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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식자재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 같은가?"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들려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아까 내가 요리를 했던 신선로가 가장 확실한 예가 될 수 있겠군. 자네는 신선로의 기본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오방색을 돋보이게 해야 하고 여러 재료가 사용됨에도 육수의 맛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천지만물이 하나로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었을 때 세상이 편안해진다는 우리 민족의 우주관과 일치합니다."
"말은 잘하는군. 그런데 자네가 만든 신선로는 어땠는가? 육수 본연의 맛과 재료가 어우러진 맛을 국물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육수가 재료의 맛을 끌어안으면서 육수 본연의 맛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의……. 아!"
지훈은 대답을 하다 말고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탄식을 터트렸다.
원래 신선로는 재료의 맛이 튀지 않으면서 육수 안에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화음을 맞춰야 했는데, 지훈의 신선로는 음양오행기 때문에 모든 재료의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즉, 그는 신선로의 기본을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이제 이해가 가는가?"
"그랬군요."
"비단 신선로만 그런 것이 아니네. 모든 요리가 음양오양기 때문에 그 본연의 맛을 상실했네. 물론 대자연의 기운이 들어갔으니 맛은 있었지만, 그럴 거라면 굳이 여러 가지 요리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아!"
아까 신선로와 관련한 얘기는 몇 년 전에 자신이 유나에게 신선로 요리의 핵심이라며 들려줬던 얘기와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자신은 음양오행기에 너무 의지한 나머지 어느 순간부터 요리의 기본을 잊은 것 같았다.
막말로 영감의 말처럼 그럴 바에는 여러 가지의 메뉴가 아니라 한 가지 메뉴만 내놔도 무방했다.
"알아들은 것 같으니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음양오행기의 효과를 충분히 전달하면서도 요리 고유의 맛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야."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왜 내게 묻는 것인가? 그건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자네가 직접 풀어야 할 숙제네."
"저는 솔직히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궁중 요리라면 모를까, 내가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알려 줘?"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지훈은 영감의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준상을 능가하는 절대 미각과 아까 시범을 통해 보여 줬던 엄청난 요리 실력이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중하고 공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요청했고, 끝내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는 데 성공했다.
지훈을 제자로 받아들인 김상돈은 요양원을 나와서 가온누리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상돈은 자신이 알고 있는 궁중 요리의 비법을 지훈에게 아낌없이 전수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안 밝혔다.
그러는 사이 2주의 시간이 지나 달이 바뀌어서 5월이 되었다.
하지만 가온누리에 대한 언론과 방송의 공격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계속되었다.
아울러 이재철이 주도한 궁중요리계승협회는 창립총회까지 마치고 주무 부처에 신고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주최하는 궁중 요리 대회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각 방콕에서는 쏨이 장쉬엔을 만나고 있었다.
"장쉬엔, 어서 와."
"쏨, 그동안 많이 예뻐졌다."
"정말?"
"그럼. 이 정도라면 남자들이 수없이 들이대겠는데?"
"태국 남자들은 눈이 삐었나 봐. 여태껏 그런 적이 없어."
"네가 너무 가게에만 매어 있어서 그런 것 아냐?"
"그럴까?"
"당연하지. 자고로 남자를 만나려면 잘 꾸미고 클럽 같은 곳을 다녀야 해."
"말도 마. 클럽 가 본 지가 1년도 넘었어."
"정말? 그러면 1년 동안 일만 한 거야?"
"응, 너무 바빴어. 하지만 그 덕에 르꼬르동 시암 매장을 태국 전역으로 확장했어."
"벌써?"
"아버지가 힘껏 도와주셔서 가능했어."
"그래도 그렇지, 그 많은 매장을 오픈하려면 엄청 고생했겠다."
"그러니까 지금껏 연애도 못 했지."
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콕 제일의 번화가에 르꼬르동 시암을 오픈한 쏨은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태국 제일의 유통업체인 센트럴과 손잡고 모든 주도에 직영점을 개설했다.
쉽게 말해서 센트럴은 거의 대부분의 주도에 대형 복합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쏨의 르꼬르동 시암이 그 쇼핑몰들에 입점을 한 것이다.
"오늘 저녁은 신나게 달려야지?"
"그럼, 장쉬엔이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아! 클럽을 간다고 하니까 수아와 지훈 그리고 동석과 혜미가 생각난다."
"나도 그래."
"그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수아는 계속 프랑스에 남아 있고, 다른 친구들은 한국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던데?"
"나도 그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서 봤어. 거기가 지훈의 레스토랑이라면서?"
"응, 아주 유명해서 태국 사람들도 한국으로 관광을 가면 지훈의 레스토랑을 찾아간대."
"어! 중국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거길 가면 자랑삼아서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리고 그래."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야."
"그렇겠지. 지훈의 요리 실력이 그만큼 대단하잖아?"
"장쉬엔, 그 말 하니까 갑자기 지훈이 만들어 준 갈비찜이 너무 먹고 싶다."
"난 불고기가 자꾸 생각나."
"장쉬엔,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은 한국 요리를 먹을까?"
파리에서 지낼 때 지훈 일행과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기에 쏨과 장쉬엔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때를 추억하는 얘기가 많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온누리도 언급되었는데, 이미 태국과 중국에도 제법 알려진 상태인지라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좋지. 설마 태국에도 가온누리가 있는 거야?"
"아냐, 없어."
"그렇구나. 난 네가 바로 먹으로 가자고 해서 가온누리가 태국에 진출한 줄 알았어."
"그랬으면 자주 갔지. 하지만 아쉽게도 태국에는 가온누리가 없어. 혹시 중국에는 있어?"
"마찬가지야, 없어. 그래서 가끔씩 한국 음식이 생각나면 다른 한국 식당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는 지훈이 해 준 맛이 안 나."
"나도 그런 경험이 많은데 너도 그랬구나."
"아! 지훈의 식당이 중국에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아서 어떨 때는 내가 매장을 차려 주더라도 지훈의 가온누리를 방콕에 유치하고 싶어."
"쏨, 그러다가 이곳보다도 그곳에서 식사를 더 많이 하는 것 아냐?"
"큭큭, 그럴 것 같아. 하지만 사업적으로 생각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아까도 얘기했지만 가온누리는 태국에서도 유명하거든. 그리고 태국 사람들은 한국이라면 무조건 좋아하거든."
"중국에도 그런 사람은 많아."
"그러니까 가온누리를 태국이나 중국에 유치하면 사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지훈의 맛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그건 유지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훈도 자신의 식당을 여러 곳에 냈겠지."
"지훈의 식당이 여러 곳에 있어?"
"장쉬엔은 아직 몰랐나 보네?
"처음 듣는 얘기야."
"그랬구나. 사실 나도 얼마 전에 수아와 통화를 해서 그 얘기를 들었어."
"수아는 지훈과 괜찮은 거지?"
"서로 멀리 떨어져서 볼 수는 없지만 통화는 자주 하나 봐. 그리고 수아도 2~3년 후에는 한국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봐."
"잘되었네. 자고로 연인은 함께 있어야 해."
"나도 그렇게 얘기했어."
"그나저나 지훈의 식당이 여러 곳이라면 적극적으로 고민해 봐야겠는데."
"뭘?"
"중국에 가온누리를 유치할 수만 있다면 인산인해를 이룰 것 같거든."
"나도 같은 생각이야."
"쏨, 우리 한국을 다녀올까?"
"언제?"
"난 아무 때라도 좋아. 너만 좋다면 내일이라도 가능해."
"난 오픈 예정된 매장이 아직도 여러 개 남아서 한동안은 시간 낼 수 없는데 어떡하지?"
"그러면 언제쯤 시간을 낼 수 있어?"
"아무리 빨라도 다음 달 초에나 가능할 것 같아."
"6월 초? 좋아, 그맘때에 함께 가는 게 어때? 그리고 간 김에 한국 관광도 하고."
"그렇게 해 주면 나야 좋지."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나도 일정을 조절할게."
"지훈과 동석 그리고 혜미를 다시 볼 수 있다니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아마 그 친구들도 그럴 거야."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가온누리를 헐뜯던 방송과 언론의 움직임이 별안간 잠잠해지더니 이제는 2주 앞으로 다가온 지자체 선거와 관련된 내용이 뉴스와 언론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온누리와 관련된 비방이 중단된 배경에는 지자체 선거가 임박한 탓도 있지만 김기철의 보이지 않은 힘이 작용해서 그리되었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언론과 방송의 공격에서 벗어난 지훈은 김상돈으로부터 궁중 요리의 비법을 하나씩 배워 가며 초심을 찾아가고 있었다.
반면 여전히 대통령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김기철은 급한 마음에 일단 사태를 마무리하기는 했지만 큰 상처를 받은 지훈을 과연 보궐선거에 내보내야 하는지 스스로 회의에 빠졌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 문제와 관련해서 대통령을 만났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뭡니까?"
"이지훈 셰프와 관련된 일입니다."
"얘기해 보세요."
"최근 방송과 언론에서 가온누리와 이지훈 셰프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있었습니다."
"방송과 언론에서 이지훈 셰프를 공격할 이유가 있나요?"
"조사해 본 결과 TJ그룹의 이재철 전무가 개입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벌인 겁니까?"
"TJ그룹에서 한식당을 표방한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출범하기에 앞서 시장의 선두 업체인 가온누리의 아성을 꺾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언론과 방송을 동원해서 가온누리를 공격했다는 것입니까?"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군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천박한 짓을 하는 것인지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요?"
"제가 나서서 상황을 무마시켰습니다."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추악한 짓을 벌인 TJ그룹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지요?"
김기철이 오해를 할 정도로 대통령은 지훈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아울러 중소기업을 끌어안고 상생을 하기보다는 무조건 찍어 누르려고 하는 재벌의 작태에 반감을 갖고 있었기에 대번에 TJ와 관련한 일을 물었다.
그 모습을 본 김기철은 더더욱 대통령의 의중을 오해했고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TJ그룹 전체가 나선 일은 아니었기에 이번 일을 주도한 이재철 전무에게 가벼운 주의를 주는 선에서 끝냈습니다."
"하긴 그렇겠군요.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로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거죠?"
"비록 근거 없는 헛소문이기는 하지만 언론과 방송에서 자주 노출된 통에 이지훈 씨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이 전에 비해서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랬겠죠. 그러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이지훈 씨가 출마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지훈 씨가 출마를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네?"
"방금 이지훈 씨가 출마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이지훈 씨가 요리를 안 한다는 것입니까? 왜요? 뭐 때문에 그 아까운 재주를 썩힌답니까?"
대통령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연신 질문을 쏟아 냈다.
그건 대통령이 그의 출마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다른 말로 풀이하면 김기철 자신이 대통령의 뜻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눈치 빠른 김기철은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말을 급히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