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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는 없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자를 낙선시키고 우리 측 인사를 당선시켜야 합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하지만 그자가 기존의 당 조직을 장악하고 있어서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당에서 출당을 당한 인사가 당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대표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자의 자금력이 상당하잖습니까? 그렇다 보니 막대한 금력을 앞세워서 당 조직의 이탈을 철저히 막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그런 자일수록 구린 데가 많은 법이니 뒷조사를 해 보라고 하세요. 그러면 분명 뭔가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 일은 당에서 하기에는 그렇고 내곡동에서 도와줬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기철 비서실장 옆에는 안경을 쓴 50대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국가정보원 원장이었다.
아울러 내곡동은 여당 내에서 국정원을 지칭하는 은어였는데, 그는 박철웅에 대한 뒷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후일담이지만 박철웅은 국정원에 의해 완전히 털려서 파렴치범으로 전락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비리와 탈세가 드러나면서 천문학적인 벌금을 납부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내곡동에서 그 일을 맡아 준다니 한시름 덜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지자체 선거로 여러 명의 현역 의원이 의원직을 반납하게 되는데, 그 부분에 대한 논의도 진행해야지 않겠습니까?"
"지자체 선거가 끝나면 바로 보궐선거가 실시되는 만큼 당연히 논의를 해야지요."
"잠시만요. 그 부분과 관련해서 여러분의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자체 선거 이후 실시되는 국회의원 보궐선거 얘기가 나오자 다시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기철 비서실장이 나섰다.
그는 대통령의 뜻이라면서 서울에서 실시되는 보궐선거에는 무조건 지훈을 공천하겠다고 했다.
"이지훈 씨라면 가온누리의 대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친구라면 참신한 데다 인지도도 상당하고 무엇보다도 영웅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만큼 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당내에 아무런 기반이 없어서 당내 경선에서 승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협조를 얘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미리 말 하자면 전략 공천을 해서 당내 경선을 없앨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게 각하의 뜻입니다."
"각하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각하가 눈여겨보시고 계신 이상, 그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각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유독 혼자만 우뚝 솟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건물 외벽을 온통 뒤덮고 있는 까만색 유리창 때문에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는 TJ그룹의 사옥 54층에는 임원 회의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최고급 호텔의 리셉션 룸을 연상시킬 정도로 잘 꾸며진 이곳에는 그룹의 회장인 이현호가 흐뭇한 표정으로 신사업전략부를 이끌고 있는 이재만 상무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재만 상무, 패션과 레저의 중국 진출이 대성공이라고?"
"그렇습니다. 작년부터 매장을 확대시킨 것이 중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리면서 매출은 550프로 늘었고 영업이익도 비약적으로 늘었습니다."
"매장 확대는 지금도 추진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중국의 각 성에 지부를 설치하고 성도가 있는 대도시만이 아니라 중대형 도시에도 진출할 생각입니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큰 만큼 중소 도시의 숫자도 상당한데 그곳은 어떻게 공략할 생각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것처럼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큰 만큼 직영점 체계로는 전 지역을 커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소 도시는 가맹점을 모집해서 영업망을 확대할 생각입니다."
"가맹점 모집이 될까?"
"몇몇 성에서 시험 삼아서 가맹점 설명회를 개최했는데, 그 열기가 엄청나서 오히려 선정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가맹점 모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하고 있군. 참! 작년 겨울부터 시작한 화장품 사업도 매달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국내의 반응도 뜨겁지만 동남아 각국의 반응도 엄청나서 벌써부터 올해의 매출 목표와 영업이익을 상향 수정하고 있습니다."
"국내와 동남아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만큼 화장품도 중국에 진출해야지 않을까?"
"이미 태스크 포스를 꾸려서 준비하고 있는 만큼 하반기에는 진출하게 될 것이며, 그때쯤 되면 그룹 전체의 주가가 또다시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아주 좋아!"
짝짝~!
이재만의 보고를 받은 이현호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고, 이를 본 다른 임원들도 덩달아서 박수를 쳤다.
그중에는 땡감을 씹은 표정의 이재철도 있었는데, 그는 다른 임원들과 달리 건성으로 박수를 치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현호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이재철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이현호는 정색을 하며 좌중을 둘러보더니 그 누구도 예상지 못한 폭탄 발언을 했다.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신사업전략부의 눈부신 활약으로 우리 그룹은 수년간 이어져 왔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소. 그래서 오늘부로 이재만 상무를 사장으로 발령하겠소."
"당연히 그러셔야죠."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이라고 그러니 관련 절차를 속히 마무리하고 이 사실을 공표하시오."
"회장님,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해서 TJ그룹을 한국 제일의 그룹이자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겠습니다."
"이 사장, 앞으로도 잘해 주게."
형인 이재만이 사장으로 승진하는 것은 작년부터 다시 촉발된 후계자 경쟁에서 그가 이재철을 누르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이재철은 더더욱 똥 씹은 표정이 되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할 수도 없어서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재만이 이끄는 신사업전략부가 눈부신 성과를 바탕으로 그룹을 견인해 갈 때 그가 이끄는 외식과 호텔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는 여전히 저조한 실적으로 죽을 쒔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고담의 일이 터지면서 그룹 전체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비난에 시달리자 지금껏 그를 지지했던 임원들도 전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빌어먹을, 내가 어쩌다가…….'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이재철은 불과 작년 상반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룹의 차기 총재가 당연시되던 자신의 씁쓸한 처지를 견디지 못해서 악을 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지훈을 떠올렸고, 그로 인해서 이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그게 다, 그놈 때문이야."
종종 그렇지만 처음부터 높은 곳에서 시작한 사람은 늘 순탄한 삶만을 살아왔기에 패배나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법이다.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에 당면하면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기보다는 희생양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건 이재철도 마찬가지였다.
'그 죽일 놈이 이상한 음식을 만들지만 않았어도, 아니 특허만 신청을 안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이전까지 박현식을 원망하고 탓했던 이재철은 그가 몰락하고 사라지자 이제는 그 화살을 지훈에게 돌리다가 문득 자신의 부하 직원이 제안했던 기획안을 떠올렸다.
'그게 어디 있더라?'
이재철이 문제의 기획안을 찾고 있을 무렵, 지훈은 지난주부터 가온누리로 출근한 유준상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상아, 골동면은 맛이 어떤 것 같니?"
"다채로운 재료의 맛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 마치 브라스밴드의 합주처럼 활기차면서 아주 맛있어요."
"밑간은 뭐로 맛을 냈는지 알겠니?"
"잘 숙성된 천연 간장과 깨소금에 약간의 참기름과 유채 벌꿀로 만든 식초를 가미한 것 같은데요?"
"정확해. 어떻게 맛만 보고도 그런 세세한 것들을 알아내는지 정말 대단한데. 넌 정말로 절대 미각의 소유자인가 보다."
"에이, 아무렴 제가 그럴 리가요."
"아니야. 그 어떤 사람이라도 너처럼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맞히지는 못해. 그러면 이쪽의 골동면도 먹어 볼래?"
"이것도 똑같아 보이는데 뭐가 다른가요?"
"일단 먹어 봐."
준상이 절대 미각의 소유자임을 깨달은 지훈은 자신이 별도로 음양오행기를 주입한 골동면과 통상적으로 서비스되는 골동면을 차례대로 먹였다.
이는 음양오행기가 주입된 양념류와 조미료 그리고 장류를 사용해서 만든 음식과 음식 전체에 음양오행기가 들어간 음식이 맛에서 어떤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서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이건 조금 전 것보다 맛이 많이 떨어지네요?"
"그 정도야? 바로 느껴져?"
"네, 대번에 알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것까지 먹으니까 아까의 골동면에서 뭐가 아쉬웠는지도 알겠어요."
아무래도 음양오행기가 직접적으로 주입되지 않은 골동면의 맛이 떨어진다는 것은 지훈도 익히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절대 미각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 맛이 대번에 느껴진다니 섭섭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음양오행기가 주입된 골동면도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하니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뭐가 아쉬운데?"
"분명 지금 먹은 골동면보다 아까 먹은 골동면의 맛이 더 좋은 것은 틀림없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전에 먹은 불고기나 맥적도 그랬고, 이번에 먹은 골동면도 맛이 비슷해요."
"뭐가 비슷하다는 거야?"
"다 똑같아요!"
"그러니까 뭐가 똑같다고?"
"분명 다른 재료를 사용해서 다른 조리법으로 만든 전혀 다른 요리인데도 하나같이 뒷맛이 다 똑같아요."
"저마다 다른 요리인데도 뒷맛이 똑같았다고?"
"저도 말을 해 놓고 보니까 이상한데, 맛이 거의 비슷한 것이 마치 똑같은 음식을 계속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어요. 하지만 그 뒷맛이 너무 맛있어서 나쁘지는 않았어요."
절대 미각을 소유하고 있는 준상은 어떤 음식이든 뒷맛이 똑같았다고 얘기했고, 그 얘기를 들은 지훈은 음양오행기 때문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뒷맛이 맛있다는 말에 그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그 문제보다는 음양오행기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서 맛의 차이가 많이 난다는 말에 그것만 고민하느라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애써 방법을 구한다고 구했는데도 맛의 차이가 확 드러나다니, 이것 낭패인데.'
문제의 기획안을 꼼꼼하게 검토한 이재철은 해당 기획안을 올린 문제상 부장을 불렀다.
어떤 생각으로 그런 기획안을 작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가온누리를 벤치마킹해서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지 못한 부분까지 채운 새로운 형태의 한식 패밀리 레스토랑을 설립하자고 했다.
"전무님, 부르셨습니까?"
"문 부장, 한식이 각광을 받고 있는 만큼 우리도 변화하는 추세에 적극 호응해 전문 한식당을 표방하는 현대적인 개념의 패밀리 레스토랑을 개설하자고 했습니까?"
"맞습니다만 갑자기 그걸 물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 기획안은 이미 폐기된 것 아니었습니까?"
"내가 유심히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점이 있어서 문 부장을 다시 불렀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기획안을 보니까 궁중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정통 계승자를 영입해서 정통성을 강조하자고 했던 부분이 무척 흥미로운데, 좀 더 설명을 해 주겠습니까?"
"전무님도 아시겠지만 한식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은 이제 하나의 트렌드로 확실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가온누리 같은 유명 한식당도 등장하고……."
"그 부분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세요."
"어쨌든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한식을 표방하는 식당이 생기고 있습니다만, 한식은 뭐니 뭐니 해도 궁중 요리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 부분은 동감하는데, 혹시 궁중 요리를 정통으로 배운 계승자를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