠다는 뻔뻔한 궤변을 떠들고 다녔다.
"그건 접수를 안 하고 돌려보낸 것 아니었나요?"
"그랬지요. 그런데도 그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자가 무소속으로 나온다면 여권 표가 나눠지면서 야당만 좋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걱정입니다. 게다가 그자가 당선이라도 되는 날에는 우리 당의 입장만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