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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과의 인연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작년 여름에 한국에 들어온 쥬디는 들어올 때부터 많은 이의 관심을 받더니 몇 개월 전부터는 방송국의 리포터로 맹활약했다.
시청자들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는 쥬디가 아직은 서툰 한국말로 방송을 진행하다가 가끔씩 실수라도 저지르면 무척 재미있어했는데, 그 덕에 그녀가 맡은 프로는 시청률에서 타 방송사를 압도했다.
"지훈, 시간 내줘서 고마워."
"날 촬영해 주니 내가 더 고맙지. 그런데 한국 생활은 어때?"
"너무 재미있어."
"힘든 점은 없어?"
"가끔씩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것만 제외하면 너무 좋아."
"방송은 잘 보고 있어.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종종 가온누리로 놀러 와."
"알았어, 그렇게 할게."
한국에 도착한 쥬디는 지훈을 가장 먼저 찾았고, 지훈은 그녀가 한국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쥬디가 방송 일을 시작하면서 많이 바빠진 통에 지금은 가끔씩 통화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는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여기까지 온 김에 대회의 우승자가 결정 나는 것은 보고 가야지. 참! 여기 오기 전에 가수 리아 씨 만나서 인터뷰했는데 안부 전해 달래."
"리아가 한국에 있어?"
"오늘 아침에 들어와서 밀린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계속해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어."
쥬디는 방송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자리 잡은 리아와 독점 인터뷰를 했다.
사실 리아처럼 세계적인 슈퍼스타는 인터뷰를 따기도 힘들뿐더러 설령 딴다고 해도 상당히 오래전에 미리 약속을 잡아야 했다. 그렇다 보니 이제 막 방송 일을 시작한 쥬디가 리아와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는데, 지훈의 소개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서 쥬디는 리아와도 친구가 되었다.
"대회 끝나면 문자라도 보내야겠네."
"그렇게 해. 그리고 지훈……."
"왜? 무슨 말인데 말을 하려다가 말아?"
"우리 담당 PD가 그러는데, 이번 대회가 이상하대."
"뭐가?"
"채널 TJ에서 널 깔려고 뭔가 많이 준비한 것 같대."
"날 깐다고?"
"응, 우리 PD가 그쪽 PD와 친분이 있어서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그런 얘기를 했어."
"채널 TJ에서 날 왜?"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TJ그룹에서 널 많이 싫어한대. 그리고 지난번에 방송과 언론에서 떠든 것도 TJ그룹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어."
쥬디의 얘기를 듣는 순간 지훈은 바로 이재철을 떠올렸다.
'설마 그때의 제안을 거부해서?'
이재철과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척을 진 적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외식 사업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거부한 일과 고담의 특허권 침해와 관련해서 사소하게 얽힌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TJ그룹이 태클을 걸어온다면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네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호락호락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음양오행기를 분류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궁중 요리의 비법을 배운 지훈은 상대가 어떤 농간을 부려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과연 지훈의 뜻대로 될지는 의문이었다.
*2. 거기는 된장에 밥을 비볐냐?
어느덧 1시간이 훌쩍 지난 대회장은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대회의 심사를 맡은 궁중요리계승협회의 다른 임원들이 대회장을 돌며 참가자들의 요리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무렵 하혜정을 비롯한 이선웅과 전현숙은 한쪽 구석에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하 선생, 곧 종료가 될 텐데 이쯤에서 시작해야지 않겠소?"
"그래야죠."
"하 선생이 이 선생과 먼저 가는 게 어떻겠소?"
"전 선생은 같이 안 가고요?"
"나는 김미자 선생과 함께 가겠소."
"김 선생도 우리 일을 거들기로 했나요?"
"김 선생이 운영하는 학원의 수강생도 4~5명 정도는 두레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약속을 받아 냈소."
"잘하셨네요."
"이 선생, 부탁하겠소."
"걱정 마십시오. 놈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주 시원하게 독설을 퍼붓고 돌아오겠습니다."
"전 선생, 우리는 먼저 갈게요."
"아! 갈 때 방송 카메라를 대동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럼요, 기본이죠."
지훈을 무조건 깔아뭉개기로 작정한 세 명이 작당 모의를 끝냈을 무렵 다른 심사위원들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딘가로 이동했는데, 때마침 움직이려고 했던 하혜정과 이선웅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어!"
"하 선생, 왜 그러시오?"
"김상돈 명인께서 오셨습니다."
"엥! 그게 무슨 소리요?"
"저쪽을 보십시오."
"아니, 저분이 어떻게."
다른 심사위원들이 앞다투어 이동하는 곳에는 중절모에 한복 차림의 김상돈이 뒷짐을 진 채 여유 있게 서 있었다.
그사이 심사위원들 외에도 협회의 간부란 간부는 전부 그쪽으로 향했다.
대회의 심사를 맡은 대부분의 심사위원과 협회의 간부 들이 마치 귀빈을 모시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한쪽으로 몰리자 대회를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도 몰려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홍 선생님, 저분이 누구인데 다들 몰려가는 것입니까?"
"피디님, 저분이 궁중 요리의 정통과 비법을 계승한 김상돈 명인입니다."
"김상돈 명인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궁중 요리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저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분이 궁중 요리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자라는 소리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막말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저분에게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보이지 않은 서열이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되시겠어요."
갑작스러운 김상돈의 출현은 이건을 비롯한 왕실의 후손들도 움직이게 해서 그들도 김상돈 앞으로 다가갔다.
같은 시각, 쥬디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누군가."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김 숙수, 참으로 오랜만이오."
"김 숙수,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것이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얼마 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왕실의 후손들과 해후를 한 김상돈이 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결선 진출자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요리를 하다 말고 그쪽을 바라봤다. 이는 지훈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수라상을 차리다 말고 그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이들이 몰려 있는 통에 김상돈을 발견하지 못했고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다시금 요리에 집중했다.
"선생님,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것입니까?"
"저희들이 선생님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고 계십니까?"
"너희들이 나를 왜 찾아?"
"저희들이 선생님을 찾은 이유가 뭐겠습니까?"
"선생님, 저희들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어 가기 위해 궁중요리계승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선생님을 회장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궁중 요리의 맥을 정통으로 계승한 선생님이 협회를 이끌어야지 않겠습니까?"
궁중요리계승협회는 열 명의 회장이 협회를 대표하는 집단 지도부 체제였다. 하지만 협회를 설립하는 데 있어서 TJ가 큰 역할을 한 통에 그들과 손을 잡은 하혜정과 이선웅 그리고 전현숙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그렇다 보니 그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는데, 그들은 김상돈을 협회로 끌어들여서 그들 세 사람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김상돈이라면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에 궁중 요리와 관련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찬성을 할 것 같았다.
"다 늙은 마당에 협회는 무슨."
"우리나라에서 선생님이 아니면 어느 누가 궁중 요리를 대표할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후진을 위해서도 부디 선생님께서 협회를 이끌어 주십시오."
"선생님, 우선은 앉으시지요."
"선생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협회의 다른 임원들이 김상돈을 앞세워서 자신을 견제하려 함을 대번에 간파한 하혜정과 전현숙은 이선웅과 함께 김상돈을 연단으로 안내했다.
사실 김상돈을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상돈만 끌어들인다면 이재철이 설립한 두레는 명실상부하게 궁중 요리의 맥을 정통으로 이었다는 후광을 등에 업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임원들이 그에게 어떤 말을 할지 모르기에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 선생, 아까 그 일은 심사 때로 미뤄야겠소."
"심사 때만 해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겠소?"
"나도 하 선생과 같은 생각이오.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오."
"그렇게 하지요."
심사 전부터 지훈을 깔아뭉개려고 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바꾼 하혜정 일행은 그간의 근황을 물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두레에 대한 언급을 했다.
하지만 김상돈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얘기를 무시했고 그러는 사이 요리 시간이 종료되었다.
'선생님도 오셨네.'
미션 시간 내에 요리를 마감한 지훈은 심사위원을 비롯해서 궁중요리계승협회의 임원들과 함께 연단에 앉아 있는 김상돈을 발견했다.
'협회의 임원들과 인연이 있다고 하더니, 잘 아는 사이였구나.'
지훈은 아직까지 김상돈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이는 김상돈이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해서 묻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실력에 반해서 선생님으로 모신 이상 굳이 이름은 중요치가 않았다.
하지만 협회의 모든 임원들과 왕실의 후손들까지 다가와서 먼저 알은척을 하는 것을 보니 궁중 요리와 관련해서는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는 인물인 것 같았다.
'하기는 그만한 실력을 갖고 계시는데 보통 분이겠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해서 알아본 적은 없지만 갖고 있는 실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훈도 김상돈이 궁중 요리와 관련해서는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사이 사회를 맡은 유명 연예인이 김상돈을 대회 참가자와 관중 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을 듣는 순간 지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헉! 선생님이 김상돈 명인이라고…….'