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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오성도 국회의원들과 몇 마디 나누면서 지나가는 얘기로 들은 것이 전부였기에 자세한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훈의 얘기만 듣고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고, 지훈도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그날의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워낙 대성황을 이루었기에 계획과는 달리 부산에서 이틀을 더 머문 지훈은 월요일 저녁에 서울로 출발했다.
그날 밤 TV에는 조선 왕실의 인사라는 노인과 궁중 요리 전문가들이 몇몇 연예인들과 한식과 건강이라는 주제를 갖고 얘기를 나누는 토크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건 씨는 그러면 궁중 음식을 오랫동안 먹고 지내겠네요?"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수라간 상궁과 대령숙수가 요리를 담당했으니까 쭉 먹고 지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이라면 그 이후에는 그분들과 헤어졌다는 얘기입니까?"
"제가 마지막 왕비였던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을 떠난 직후 궁에 있던 모든 이가 뿔뿔이 흩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런! 그러면 어렵게 이어지던 궁중 요리의 맥도 그때 함께 끊어진 셈이네요?"
"그렇다고 봐야죠."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죠."
"어쨌든 조선 왕실의 인사로 제대로 된 궁중 요리를 계속 드셔 본 사람으로서 요즘 나오는 궁중 요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전문가들이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통에 상당 부분 재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당 부분이라면 많이 복구가 되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는 얘기인가요?"
"복구가 된 것은 거의 완벽하게 재현되었습니다. 제가 거의라고 표현한 것은 손맛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 근래 소문이 자자하다는 한국 식당을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긴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의 정상도 갈 정도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는데, 그곳의 음식을 먹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왕실의 인사로 나온 이건은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했는데, 방송사는 그의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자료 화면으로 손님으로 가득 찬 식당을 내보냈다. 그런데 화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곳이 가온누리임을 알 수 있었다.
"실망한 이유는 맛이 없어서인가요?"
"아니요. 맛은 소문만큼이나 정말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맛이 좋았다면서 걱정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맛은 좋았지만 그 음식은 한식의 탈을 쓴 국적 불명의 요리였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알고 있는 궁중 음식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국적 불명의 요리라면 한식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그 부분은 제가 얘기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건은 조선 왕실의 후손으로 궁중 음식을 먹고 자란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아울러 방송에서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며 이건의 발언에 대한 신빙성을 잔뜩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그가 가온누리를 비판하자 해당 프로를 보던 시청자들의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상황에서 이건을 대신해서 나선 이는 궁중 요리 전문가였는데, 그는 전문가 티를 팍팍 내며 가온누리를 깎아내렸다.
장황하게 이어진 그의 얘기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시중에는 궁중 요리를 표방하며 장사를 하는 업소가 많은데 그건 궁중 요리가 아니며 한식의 정통성까지 잃은 요리라고 맹비난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또다시 자료 화면이 나갔는데 이번에도 가온누리였고, 시청자들은 이를 통해서 게스트로 나온 사람이 맹비난하는 업소가 가온누리임을 똑똑하게 알았다.
"한식의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사회자님도 가 보셨나요?"
"저도 가 봤습니다."
"맛은 좋죠?"
"좋았습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그런 업소들은 맛을 내기 위해서 우리 민족 본연의 맛을 전부 포기했습니다. 심지어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며 정을 나누는 우리의 미풍양속까지 해쳤습니다."
"방금 맛을 내기 위해서 우리 민족 본연의 맛을 전부 포기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사회자님은 일본이 우리의 김치를 본떠서 만든 기무치를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게 김치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김치는 우리가 만든 것이 진짜 김치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무치를 김치가 아니라고 여기고 짝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들이 만든 기무치가 김치 본연의 맛과 다르고 조리 방법이 달라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것입니다. 일본이 아무리 우리를 흉내 내서 기무치를 만들고 그게 진짜라고 주장해도 세계 사람들은 기무치가 아닌 김치를 진짜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시중에서 한식당을 표방하는 업소들이 바로 김치가 아니라 기무치라는 얘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이건 씨 의견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요리라는 것은 그 나라와 민족의 혼과 얼 그리고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전혀 담고 있지 않은 음식을 한식이라고 봐야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무치가 김치가 아닌 것처럼 그런 음식들은 한식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렇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우리의 정통성을 잃어버린 음식점들이 마치 제대로 된 한식당처럼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얘기를 듣고 보니 큰일이군요."
"맞습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말로만 신토불이를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건 씨, 노력이라면 어떤 부분을 얘기하시는 것입니까?"
"마음 같아서는 한식의 표준을 정하고 싶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만큼 최소한 궁중 요리의 원형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궁중 요리의 원형을 지키자는 말에는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찬성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궁중 요리의 원형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소한 아무나 무분별하게 궁중 요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못하게 해야지 않을까요?"
"궁중 요리의 기준을 정해서 기준을 위반하는 업소에 대해서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는 건가요?"
"조선 왕실은 사라졌지만 조선이라는 왕조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민족의 전통성을 지키는 차원에서도 그 부분에 대한 노력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궁중 요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건 씨를 비롯한 왕실의 후손들이 적극 나서야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궁중 요리의 전통성을 지키는 일에 바치고자 합니다."
방송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고 가온누리는 간간이 나오는 자료 화면을 통해서 계속 노출되었다.
어둠이 슬슬 밀려나는 북악산에는 찬란한 4월의 아침 햇살이 고운 비단처럼 너울거리며 퍼졌다.
찬란한 아침 햇살 때문에 지붕에 달라붙은 이슬이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현란한 광채를 사방으로 뿌려 대고 있을 무렵, 가온누리의 뒤뜰에서는 한 사내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막 깨어난 촉촉한 대기가 절로 상쾌한 느낌을 주는 이른 아침에 그 누구보다 하루를 먼저 시작하는 이는 지훈이었다.
"이번에는 콩이 좋아서 메주가 잘 나오겠어."
물에 불린 콩을 살펴보다가 이를 큰 가마솥에 부은 지훈은 노련한 손놀림으로 조리 기구를 조작해서 콩을 삶기 시작했다.
"사장님, 빨리 일어나셨네요."
"하마연 씨,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강민구 씨, 어제는 늦게까지 요리를 한 것 같던데 빨리 일어났네요?"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절로 빨리 깨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어떠세요?"
"이제는 아무 불편함 없이 잘 걸으셔서 오늘 퇴원을 해서 집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퇴원이라니 잘되었네요. 차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쓰세요. 그런데 어머니가 퇴원을 하신다면,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네요?"
"그것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해 봤는데, 당분간은 계속해서 이곳에서 지낼 생각입니다."
"집에 어머니만 계시면 힘들고 외롭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도 집에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요리를 배울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요."
"그래도 종종 집에 들르세요."
"그럴 생각입니다."
무죄로 풀려난 강민구는 지훈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부족한 자신의 요리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감명받은 지훈은 동석과 함께 근무시간 이후에 그에게 요리를 가르쳤는데,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다른 요리사들도 합류했다.
덕분에 가온누리의 주방은 영업 시간이 종료된 이후에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민구야, 신문이 왔을 테니 가져와라."
"예."
"사장님, 같이 하시죠."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하마연 씨는 허브와 향신료의 맛을 구별하는 훈련이나 하세요. 원래 그런 것은 빈속에 하면 더 효과가 좋은 법입니다."
"알겠습니다. 참! 준상이는 어디 있습니까?"
"방에 있는 것 아니에요?"
"아뇨. 자고 일어나 보니까 방에 없어서 사장님과 같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고아로 고시원에서 지내던 유준상은 가온누리에서 일하게 되면서 내실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절대 미각의 소유자로 지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마치 빈 도화지처럼 지훈에게 배운 갖가지 요리법을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
"아, 짜증! 요 근래 이런 기사가 왜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네."
"준상아, 어디 갔다 와?"
"운동 삼아서 가까운 약수터를 다녀왔어요."
"그러면 기분이 상쾌할 텐데 왜 그리 인상을 써?"
"신문에 또 안 좋은 기사가 나왔으니 그러죠."
"무슨 기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신문을 가지러 갔던 강민구와 함께 유준상이 올라왔다.
그런데 신문을 펼쳐 든 준상은 어떤 기사를 읽은 것인지 입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한식의 전통성을 지켜야 한다면서 우리 가게를 괜히 헐뜯는 기사가 또 나왔잖아요."
"뭐! 이번에는 어디야?"
"요식업중앙회 회장이라는 자예요."
이건은 지난주 월요일의 방송 출연을 계기로 여러 방송사의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궁중 요리의 정통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마치 그 모든 것이 가온누리 때문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상당해서 사이버 공간에서는 가온누리를 비난하는 글이 속속 올라왔고, 심지어는 한식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온누리를 이용하지 말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훈과 가온누리의 직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분위기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확대, 생산되는 점이었다.
특히 신문이 요란했는데 거의 모든 신문에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한식과 궁중 요리의 정통성을 지키는 일에 관계 당국이 나서야 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그 사람이 또 뭐라고 했는데?"
"장삿속에 급급해서 국적 불명의 요리를 만드는 한식당이 너무 많다면서 업소들이 책임 의식을 갖고 알아서 우리의 정통성을 지키자고 했어요."
"우리를 까는 내용은 따로 없고?"
"왜 없겠어요? 대형 업소가 가장 큰 문제라더군요. 그들이 가장 중요한데, 과연 그런 정화 움직임을 스스로 보일지 의문이라면서 넌지시 우리를 언급했어요."
"뭐! 정화?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내 말이 그거예요! 어! 이상한 단체가 만들어졌다는 기사도 실렸네요."
"무슨 단체?"
"왕족이라면서 방송에 나온 사람하고 우리 가게를 노골적으로 씹어 댔던 궁중 요리 전문가들이 모여서 오늘 궁중요리계승협회를 발족시킨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