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회: 5-21 -->
그사이 다른 병실의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과일 몇 개와 함께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공기 밥 한 그릇을 가져왔다.
"식사가 부족할 것 같아서 갖고 왔는데 이걸 드시겠어요? 조금 전에 한 밥이에요."
"아유~! 고마워요."
다른 분의 도움으로 밥을 얻은 강민구가 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초췌한 표정의 노인 한 명이 병실로 다가왔다.
빈 접시를 들고 있는 노인은 민구를 보자마자 대뜸 요리를 한 당사자인지 물어봤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 가져온 음식입니다만, 왜 그러시죠?"
"그러니까 네가 요리를 했냐고?"
"거들기는 했습니다."
"그럼 요리를 한 사람은 누구냐?"
"우리 사장님인데 왜 그러시죠?"
"네가 일하는 식당이 어디냐?"
"가온누리입니다."
"영감님, 왜 그러세요? 요리가 입에 맞으시면 조금 더 드릴까요? 맛있죠?"
영감과 아들의 대화를 지켜본 민구 어머니는 요리를 더 챙겨 줄 생각에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반찬 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영감의 입에서 생각도 못 한 말이 튀어나왔다.
"가게로 돌아가거든 거기 사장에게 잔재주만 부리지 말고 요리에 더 신경을 쓰라고 전해라."
"영감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놈아, 왜 그렇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너희 사장에게 알량한 잔재주로 사람을 현혹시키려 하지 말고 요리 그 자체를 더 노력하라고 전하라고."
"우리 요리가 어때서요?"
영감의 얘기는 가온누리의 요리가 맛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강민구는 발끈해서 한마디 했다.
"네놈도 요리사냐?"
"그렇습니다."
"쯧쯧, 요리를 한다는 놈의 혓바닥이 그리 둔해서 어디다 쓰겠냐? 네놈도 갑갑한 놈이구나."
"이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남의 귀한 아들에게 뭐라고 하는 거야?"
음식이 맛없다고 타박을 하던 영감이 아들에게까지 뭐라고 하자 민구의 어머니가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
영감에게 싸 줄 요리를 챙기던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삿대질까지 하며 영감을 쏘아붙였다.
영감의 입에서 강민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이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이놈아, 너도 주둥이가 있으면 이 요리들을 먹어 봤을 것 아니냐? 이 요리들은 자기만의 맛이 없다. 자고로 모든 음식에는 그것만의 특징이 있는데, 이것들은 맛이 하나같이 똑같잖아?"
"맛이 똑같다고요?"
"그래, 이놈아! 그럼에도 음식의 맛이 좋다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긴 하더구나."
가온누리의 요리가 특징이 없고 맛이 똑같다는 얘기는 후배 요리사인 유준상이 종종 했던 말이었다.
더군다나 지훈은 그가 절대 미각을 갖고 있다고 했고, 자기가 보기에도 준상의 미각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영감이 준상과 똑같은 얘기를 하자 무심코 넘길 수가 없었다.
"영감님, 정말로 모든 요리의 맛이 똑같은가요?"
"요리사란 놈이 그것도 몰라서 물어보는 거냐? 솔직히 말하면 맛은 아주 좋다. 하지만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모든 요리의 맛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다."
"재료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맛이 날 수 있다는 겁니까?"
"이놈아,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이다. 식자재가 다른데 어떻게 요리마다 똑같은 맛이 나는지 나도 그게 궁금하다."
"영감님, 혹시 요리사세요?"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시간 나시면 우리 가게에 와 주실 수 있겠어요?"
"네가 아니더라도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가 볼 생각이다."
"오시면 꼭 저를 찾으세요. 요릿값은 제가 낼게요."
"오냐, 알았다."
백화점을 비롯해서 수많은 상점이 불야성을 이루는 동경의 긴자거리 끝자락에 몇 대의 벤츠가 줄지어 들어섰다.
워낙 많은 야쿠자들이 타고 다녀서 야쿠자의 차로 불리는 벤츠가 줄지어서 거리를 누비자 지나가던 행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긴자거리 뒤쪽에 자리한 유흥가에 당도한 다섯 대의 벤츠가 유흥업소로 가득 찬 6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손 상, 이쪽입니다."
"알겠습니다."
다섯 대의 벤츠에서 내린 이들은 하나같이 검은 양복에 당당한 체구를 갖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야쿠자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부산에서 사라진 상어도 있었는데, 그는 한 야쿠자를 따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요시노 상, 밖에서 봤을 때는 6층 건물인 줄 알았는데 7층도 있었습니까?"
"6층 건물 맞습니다. 7층은 옥상 층인데, 그곳에 동경 지부가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내려서 계단을 통해서 옥상으로 올라간 상어는 세 개의 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야마구치구미의 동경 지부에 들어섰다.
"손 상, 보스를 비롯해서 간부님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는 만큼 예의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염려 마십시오."
"보스님과의 면담은 간부 회의가 끝난 후에 마련될 예정이니, 우선은 이곳에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요."
상어와 함께 빈방에 들어선 젊은 사내는 재일 교포 출신의 야쿠자인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는데, 그는 상어의 본명인 손성호의 성을 따서 손 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상어가 통역 겸 안내 역할을 하고 있는 요시노와 함께 야마구치구미의 총보스를 비롯한 고위 간부와 면담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보스, 한국에서 온 손성호 상을 모셔 왔습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손성호입니다."
"어서 오시오."
"지난번 일은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손성호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는 요시노는 그가 얘기를 하면 바로 일본어로 통역을 했고, 반대로 보스가 얘기를 하면 그걸 한국말로 번역해서 들려줬다.
"듣자니 우리가 보낸 조직원들이 한 명에게 당했다던데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한국에 그만한 실력자가 존재하고 있다니 놀랍소. 대체 그자가 누구요?"
"요리사라고 들었습니다."
"요리사?"
"그렇습니다."
강오성과는 다르게 마약과 인신매매를 비롯한 불법적인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손성호는 오성파 2인자의 자격으로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국의 암흑가를 직접 장악할 계획을 갖고 있는 야마구치구미는 교두보 확보 차원에서 손성호와 계속해서 접촉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손성호를 오성파의 보스로 만들기 위해서 세 명의 사무라이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 세 명이라면 총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가히 천하무적의 실력을 뽐내며 손성호의 반란을 어렵지 않게 성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는 달라서 조직에서 자랑하는 세 명의 사무라이는 병신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 말은 그자가 한국의 암흑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입니다. 그자는 한국에서는 유명한 식당의 사장이자 주방장입니다."
"그런 자가 무슨 수로 그런 짓을?"
"저도 그게 의아합니다."
"믿을 수가 없군."
"제 짐작이지만 결코 사람 같지 않은 몸놀림을 봤을 때 그자는 신비한 무술을 배운 것 같았습니다."
"암흑가의 인물이 아니라니 당황스럽군."
"보스, 그자가 암흑가의 인물이 아니라면 차라리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런 자라면 복수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우려하는 문제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조직에서 큰 기대를 하고 있던 세 명의 사무라이가 거동 불능의 장애자로 돌아오자 야마구치구미의 많은 간부들은 복수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반대의 의견을 갖고 있는 간부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복수를 하게 되면 오히려 한국 조폭들의 감정을 자극해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의 당사자가 조폭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부담 없이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가지 묻겠네. 그러면 그자는 어찌해서 그대의 일을 방해한 것인가?"
"우연의 일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자는 신성OB파의 유병만 회장과 아주 친밀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신성OB파의 보스와 아주 친밀한 사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신성OB파의 2인자가 강오성을 소개시켜 주기 위해 부산으로 동행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부터 한국의 암흑가를 장악하려고 했던 야마구치구미의 보스와 간부들이기에 신성OB파는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성OB파는 한국 최대의 폭력 조직으로 서울과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대표 조직과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이들이 직접 한국 암흑가를 장악하려고 하는 것도 신성OB파와 관련이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빠르게 합법적인 영역으로 진출한 신성OB파가 대부업을 비롯해서 자신들이 그동안 한국에서 벌이고 있던 사업에 대대적으로 진출하자 수익률이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
게다가 유병만은 노골적으로 야쿠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이들을 한국에서 축출하기 위해서 전 방위적인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이런, 일이 더럽게 꼬여 버렸군."
"보스, 그자가 유병만과 관계가 있다면 복수를 했다가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이라면 모를까, 한국에서 신성OB파와 전면전을 벌였다가는 위험 부담이 너무 많습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한국의 정치권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만큼 예상 밖의 역풍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암흑가와 정치권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의 무대가 한국이라는 점이었다. 즉, 신성OB파가 한국의 정치권을 움직이면 야마구치구미는 그들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까지 상대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이들이 밀리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니 분하고 아쉽더라도 유병만과 친밀한 지훈에 대한 복수는 포기해야 했다.
결국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내던진 손성호의 말 때문에 지훈에 대한 복수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언론과 방송에서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10일 넘게 계속 떠들어 대는 탓에 예전보다 손님이 감소한 가온누리는 저녁 8시가 넘어서면서 제법 한산해졌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비해서 일찍 한산해진 매장을 보면서 직원들이 쑥덕거리고 있을 무렵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가게에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혼자 오셨습니까?"
"보면 몰라?"
"아!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메뉴판 줘 봐."
"여기 있습니다."
"꼴에 궁중 요리라고 써 놓기는. 요즘은 아무나 궁중 요리야."
"네?"
"됐고, 여기서 파는 것들 다 가지고 와 봐."
"예?"
"귓구멍이 막혔어? 여기 있는 것들 다 갖고 오라고."
"손님, 혼자서 드시기에는 양이 너무 많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갖고 오기나 해."
"아……알겠습니다."
주문을 받는 수철에게 성을 내는 영감은 이틀 전에 강민구에게 한 소리를 했던 요양원의 영감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가온누리의 모든 메뉴를 시켰고, 요리가 나오면 맛만 보다가 말았다.
게다가 맛을 본 직후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쯧쯧, 다 똑같아."
"손님, 접시를 놓을 공간이 없는데, 이쪽의 요리들은 어떻게 할까요?"
"갖다 버려."
"네?"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해? 갖다 버리라고!"
"아……알겠습니다."
워낙 많은 요리를 시킨 탓에 영감이 자리한 테이블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각종 접시와 그릇으로 넘쳐 났다. 그 때문에 서빙을 하던 수철은 요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접시를 빼내기 시작했는데, 음식을 갖다 버리라는 말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건 왜 이래. 신선로가 모양과 색만 살렸지 맛은 영 아니잖아? 대체 이건 어느 나라 음식이야?"
"영감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뭐가 어쩌고 어째?"
방송과 언론에서는 궁중 요리의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논리로 가온누리를 비방했는데 영감의 입에서도 똑같은 얘기가 나오자 수철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