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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일각에서 대중적인 지명도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업에서도 성공하고 있는 이지훈 씨를 영입해서 20대의 표심을 사로잡자는 의견이 논의되었다고 합니다."
"이지훈 씨가 당에 들어오면 20대에 어필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 최고의 요리사로, 요리를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에서 지낼 때 그 존재 자치가 빛나지 않을까요?"
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지훈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일 생각이 없음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덕분에 자신이 오해했음을 재차 확인한 김기철은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당의 몇몇 인사들의 얘기인 만큼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얼마 후, 대통령 집무실을 빠져나온 김기철은 새나라당의 고위 인사들에게 연락을 해서 지훈과 관련한 논의를 모두 백지화하라는 얘기를 전달했다.
대통령의 뜻이라기에 지훈을 무조건 전략 공천 하려고 했던 당의 고위 인사들은 180도 바뀐 상황에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대통령의 뜻이라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는 말로 화답했다.
정작 당사자는 모르고 있었던 지훈의 정치계 입문 시나리오는 이렇게 끝이 났다.
가정이지만 만약 김기철이 끝까지 오해를 해서 지훈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면, 한식의 세계화와 의식동원의 실천에 뜻을 두고 있는 지훈은 거절을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지훈과 김기철의 관계는 틀어졌을 것이 틀림없고, 권력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김기철은 지훈을 여러모로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가 적절한 시기에 풀린 이상, 두 사람이 척을 질 일은 없었다.
*12. 그것들이 전부 모였다고?
칙칙한 어둠이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은 바다에 솜뭉치 같은 해무가 아스라하게 번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살포시 다가선 안개가 세상의 모든 것을 뒤덮고 있을 무렵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바다를 뚫고 한 척의 낡은 어선이 남해를 가르고 있었다.
"봄날에 무슨 안개가 이렇게 자욱한 거야. 선장, 육지에는 무사히 갈 수 있겠소?"
"이쪽 바다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암튼 바다에 빠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조심하시오."
뱃전에 서서 자욱하게 낀 해무를 바라보며 투덜거리는 사내는 부산에서 사라진 상어였다.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불법 밀항선에 몸을 실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선장, 여기는 핸드폰이 터지는 곳이오?"
"그건 왜 묻는 거요?"
"전화 한 통화만 씁시다."
"미쳤소?"
"그러지 말고 한 통화만 씁시다. 통화료는 두둑하게 주겠소."
"그러다가 재수 없으면 걸릴 수도 있는데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핸드폰을 달라는 거요?"
"거참, 난 조선족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고 몇 번 말했소? 사정이 있어서 잠시 한국을 떴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무슨 일이 생길 것이 뭐가 있겠소?"
"몰래 한국을 떴다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쫓기는 게 분명한데 그깟 돈 몇 푼 벌 욕심에 위험을 자초할 생각은 없소."
"알았으니까 관두쇼."
휴대폰을 빌리려다가 무안만 당한 상어는 투덜거리며 선실로 들어갔고, 어선은 그 와중에도 자욱한 해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2시간 후에는 남해의 이름 모를 포구에 당도했다.
"다 왔으니까 내리쇼."
"나중에 또 봅시다."
"잔소리 말고 빨리 가시오."
선장의 재촉에 포구에 내린 상어는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잡화점 옆의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누군가의 번호를 불러낸 후에 공중전화기의 다이얼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우탄아, 나다."
-누……누구세요?
"벌써 내 목소리를 잊은 것이냐?"
-사……상어 형님?
"오냐, 나다."
-혀……형님!
"통화 가능하냐?"
-괜찮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어디십니까? 일본으로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일이 있어서 돌아왔다."
-형님, 강 회장이 눈이 시뻘게져서 찾고 있는데, 어쩌시려고 돌아왔습니까?
"아직 마무리를 못 한 일이 있어서 돌아왔다."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감에도 강오성은 여전히 상어를 찾고 있었고, 상어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두 가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첫 번째는 한국에서 보유하고 있던 현금과 비밀리에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처분해서 도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야마구치구미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주고는 있지만 그 정도의 지원으로는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 지내기가 너무 팍팍했고, 또 지원이 계속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훈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복수의 최우선 목표는 강오성이었다.
그러나 강오성을 노렸다가는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에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거사를 결정적으로 망친 자가 지훈이었기에 최소한 그자만큼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다만 지훈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정면으로 그와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인데요?
"그보다 너는 어디냐?"
-부산입니다.
"부산은 어때, 우리 애들은 다 괜찮아?"
-말도 마십시오. 강 회장이 다 쳐 내서 병신이 되었거나 빵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용케 빠져나간 놈들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런 말 마십시오.
"내가 맡은 구역은 어떻게 되었냐?"
-세 개로 쪼개져서 다른 형님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구나."
-죄송합니다, 형님. 그때 제가 있었더라면 애들을 더 끌어모을 수가 있었을 텐데…….
"우탄아, 지나간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상어와 지금 통화하고 있는 자는 거대한 체구와 생김새 때문에 오랑우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자로, 김만수와 함께 상어와는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그날의 거사에는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것 때문에 강오성의 응징을 피한 상태였다.
-너무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
-형님, 강 회장을 도모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아니, 지금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강 회장을 제거할 생각은 나도 없다."
-그러면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대포 폰과 대포 통장 그리고 대포 차가 필요하다."
-형님, 한국에 계속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여기서 정리하고 처분할 것은 처분해야 도피 자금을 만들 것 아니냐?"
-아! 그렇다면 돕겠습니다.
"고맙다. 그리고 그날 일을 망친 이지훈이란 자에 대해서 알아봐 줄 수 있겠냐?"
-그자는 왜요?
"강 회장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놈만큼은 기어이 죽여야만 내 분이 풀릴 것 같다."
-애들 말로는 엄청난 실력자라던데 형님 혼자서는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나도 연장으로 담글 생각은 없다."
-그러면요?
"어차피 죽이기만 하면 되니 차로 갈아 버릴 생각이다."
만약 조직 간의 전쟁이나 응징이라면 그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실력 행사를 해야 했다.
쉽게 말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상어가 직접 연장을 챙겨서 작업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상어가 노리는 것은 복수였고, 그러니 죽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대포 차도 필요하다고 하셨군요?
"그래, 부탁한다."
-그러면 부산으로 직접 오실 생각이십니까?
"부산은 부담스러우니까 서울에서 만나자. 그리고 한두 명만이라도 날 도와줄 수 있는 동생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에 있는 몇몇 동생들에게 연락을 해 놓을 테니, 당분간 그쪽에 계십시오.
"믿을 만한 놈들이겠지?"
-의리 빼면 시체인 놈들이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래, 고맙다."
아직 5월 하순임에도 태양은 뜨겁기만 해서 한여름을 연상시키는 무더위가 계속 이어졌다.
짧은 봄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변화가 와서 다들 가벼운 옷차림이 되었다.
그렇게 빠른 여름이 시작된 가운데 언론과 방송의 집요한 공격에서 벗어난 가온누리는 근 한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예전의 성세를 거의 회복해 가고 있었고, 지훈은 변함없이 궁중 요리의 정수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발판 삼아 큰 문제로 지적받았던 모든 요리의 맛이 똑같은 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선생님, 이쪽의 불고기 맛은 어떻습니까?"
"육질이 씹히는 식감도 아삭하면서 양념 사이로 육질 본연의 쫄깃한 맛이 살아 있는 것이 아주 좋구나."
"그러면 이쪽 것은 어떻습니까?"
"이건 키위 맛과 벌꿀 맛이 너무 강하다 보니 육질 본연의 맛이 많이 잠긴 것 같다."
"짐작했던 대로군요. 그러면 제일 마지막 접시에 담긴 불고기는 어떻습니까?"
"그건 음양오행기가 많이 주입되었는지 그 맛이 다른 맛을 모두 잠재워 버렸다."
"역시 그렇군요."
"자꾸 뭐가 그렇다는 것이냐?"
"선생님, 여기 있는 불고기들은 별도로 음양오행기를 주입하지 않고 똑같은 양념과 장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맛의 차이가 있다면 양념과 장의 사용량에 차이를 둔 것이냐?"
가온누리에서 사용하는 양념류와 장류 그리고 각종 향신료에 음양오행기가 주입된 사실은 김상돈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음양오행기 특유의 맛이 강하게 나는 마지막 접시의 불고기에는 양념과 장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지훈의 대답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양념과 장의 사용량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사용량에 차이가 없는데도 맛이 서로 다르다니,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선생님이 일전에 얘기하셨던 것처럼 음양오행기를 세분화해서 사용해 봤습니다."
"음양오행기를 세분화했다고? 어떻게?"
"먼저 육수나 국물 요리에 사용되는 장류는 음양오행기 중에서도 수의 기운을 강하게 집어넣었고, 불이나 열에 직접 노출되는 주재료에 첨가되는 장류는 화의 기운을 강하게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양오행기의 기운을 분류해서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동안 계속 실패하다가 오늘 새벽에서야 성공했습니다."
"그랬구나, 장하다!"
지난 45일 동안, 김상돈은 지훈에게 궁중 요리의 비법을 전수하는 한편 음식 본연의 맛을 덮어 버리는 음양오행기 특유의 맛을 제어하기 위해서 많은 궁리를 했다.
사실 그 부분은 음양오행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음양오행기가 요리에 들어가면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먹는 이의 건강을 이롭게 해 주기에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온갖 궁리를 해 봐도 좀처럼 답을 찾지 못해서, 답답한 마음에 음양오행기의 각 기운을 분류해서 사용해 보자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물론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고 너무 답답한 마음에 그냥 해 본 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지훈은 놀랍게도 음양오행기의 기운을 세분화하는 데 성공했다.
"선생님, 좀 더 연구를 해 봐야겠지만 각 요리나 식자재에 맞는 기운을 정확히 알아낸다면, 요리 본연의 맛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썼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런 소리 마라. 난 실제로 그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넋두리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래도 선생님 덕분에 답을 찾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서야 본래의 초심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노인네의 잔소리가 무척 귀찮았을 텐데 묵묵히 잘 따라와 줘서 정말 고맙다."
"선생님, 많은 가르침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상돈이 지훈에게 가르침을 준 기간은 고작해야 45일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그 시간 동안 지훈은 모든 열정을 요리에 다 바쳤던 예전의 초심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